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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 유희'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06.13 직업과 취미2 : 꿈꾸는 식물
  2. 2013.01.14 책갈이
  3. 2013.01.04 새해의 시작
  4. 2012.12.31 겨울산
  5. 2012.12.27 레 미제라블의 추억

직업과 취미2 : 꿈꾸는 식물

단상 Vorstelltung 2013. 6. 13. 10:3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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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차를 타고 오며 가수 출신 DJ의 청취자 사연을 흥미롭게 들었다. 직장인 밴드 생활에 대한 얘기였는데, DJ는 사연을 소개한 후 음악으로만 먹고 사는 가수는 극소수이며 대부분 투잡을 한다고 했다. 오히려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음악에 대해서 더 순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먹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그 좋아함의 순수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꿈이 무엇인지 잊은 채 살기 위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물생활이다. 그렇다면 그런 꿈들이 질식되는 사회는 식물사회인 셈이고. 나도 어느 만큼은 식물상태에 있다. 꿈의 정원과 생활의 압박은 성인의 내면을 반영한다.   

 

좋아함, 꿈이란 취미인가? 연애를 한다거나, 게임에 빠지거나, 극지 여행을 하는 것도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인 선호란 자신이 그곳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그 활동을 스스로 하고자 함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 선호가 자신은 물론 주변인들과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적대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다(사회에 적대적인 것과 사회에 비판적인 것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좋은 선호인 반면 노름은 좋지 않은 선호다. 그런데 독서라고 다 좋은 선호일 수는 없다. 슈퍼갑이 되기 위해 수험서에 특정 세대가 집단적으로 몰입하는 방식의 독서가 그렇다. 엄격히 말해 이건 독서라고 할 수도 없다.    

 

한가지 애매한 지점은, 좋은 선호의 추구가 자신은 물론 주변인을 결과적으로 불행에 빠지게 하는 양상이 있는 경우다. 하루종일 독서만 하고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가장은 조선시대의 양반으로 태어났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선호를 완전히 포기하고 부양만 짊어지는 삶은 서글프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는 이런 삶의 비극을 극대화시킨다. 이에 비해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보여주는 유희 명인들의 수도자적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주지만, 헤세는 크네히트를 통해 이런 명상적 삶의 토대가 바로 현실적 삶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개성적 삶과 의무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분리의 간격이 클 수록, 그리고 그런 분리를 감추기에 급급한 사회는 개성적 삶을 질식시킨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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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이

책들 Bücher 2013. 1. 14. 14: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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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 산을 다녀온 후 예상 외로 피곤해 오후에 한숨 자고 저녁에 <유리알 유희>를 마져 다 읽었다. 부록에 해당하는 크네히트의 유고 세번째 편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불교 설화의 주제와 유사하다. 세상만사가 마야(환상)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왕족 출신 목동의 생생한 꿈처럼 체험의 결과 이후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결과에 가서는 모두 마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의 순간 순간을 마야로 치부해 버리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 삶의 전장에 일정한 거리두기로서 명상이나 요가 등의 수행법이 의의가 있겠지만 이런 삶이 없이는 명상도 유리알 유희도 없을 것이다.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난 이유의 하나가  이 교육주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했던 것처럼... 집에 굴러다니는 <레미제라블> 3권을 보니 출간연도가 1992년도 였다. 91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그 이후에 본 것이다. 이걸 다시 볼까 하다가 1,2권이 어디 숨어 있는지 찾지 못했다. 예전에 읽다가 그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아침 전철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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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시작

단상 Vorstelltung 2013. 1. 4. 13:4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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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말 토요일, 직장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온 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학교 선배의 모친 부고 문자가 왔다. 새해 벽두에 새로운 출발을 하는 커플도 있고 세상을 떠나시는 분도 있다. 장례식장이 포천 관인면인데, 철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전방의 마을이었다.  왕복 3시간 반의 겨울 밤길에서 한탄강과 나란히 나가는 도로에서는 유령처럼 기습 안개가 출몰해 차안의 문상객들을 긴장시켰다.

 

지난 해에는 한국소설을 중심으로 읽고 국내 시와 외국 소설을 일부 읽었다. 문학책만 보다 보니 이론서에 대한 욕구도 마치 금단현상처럼 일어난다. <유리알 유희>를 읽고 나면 오랜만에 철학책이라도 한 권 읽어봐야 겠다. <유리알 유희>는 지금의 내 상황에서 절절히 와닿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20년 전에 봤더라면 전혀 알 수 없는 구절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고전도 그렇겠지만 철학책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집의 늙은 보일러가 날씨가 좀 풀리자 긴장도 풀리는지 시원찮다. 일진일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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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단상 Vorstelltung 2012. 12. 31. 06: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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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퇴근하면서 전산부의 동갑내기 동료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혈압얘기가 나오자 나와 마찬가지로 이 동료도 고혈압이었다면서 매주 쉬지 않고 산에 올라 정상혈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내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냐고 했더니 당연하다고 했다. 나는 지난 가을 이후로 산에 갈 엄두도 못내고 있는 처지였다. 어제, 일요일 오후 가족과 점심을 먹고 운길산에 가볼까  했는데 밥을 먹고 나니 주저됐다. 그냥 집에 있으면 퍼질게 분명해서 마음을 다시 고쳐 등산화 외에 별다른 장비 없이 화창하게 눈덮인 겨울산에 올랐다. 2시 30분에 출발한 터라 오르면서도 그냥 산자락 주변만 산책할지 산을 오른다 해도 어디까지 가야할지 마음을 잡지 못했는데, 햇살은 눈부셔도 추위는 곳곳에서 맹위를 떨쳤다. 15cm 정도의 눈이 쌓인 산에는 평소 주말과 다름없이 등산객들로 분주했다. 시간이 아무래도 오후 늦은 터라 올라가는 사람 보다는 내려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올라가며 유심히 내려오는 측의 등산화를 살펴 보니 대부분 아이젠을 달고 있었다. 어느덧 1시간 반 정도를 올라 약수터까지  가서 물을 마신 후 계속 산을 타고 운길산으로 갈지 돌아갈지 판단해야 했다. 오르는 길은 어떻게 간다고 해도 운길산에서 북한강변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아무래도 험해서 아이젠이 없으면 위험할 수 있고, 더군다나 시간도 벌써 4시에 가까워서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좀더 빨리 올랐으면 분명 운길산까지 갔을 테지만, 아무래도 겨울산에서는, 그것도 혼자 가는 길이라면 최소한의 장비는 갖춰야 한다는 점을 올라온 산길을 그대로 내려가면서 절감했다. 이렇게 동일한 산길을 올라갔다 내려가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올라갈 때는 힘이 들어 주변을 볼 만한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 관성이 있는데, 내려올 때 보는 동일한 주변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저 멀리 도봉산과 불암산, 수락산 사이로 서울이 흐르고 테크노 파크가 뾰족산처럼 솟아 있는 것도 보인다. 눈 덮인 하산길을 보면서 심신을 괴롭히고 긴장시키는 일상업무의 과중도 한층 가벼워짐을 느낀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몸의 체험에서 벗어난 인식이 과도한 이성주의로 흐름고 있음을 비판한다. 인식은 체험과 뒤섞일 때 생명있는 인식이 된다. 몸을 움직이면서 어떤 멋진 생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명상과 더불어 산행은 나이가 들 수록 가까이 하면 해로울 게 없는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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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의 추억

책들 Bücher 2012. 12. 27. 23:2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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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였다. <장발장>으로 축약된 형태로 익숙해 있던 이 원작은 프랑스 혁명의 주변사를 다양한 인물의 그물망 속에서 위고의 박력있고 흡입력있는  필체로 전달하던 묵직한 분량의 대작으로 기억한다(실제로 바리케이트 장면과 같은 서술은 위고가 직접 참여한 혁명의 현장을 옮겨온 것이다).  원작의 주요 흐름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깊은 인상을 주는 에피소드도 상당히 다양해 이 소설의 에피소드 조각 조각들을 따로 떼내어 단편영화나 연극의 소재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으며, 나도 몇 년 후 이 작품의 에피소드 하나를 희곡으로 옮겨 보는 시도를 했었다. 지하감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서는 사회고발을, 초창기 나폴레옹의 연속 승전의 비결을 능란한 포신술에 두는 식견을 통해서는  군사전략가의 통찰을 보여주는 등, 빅토르 위고는 계몽시대의 작가답게 다방면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총동원시킨다. 이런 지식들은 언뜻 보면 군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방대한 고전의 유기적 구조와 구성에 기여를 하는 빛나는 부품으로 작동하고, 그 자체로서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다. 위대한 시대가 낳은 위대한 소설이다. 뮤지컬로 인기를 끌던 레미제라블이 대작 영화로 개봉되어 원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박근혜 자서전 따위를 읽는 장년층 보다는 이런 원작을 읽는 청춘들에게서 시대의 희망이 보인다고 한다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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