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피의 선택』

영화 Film 2012. 3. 26. 09:0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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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EBS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봤다. 내심 영화는 어떨까 궁금해 하기는 했어도 애써 찾아서 볼 마음은 없었는데, 아무튼 책으로 흥미롭게 본 작품을 영화로 보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이 영화로 상까지 받았다는 소피 역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역시 명배우 답다. 네이선에게 말하지 못한 과거의 진실을 소피가 스팅고에게 망설이며 털어놓는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네이선 역을 맡은 배우의 경우, 광기가 좀 약하다고 보여지며, 스팅고의 역도 원작에 비해 다소 점잖은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원작에 바탕한 영화는 원작을 부분 인용을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겠지만, 소피와 네이선이 도서관에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네이선이 소피를 냉대한 도서관 사서를 그야말로 광기스럽게 몰아치는 원작을 영화는 살리지 않았다. 소설의 주요 줄거리를 숨가쁘게 옮겨다놓은 듯한, 부분 재현에 머문 영화같다. 영화를 보니 이 소설을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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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에 이어지는 전쟁 이후 세대로 80년대 초반 조용한 공감을 일으켰다는 임철우의 소설집 『아버지의 땅』을 읽었다. 11개의 단편 중 4개의 작품은 한국전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전쟁문학이면서도 서정성이 짙다.
 
<곡두 운동회> : 좌우의 광기어린 대립을 우화화 한 작품. 이런 광기는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에서 소설의 제목처럼 소피에게 두 남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명령한 아우슈비치의 미치광이 장교의 광란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새벽> :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대한 또 하나의 우화.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의 공간을 마음대로 침범하던 낯선 자들의 무례한 횡포가 위층에서 일어난다.
 
<아버지의 땅> : 아버지가 전쟁중 월북한 54년 생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짙은 작품이다. 금강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은 한국전쟁의 허리 봉합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대남에 있던 공산 잔류의 월북을 위한 주요한 루트였다. 강원도 산간에 있는 한 마을은 이 산맥의 줄기가 급경사를 이루는 낭떠러지로 험난한 지형을 이루는데, 이런 지형탓에 마을주민은 빨치산과 국군 양 진영으로부터 길지기로 동원된다. 기동훈련을 하던 두 병사가 참호를 파다가 발견한 피피선에 묶인 유골은 월북을 하던 빨치산인지 이 동네의 주민인지 알 수 없다. 마을 어른의 북어와 소주로 제를 받은 이 유골은 작가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유골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사평역> :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매우 아름답게 연출할 구석이 있는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각색해 장편으로도 충분히 연장할 소재를 갖추고 있다. 톱밥 난로의 온기에 모여 앉아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2시간이나 연착되는 완행열차를 기다리면서 삶의 애환을 찢어진 북어 쪼가리를 나누며 털어 놓는다.

<뒤안에는 바람 소리> : 인민군 점령 시기 빨갱이 앞잡이로 고향 마을을 휩쓸던 마을 친구들은 상황이 역전되자 산으로 피신하고, 마을 후배 을석을 통해 식량을 지원 받으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을석의 어미는 이미 을석이 밤마다 어디에 다녀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탈출하기 전날 밤, 어미가 잠들어 있는 을석을 놔두고 지서에 다녀왔을 때, 사실 을석은 자고 있지 않았다. 흰 옷을 입고 광풍으로 몰아치는 뒤안의 바람은 출애굽을 앞둔 유대민족의 집에 불어 닥치는 죽음의 광풍처럼 피를 갈구 한다. 결국 문앞에 피를 묻혀 놓아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듯이, 어미는 서로 간 것이다. 

<어둠> : 임신중 교통사고로 소아마비 아이를 치여 숨지게 한 부부의 이야기. 여인은 속죄를 하듯 사고장소의 공원으로 나가 무너진 삶을 한탄하는 낯선 사내에게 아이를 갈망한다.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에서 미친 여자가 분만한 아이와 같이.

<잃어버린 집> : 건장한 남편과 어여쁜 아내, 그리고 딸. 이렇게 세 명의 핵가족이 임철우의 이 단편집에서 전적으로 나오는 가족 형태이다.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물론 이 가족에게도 불운이 닥친다. 해갈이를 하던 집의 감나무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아이가 집을 떠난 이후로 매해 진홍빛 감을 깊어가는 가을에 주렁주렁 늘어 놓으며 익은 감을 낙하시킨다. 삶의 아픔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는가.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 무등산으로 도주한 좌빨 무리에게 소개된 산자락의 한 초가에서 불빛이 보인다.  소개령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미는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인데, 이 어미의 뒤를 쫏아 미친 여자와 군대가 따라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어미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무등산으로 도주한 아들이 돌아온 줄만 안다. 호롱불빛이 세어 나오는 집을 보고 마치 불나방처럼 달려든 아들은 또 하나의 생명이 잉태되는 집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개도둑> : 불운한 가족사의 애환을 품에 안고 큰 아버지 댁에서 자란 주인공은 역사에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묘지가 장마로 범란한 강발에 휩쓸려 가버렸다는 전갈을 받는다.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해 못견뎌하던 어머니는 강원도 탄광 어느 대포집으로 떠나 버렸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주인공에게 이 비극의 운명은 전쟁의 참화와 다르지 않다. 불이 일어나는 개의 눈빛에서 광기어린 아버지의 눈빛을 읽은 주인공은 개를 안고 뛴다. 강에 흩어져 흘러가 버리는 아버지의 잔골을 수습하는 것이다. 

<그물> :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한파로 무역회사에서 퇴출을 당한 미스터 김은 25층의 빌딩에서 벗어나며 마치 그물에서 자신이 빠져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인에겐 고분고분하면서도, 과자까지 상납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세든 사람에겐 사납게 짖어대기만 하는 개 한 마리도 어쩌지 못하는 소시민의 운명을 발견한다.

<수박촌 사람들> : 신흥 부유 주택단지인 행복동에 사는 남자들은 씨없는 수박이란 소문의 진상에는, 마을 통과하는 시내버스가 동네 이미지를 실추시킨다는 근거로 항거를 나온 이 동네 아줌마들의 힘이 있었다. 

출판이력 :  1984년 초판(문학과 지성사), 1994 15쇄, 1996 재판, 2007 13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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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 극복가능한 질병의 하나

문학 Literatur 2011. 6. 1. 14: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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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연찮게 들은 음악(브람스의 '알토 랩소디')으로 살기 위한 결단을 내린 후, 입원치료를 받고 결국 우울증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온 스타이런은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썼으며(처음 발표는 1989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정서장애 심포지엄 강연, 그리고 Vanity Fair라는 잡지에 이 강연문을 기재), 희미하게나마 그 극복에 대한 소망을 피력한다. 세찬 비를 맞고 길바닥에 떨어진 목련처럼, 근래 벌어지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자살 러쉬는 잔혹한 상처에 따라 급습한 우울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스타이런의 유년 시절 경험으로는 불충한 애도 Incomplete Mourning) 우울증이 몰고간 극단의 처방에 자신을 던진 결과일 수도 있다. 의약학 지식에 관해 전문가 수준에 육박하는 독서를 한 저자는 우울증 대처를 위해 상담치료 보다는 약물치료를 더 중시하고(수면제로 사촌지간인 할시온 보다는 달먼으로), 필요하면 입원하는 것도 권장한다. 결국 우울증도 암과 마찬가지로 사투를 벌여야 할 치명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우울증이 재발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고통에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이 다시 발병해도 제법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는데, 이미 우울증이라는 도깨비를 겪어본 경험으로 심리적인 조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초로 우울증의 발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병이 ㅣ 지나가야 할 모든 과정을 전부 다 거쳐야만 낫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깝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현실적인 절망 상태에서 과장된 병마와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해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가족,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에게 생명의 가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런 헌신은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보이는 어둠』,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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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관한 고백

문학 Literatur 2011. 5. 30. 23: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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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읽은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이후, 이 작가의 작품이 끌렸다. 일단 잡힌 것이 『보이는 어둠』. 갓 노년에 이른 작가가 우울증에 걸려 정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의 과정을, 아마도 정상적인 정신의 상태일 때 기술한 에세이로 보인다. 잘 모르던 작가였는데, 그러한 걸작을 남긴 작가가 이런 병에, 그리고 그 자신이 겪어서 보기에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 중병에 빠져든 것이 『소피의 선택』에 흐르던 유쾌하면서도 슬픈, 격정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장면들과 뒤섞이면서 서글퍼진다. 

"나를 휩쓸고 지나가 결국 12월에 입원하게 만들었던 폭풍우는, 6월쯤에는 포도주 잔 정도의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구름-표면적인 위기-은 내가 사십 년 동안이나 남용해왔던 술과 관계가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져나온 논문과 책에서 볼 수 있듯, 전설적일 만큼 치명적으로 술에 의존했던 수많은 미국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환상과 몽롱한 행복감으로 안내하고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마술적인 유도물로 술을 애용했다. 진정제나 승화의 도구로 술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거나 ㅣ 변명할 마음은 없다. 술은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는 단 한 줄의 글도 쓴 적이 없었지만 나는 글을 쓰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과 더불어 종종 술을 이용했다. 술은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는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술은 나의 오랜 지적 동반자였다. 게다가 날마다 봉사를 요구했던 절친한 친구로서 내 영혼 깊은 토굴 속 어딘가에 오랜 세월 동안 감춰두었던 불안과 싹트는 공포를 진정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내 시련은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출현했다. 나는 배신당했다. 그 시련은 어느 날 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다가왔다. 더이상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마치 내몸이 마음과 더불어 궐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날마다 술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졌던 내 몸이 갑자기 술을 거부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더더욱 술이 필요한 그 순간에 술이 내게서 등을 돌릴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많은 술꾼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거부현상을 경험한다고 했다...하여튼 술을 마ㅣ시기만 하면 , 심지어 한 모금의 포도주조차, 구토를 일으켰으며 절망적이고도 불쾌한 멍한 기분과 가라앉는 느낌과 끝내는 눈에 보일 정도의 혐오감이 나를 휘감었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친구가 서서히, 마지못해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늘 그렇듯이 한순간에 내 곁에서 떠나버렸다."

윌리엄 스타이런 William Styron,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 (1992) 임희옥 역(문학동네, 2008, 1판 7쇄), 49-51면.

그래도 술은 약에 비하면 건강한 정신에겐 강장제이지만,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태는 퇴락이다. 스타이런은 너무 마셨던게 아닐까. 

"이제서야 확신하는 바이지만, 술은 우리가 서로 작별을 고할 때 나에게 심술궂은 속임수를 썼다.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그럼에도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은 한 번도 말 그대로의 우울증을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안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했다.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패막이 노릇을 했던 동맹군인 술이 갑자기 증발해 버리자, 악의 사신이 무리지어 잠재의식으로 몰려오는 것을 막아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상동,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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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요일

단상 Vorstelltung 2011. 5. 22. 22: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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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도서관에서 대출한지 2주가 되서야 다 읽었다. 1,2권 합해서 800면 정도인데, 관심유발에 비해 속도감이 더딘 독서였다. 뭐라고 할까. 단 2주 동안이지만 작중 주인공들에게 이런 정도로 애정이 깃든 독서도 없을것 같다. 스팅고는 화자이고 소피는 주인공이며 네이선은 추진체라고 할까. 분홍궁전의 수위역할을 한 모리스 핑크는 빛나는 조연이다. 말미의 역자 해설에서 네이선에 대해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는 역자의 해설이 못맏땅스럽다. 결과로 가서 알게된, 애시당초  미친놈이었으니 별다로 얘기할게 없겠거니 할 정도로, 수용할 수 없는 기벽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분명히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좀더 합당한 위상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 의도했던 대로, 이웃의 주말 농장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지 않고 온전하고 무료한 정신을 유지했다면 정말 『소피의 선택』에 관해, 맥그로힐에서 썩어가던 스팅고가 말한 매튜 아놀드의 충고대로, 활자화되는 언어에 대한 정확성과 진실성을 가해서 서평을 쓰고 싶었다. 그만큼 스팅고의, 스타이런의 화법에 녹아든 2주 였던것 같다. 역자의 해설이 불충분한데, 이 소설의 가치에 대해서 알려면 스타이런에 대해 좀 더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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