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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년 가까이 작업해온 헤겔의 '정신현상학' 강독 자료를 저작권 문제 소지로 모두 비공개 처리했습니다. 판본은 100년도 넘은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봤고, 상업적 목적이 없는 공유의 의도였으나, 향후 제기될 수 있는 저작권 침해에 관한 블로그 운영진의 권고를 보고, 비공개 하기로 했습니다. 자료가 필요하신 분에게는 상업적 목적이 없는 비공개 원칙 하에 자료를 메일로 공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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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법철학 연구(2003.02.23-03.25 )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서론'의 1장은 제목 그대로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적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적 인식이란 다른 말로 도덕에 대한 상식적 차원의 생각, 곧 선의지(guter Wille)를 드러내는 작업를 말한다. 이 지상 뿐만 아니라 지상 밖에서도 제한없이 선한 것은 오직 선의지뿐(BA 1)이라며 첫페이지의 포문을 여는 칸트는 1장에서 이 선의지를 다른 개념들, 예를 들어 경향성(Neigung)이나 유용성(Nutzen), 기질(Anlage), 본능(Instinkt),욕구(Begehrung), 필요성(Bedürfnis),즐거움(Genuß), 애착(Selbstlieb), 결과에 대한 타산(besorglichen Folgen, BA 18) 등과의 비교 속에서 선명하게 구분지어가며 논의해 간다. 선의지와 구별되는 이런 개념들은 경향성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대표함으로써 선의지와 대립각을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런 행위, 즉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판단되는 행위(의무로부터 해야한다고 인식된 행위)를 하려는 의지에서 성립할 뿐이지, 그 외의 요인들로부터 성립되지 않으며, 바로 이 요인들은 경향성이란 이름 아래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향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은 동기(Bestimmungsgrund)이다. 도덕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곧 경향성이 행위의 동기로 작용(Wirkung)하는 것으로부터 선의지를 명확히 구별지어 내려는 것이 바로 1장의 목적이다.
그런데 선의지를 여타의 경향성과 구분짓는 것에 그친다면, 이는 아직도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적 인식에 머물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선의지라는 개념의 명료화를 위해서 칸트는 의무(Pflicht) 개념을 도입함으로써(BA 8) 자칫 공허한 논의로 흐를 수 있는 도덕론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논의로 이끌어 간다. 그러면 칸트가 의무 개념을 사용해 특정 행위에 대한 도덕 가치 유무를 따져가는 논의를 정리해 보자.
일단 칸트는 의무에 위배되는 행위는 제쳐두고 의무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행위만을 고려한다. 이렇게 의무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의무에 부합하는 행위(pflichtmaßige Handlungen)이다. 이 상태의 행위에 대해서는 아직 도덕적 가치 유무를 판정할 수 없다. 칸트가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는 오직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Handlungen aus Pflict)인데, 단지 의무와 수반 내지 부합한다고 해서 도덕적 내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엄격히 구별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구체적 사례로 제시하는 논의를 정리해서 이러한 구별을 살펴보면, 의무와 관련된 행위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A.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
B. 의무에 부합하지만 경향성과 관련된 행위(pflichtmaßige Handlungen aber mit Neigung)
B의 경우에는 다시 3가지로 구분된다.
a.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지 않는 행위(Handlungen aus unmittelbarer Neigung)
b.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 행위
c. 사익에 따른 행위(Handlungen in eigennütziger Absicht)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는 오직 이와 구별되는 행위와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명백히 드러내므로 우선 B의 경우에 대한 논의를 살펴 보면, a의 경우에 대해 칸트는 일단 무시한다. 그러나 그가 b를 a와 구별하기 위해서 a의 경우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므로 a는 따로 구분지어 논의될 만한 행위 유형이다. 그런데 칸트가 a의 사례로 제시하는 상인의 일률적 가격 책정 행위(BA 9)는 c에 해당하는 행위 유형이지만 여기서는 a와 c를 구별한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는 a에 해당하는 행위유형은 c와 같은 행위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선을 베푸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BA 11), 이 사람이 이런 행위로 어떤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사익에 따른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 행위는 명예와 짝을 이룬다고 칸트는 말한다. 따라서 이런 행위 유형은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 행위가 아니면서 또한 사익과 관련된 행위가 아니므로 칸트가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따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칸트의 해당과제는 이런 구분을 목적에 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구분은 오직 의무로부터의 나온 행위만을 걸러내기 위한 부수적 작업일 뿐이다.
b의 경우로 칸트가 제시하는 사례는 자기 생명 보존이다(BA 10).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만인에 적용되는 의무이며 사람은 이것에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는다. 즉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경향성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행위에는 도덕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그저 경향성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명령될 수 없는 행위를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로 보지 않는다(BA 13). 명령이란 인간이 경향성에 따라 행위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런 지시에 따라 행위할 성향이나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시가 자신에게 하나의 의무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경향성을 극복해서 이 지시에 따라 행위할 때, 이 때에야 비로서 도덕적 가치가 발생한다. 이런 설명은 자선 행위(BA11)와 행복지향 행위(BA12)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두가지 행위 모두를 칸트는 자기 생명 유지와 마찬가지로 의무로 보지만, 그 행위 자체에는 아직 도덕적 가치가 없고, 다만 그런 행위를 의무이기 때문에 실행할 때 도덕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이상의 의무와 관련된 행위로부터 걸러내지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행위를 결심하게 하는 의지의 원칙에 따른 행위이다. 이 행위는 준칙의지로서 형식적, 선험적으로 결정된 원칙을 따르려고 하는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결정요인은 객관적으로는 법칙 그 자체이며 주관적으로는 이 법칙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마음에 내재된 준칙(Maxime)이다(BA 14,15). 이 주관은 비단 인간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 모두에게 해당하며,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행위에 대한 의지의 결정요인으로는 이 행위로부터 기대되는 작용이 아니라 법칙에 대한 표상만이 있을 뿐이다(BA 16). 여기서 주체의 의지를 결정하는 법칙은 '주관적 행위의 보편화 가능성'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서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법칙으로서 성립한다. 이 검증 과정은 곧 특정행위에 대한 나 자신의 준칙이 나 뿐만 아니라 이성적 존재 일반에도 확대가능한가를 묻는 것이다(BA 17). 이에 대해 칸트가 드는 사례는 어려운 여건하에서의 약속이다. 어려운 형편을 이유로 거짓 약속을 하는 나의 준칙이 어떤 기대된 목적, 그러니까 선의의 목적이나 결과적 유용성에 부응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준칙은 보편화될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준칙이 보편화 가능하다면 상호 부담을 지우는 약속 자체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BA 18~20). 그렇다고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준칙의 부당함은 이것이 그러한 불이익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보편적으로 입법시키는데 부적절하므로 내버려야 하는 것이다(BA20).
이제 칸트는 그러한 준칙, 그러니까 우리의 평범한 이성이 제기할 수 있는 원칙을 보편적 형식으로 추상화해서 이것의 타당성을 묻는 방식, 곧 철학적 이성 인식인 도덕 형이상학을 요구한다. 이것은 단지 이론적인 사유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경향성에 따른 준칙과의 비교 속에서 평범한 이성이 취할 원칙의 근거와 방법을 위한 실천철학에의 요구이다(BA 23,24).
Torn Between Two Lovers
Song by Mary MacGregor(1976), written by Peter Yarrow and Phillip Jarrell
There are times when a woman has to say what's on her mind
Even though she knows how much it's gonna hurt
Before I say another word, let me tell you I love you
Let me hold you close, and say these words as gently as I can
There's been another man that I've needed, and I've loved
But that doesn't mean I love you less
And he knows he can't possess me, and he knows he never will
There's just this empty place inside of me that only he can fill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both of you is breaking all the rules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you both is breaking all the rules
You mustn't think you failed me just because there's someone else
You were the first real love I ever had
And all the things I ever said, I swear they still are true
For no one else can have the part of me I gave to you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both of you is breaking all the rules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you both is breaking all the rules
I couldn't really blame you if you turned and walked away
But with everything I feel inside, I'm asking you to stay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both of you is breaking all the rules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you both is breaking all the rules
Torn between two lovers, feeling like a fool
Loving both of you is breaking all the rules
선관위 사태가 심상치 않다. 그 전조는 일베 상징물이 들어간 선관위의 홍보 그림이었다. 이것은 선관위 내에서 조직적인 태업의 의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정황이다. 부족한 투표용지를 종이가방에 들고가고 투표마감 6시 이후에, 심지어 밤 10시에 온 유권자에게까지 투표를 허용했다는 전언은 선거관리의 또 다른 부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쟁점은 선거관리의 부실이지 부정선거가 아니며, 이것은 시위로 풀 문제가 아니라 국정조사와 특검, 집단소송을 통한 헌법소원 등의 법적 절차로 대응할 사안이다. 대한민국의 헌정사에서 부정선거는 이승만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하향식으로 행사했던 경우 뿐이었고, 주체가 불분명한 산발적인 관리부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참에 선관위의 전반적 운영실태도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선거관리의 부실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이득될 것이 없는 정치적 불안을 증폭할 뿐더러 국민주권의 최후 행사를 침해하는 범죄이므로 이를 철저히 규명하고 다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선관위를 재구성하는 논의과정도 필요하다.
오염된 선거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이런 순수한 분노는 초반부터 오염의 전조가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염이 짙어진다. 시위를 이어갈 동력과 명분이 있는가? 부실 선관위에 대한 조사와 개혁을 감시하는 여론 형성 이상의 의미는 없다. 선거의 부실은 비판할 수 있으나 선거를 부정하는 것은 대의정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정치실험이다. 하지만 그 실험은 잠실의 실내체육관 주변에서만 가능한 초여름의 반짝 잔치에 불과하다. 그런 실험정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을 더 받지 못하는데서 올 수 있는 또다른 분노에 휩싸이지 않아야 한다.
표를 도둑맞았다는 확신은 주권이 하나의 사유재산, 부로 각인된 것으로, 이것이 아주 틀리거나 부당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선거가 방해된 특정 유권자에 대한 국가 배상의 판례는 그런 인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권자 모두, 또는 상당수가 표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은 과대망상이고 여론에 대한 왜곡이다. 여론조사가 정확하다면, 이런 주기적인 여론조사와 선거결과는 어긋나지 않고 비교적 근접하게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여론을 선거 막판을 두고 흔들려는 꼼수 못지 않게, 아니 이 보다 더 추잡한 것은 선거 이후에 그 결과를 흔드는 것이다.
여론이 하나의 실시간 바로미터로 작동하고 따라서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 선거와 다를 바 없는 감시와 평가로 현실 정치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진정한 국민주권의 발현이라면, 저 시위의 출발은 바로 그런 목적지를 향한 또 다른 경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목적지를 상실한 경로는 뒤엉키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2006년 헤겔 정신현상학 200주년 기념 논문집에서 미하엘 포스터는 헤겔의 지적 주제와 동기는 칸트나 피히테, 셸링이 아니라 오히려 헤르더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성 장의 '정신의 왕국'이 헤르더에게서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밝힌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물론 헤겔은 스스로 밝힌 바 처럼 칸트를 경외하면서도 날선 비판을 통해 그의 비판적 계승자로 볼 수 이지만, 내실은 방법적으로 칸트와 완전히 갈라지는 헤르더를 더 추종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신의 실현이나 그 유명한 인륜 공동체, 민족(Volk)의 개념은 헤르더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이성에 대한 칸트의 근본개념이 초역사적인 가설에 의지해 있는 반면에 헤르더는 이성의 역사적 근원을 물었다. 헤겔은 후자에 더 끌린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칸트의 가설은 회의주의를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아그리파의 퓌론주의 논형4). 워낙에 칸트의 영향력은 간과할 수 없지만 헤겔의 이성주의적 방법론에서 헤르더는 분명 무시못할 전거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헤겔 사상의 맹아를 미발표 수기들인 예나 단편에서 찾는 것과 같은 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영향사의 맥락을 짚는 것이고, 이로부터 헤곌이 초극하려한 것이 무엇잇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