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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때문이든 다른 여러가지 핑계로든 지난 연말 이후 어떤 식의 글도 치지 못했다. 일기가 됐든 서평이 됐든 인상이 됐든 자주 기록을 남기는다는 것은 뒷날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지만, 쓴다는 것은 다른 의미도 있다. 토요일인 어제 저녁 공영방송에서 흥미로운 강연을 봤다. 실리콘밸리의 투자 귀재로 불리는 피터 틸이라는 기업가의 강연인데, 아무런 대본없이 저렇게 유창하게 혁신전인 경영철학을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쓰기이다. 아무래도 밑에 깔리는 한글 자막의 영향이겠지만, 소리와 글을 동시에 접하는 것은 의미를 더욱 강고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One to N 이 아니라 Zero to One은 남들과 똑같이 모방하지 말고 남들과 다르게 독점(창조)하라는 캐치프레이저인데 창조경제를 표방한 이 정권이 활용하기에 좋은 것이다. 하지만 관료, 정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적이다. 왜? 권력은 권력을 목적으로 한다는 오웰의 지적을 따른다면 경제를 살리자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수단인 셈이니까.

 

몇 시간 후 EBS에서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웨스턴 무비의 고전 배우 당사자가 이 장르를 활용해 자신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영화로 보인다. 이런 영화야말로 One to N이 아니라 One to Two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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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병

문학 Literatur 2011. 6. 16. 18:2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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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한반도가 세계의 하수구라고 했다. 세계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의 찌꺼기들이 집약된 곳이라는 말이다. 십대를 상품화시켜 화려한 눈요기로 세계의 무대에 진출시키는 열광에 일말의 부끄러움은 없다.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답게 문화를 수출한다고 자부한다. 열정 보다는 열병의 수출이다.  

어제는 휴가를 내서 집에서 쉬다가 도서관에 갔다. 편안한 소파에 앉아 오웰의 『1984년』앞부분을 다시 보았다. 역시 이 책의 서두 부분은 암울하다. 마치 숙취를 안고 기능이 마비된 미래의 도시에 떨어진 느낌을 들게 한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1949)을 빌려 나왔다. 유진 오닐의 『밤의로의 긴 여로』이후 희곡의 매력에 다시 빠져들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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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설

문학 Literatur 2011. 1. 10. 17: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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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해가 기울어져 가는 시간에 집을 나와 칼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다 마을 도서관에 들렀다. 11월 경에 반 정도 읽다간 반납했던 김수영의 산문집을 들추니, 내가 맞춰 놓은 페이지에 그대로 책에 딸린 줄헝겊의 갈피가 꽂혀 있었다. 참 책들 안본다.

64년에 김수영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을 가리켜 유동적이고 시흥(詩興)적이라 인상과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고 했는데, <닥터 지바고>를 거의 다 보는 시점에서 매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시와 소설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런데 이 두가지를 다 했다니. 시인의 소설은 소설처럼 읽기 보다는 시처럼 읽어나가야 하는데, 소설의 속도감은 또한 얼마나 빠른가. 뒷부분에 실린 지바고의 대서사시는 시처럼 읽어야 겠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김수영의 소개글을 읽다 보니, <닥터 지바고>는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소설이 아니었다.  중간에 몇편의 중단편이 있었다.  읽은 책의 책날개에 이 책이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쓰여 있던 문구를 유일한 소설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닥터 지바고>는 58년도에 소련에서 등재는 물론  출판이 금지되자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에서 이 책의 해외출판을 저지하려 했던 점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영국 정보부의 출판저지 시도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파스테르나크는 혁명이 스탈린을 정점으로 권력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 오히려 해방을 가져다 줬다는 관점을 <닥터 지바고>의 에필로그에 드러냈다. 정치범으로 몰려 유형을 받던 지바고의 옛친구들은 독일과의 전쟁 때문에 유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유형보다는 오히려 전쟁이 이들에게 더 인간적이었다. 이런 시각은, 아무리 스탈린 사후라고 하지만, 그 후광을 입은 관료들에게 밉살받을 만한 위험한 시각이다. 조지 오웰도 소련의 눈치를 보는 영국의 외교정책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고 보면 이 두 작가는 영혼을 질식시키는 절대주의 체제에 저항한 점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거대괴물을 공격해 들어간 비판정신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그 괴물은 당대의 소비에뜨 권력이었고, 오웰에게는 미래의 전지적 권력이었다.    

<닥터 지바고>는 시대사의 대격변기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개인의 삶을 보여준 점에서 게오르규의 <25시>를 연상시키지만, 부르조아 계급출신으로 인텔리겐차이자 의사이며 시인인 지바고는 결코 요한 모리츠만큼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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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

책들 Bücher 2010. 10. 8. 14:1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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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갔다가 시가전을 겪고 난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한 오웰은 목에 부상을 입고 후방에서 치료를 받다가 공산당 주도의 집권 정부에 의해 통일노동자당이 불법화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귀국을 결심한다. 그러나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서 복무했으므로 비밀경찰의 검거리스트에 포함되었다. 그를 검거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머물러 있던 바르셀로나의 컨티넬탈 호텔에 경찰 6명이 급습하지만, 2시간 동안 경찰들은 정작 오웰의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수색하지 않고 그 밖의 곳곳을, 바닥을 들추면서까지 수색했다. 여성이 누워있는 침대는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존중감이 이 경찰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침대에 숨겨둔 여권을 빼앗기지 않아 오웰은 정쟁에 휩싸인 스페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체주의에 대해 평생 견제의식을 지녔던 오웰은 이런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가느다란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프랑코가 1936년도에 일으킨 반란은 1939년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고,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은 1975년까지 이어진다] 스페인 사람들 중에 현대 전체주의 국가가 요구하는 지독스러운 효율성과 일관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카탈로니아 찬가』, 285.

"이런 찬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상동, 294.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상동,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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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스페인에서 일어난 좌파 세력간의 분열은 해방 후 북조선에서 일어난 강권 통치체제의 성립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것은 20세기 전반부, 코멘테른의 지도를 받아  공산화로 치달은 전세계 절반의 국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거기엔 뚜렷한 차이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북조선에서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혼란과 갈등은 매우 짧은 시기에 정리됐다. 월남의 공산화는 중국을 비롯한 강력한 외세를 저지하고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편, 파시스트를 막다가 강압통치를 불러 오는 악순환에 대한 오웰의 예견은 예리하다.  

"평생 사회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혐의처럼 날조된 혐의들이 조금이라도 더 쌓이게 되면, 그 분열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유일한 희망은 정치적 논쟁을 철저한 논의가 가능할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보다 더 좌익인-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사람들 사이에는 정말로 큰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 일부와 동맹(인민전선)을 맺음으로써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반대자들은 이런 공작이 파시즘의 새로운 온상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여기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반(半)노예 상태로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고함 외에 아무런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면, 논의는 시작도 할 수 없 ㅣ 다...[이는] 진지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체스를 두다가 상대가 방화나 중혼죄를 지었다고 갑자기 악을 써대는 것과 같다."

『카탈로니아 찬가』 230-231.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개인적 자유나 진실한 언론 보도는 군사적 효율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동, 232.

"어디든 전선 가까운 곳에만 가면 전반적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니 신기한 일이었다. 정당간의 악의에 찬 증오심은 모두, 혹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상동, 259.

"며칠 동안 후방의 신문에서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전사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이런 일은 용서하기가 힘들다. 나도 전투하는 부대에게 나쁜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이 관례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전투에 내보내 놓고는 등뒤에서 그들의 당을 불법화하고, 지도자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친구와 친척들을 투옥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상동,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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