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카드 정신현상학 영문대조 번역2 :

헤겔 Hegel 2021. 1. 30. 21: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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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e erscheint außerdem als die wahrhafteste; denn sie hat von dem Gegenstande noch nichts weggelassen, sondern ihn in seiner ganzen Vollständigkeit vor sich.

In addition, it appears as the most true; for it has not omitted anything from its object; rather, it has its object in its complete entirety before itself.

또한 그것은 참된 것으로 나타는데, 그것의 대상에 무엇인가를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으로 이 대상을 내어 놓는다. 

 

Diese Gewißheit aber gibt in der Tat sich selbst für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Wahrheit aus. Sie sagt von dem, was sie weiß, nur dies aus: es ist; und ihre Wahrheit enthält allein das Sein der Sache; das Bewußtsein seinerseits ist in dieser Gewißheit nur als reines Ich; oder Ich bin darin nur als reiner Dieser, und der Gegenstand ebenso nur als reines Dieses.

However, this certainty in fact yields the most abstract and the very poorest truth. It articulates what it knows as this: It is; and its truth merely contains the being of the item. For its part, consciousness only exists in this certainty as the pure I; or, within that certainty, the I exists merely as a pure this, and the object likewise exists merely as a pure this.

그러나 이 확실성은 실제로 그 자체로는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초라한 진리를 내어 준다.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관해 알려주는 것이란 그저 있다라는 것일 뿐이다. 즉 그것의 진리는 사태의 존재만을 포함한다. 의식은 그 자신으로서는 이러한 확실성에서 순수한 나 일뿐이다. 또는 거기서 나는 순수한 이것으로서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상은 순수한 이것으로서만 있다. 

 

 Ich, dieser, bin dieser Sache nicht darum gewiß, weil Ich als Bewußtsein hiebei mich entwickelte und mannigfaltig den Gedanken bewegte.

 I, as This, am certain of this item not because I, as consciousness, have thereby set myself into development and have variously set my thoughts into motion.

이러한 내가 이러한 사태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나는 의식로서의 나를 발전시켜서 다양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Auch nicht darum, weil die Sache, deren ich gewiß bin, nach einer Menge unterschiedener Beschaffenheiten eine reiche Beziehung an ihr selbst, oder ein vielfaches Verhalten zu andern wäre.

It is also the case that I am certain of this item not for the reason that the item of which I am certain would exist in terms of a rich relation of diverse states in itself, or because it would be related in multifarious ways to others.

또한 내가 확신하는 사태가 일단의 차별적인 속성들에 의해 그 자신과 하나의 충만한 관계에, 또는 다른 것들과의 다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Beides geht die Wahrheit der sinnlichen Gewißheit nichts an; weder Ich noch die Sache hat darin die Bedeutung einer mannigfaltigen Vermittlung; Ich nicht die Bedeutung eines mannigfaltigen Vorstellens oder Denkens, noch die Sache die Bedeutung mannigfaltiger Beschaffenheiten; sondern die Sache ist; und sie ist, nur weil sie ist; sie ist, dies ist dem sinnlichen Wissen das Wesentliche, und dieses reine Sein oder diese einfache Unmittelbarkeit macht ihre Wahrheit aus.

Both have nothing to do with the truth of sense-certainty; in that certainty, neither I nor the item mean “a manifold of mediation”; “I” does not mean “a manifold of diverse activities of representing and thinking,” nor does the item mean “a manifold of diverse states”; rather, the item is, and it is merely because it is. For sensecertainty this is what is essential, and this pure being, that is, this simple immediacy constitutes its truth. Likewise, as a relation, certainty is an immediate, pure relation.

이 둘은 감각적 확실성의 진리와 상관이 없다. 나도 사태도 그에 관해서 다중적인 매개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는 다중적인 표상이나 사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사태 또한 다중적인 속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태는 있는 것인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적인 지식에게 본질적인 것이고, 이것의 진리는 이러한 순수한 있음 또는 이러한 단순한 직접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benso ist die Gewißheit als Beziehung unmittelbare reine Beziehung; das Bewußtsein ist Ich, weiter nichts, ein reiner Dieser; der Einzelne weiß reines Dieses, oder das Einzelne.

Likewise, as a relation, certainty is an immediate, pure relation. Consciousness is I, nothing further, a pure this, and the individual knows a pure this, that is, he knows the individual.

마찬가지로 관계로서의 확실성은 직접적이며 순수한 관계이다. 의식은 나이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이것이다. 개별자는 순수한 이것 또는 개별자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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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비판

헤겔 Hegel 2010. 5. 24. 13: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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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규정하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유하는' 의식 일반이며, 그의 대상이 내면적인 본체와 외형을 띠고 있는 주체와의 직접적인 통일체라는 데 있다. 동일한 의식이 스스로 자기에게 반발한다는 것이 본원적으로 사유 그 자체의 요소를 이루고 있지만, 이 요소는 우선 애초에는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을 뿐 아직 다양한 존재가 운동을 전개하는 대상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복잡다단한 삶의 한복판에서는 개별 행동에 따르는 온갖 분규도 발생한다는 것이 욕망이나 노동으로 인해 빚어지는 대상적인 국면이다. 그런데 이렇게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마침내 사유의 순수한 운동 속에 드러나는 단순한 구별로 집약된다. 이제는 더 이상 특정한 사물, 특정한 생활에 매여 있는 의식,감정,욕망 등으로 나타나는 온갖 구별 ㅣ 이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구별, 또는 목적을 자기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 아니면 타자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라는 식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내 의식 자체에서 그때마다 솟구쳐나오는 사유 속에서의 구별만이 의미있는 것이 된다...그 어떤 자질구레한 일상적 조건에도 구속되지 않고 세상사에 휘말려서 음양으로 닥쳐오는 여하한 작용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상의 세계 속에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아집이라는 것도 이것이 제 마음에 드는 사소한 일에 매여서 예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일종의 자유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 4장 자기확신의 진리 2절 자기의식의 자유 :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중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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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속된  의식에서는 주인이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주인 쪽의 자립 자존하는 의식이 예속된 의식에서 객관적인 진리를 이루지만 아직도 이 진리는 예속된 의식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은 예속된 의식이야말로 스스로가 순수한 부정성을 지닌 독자존재라는 진리를 사무치게 깨운친다고 하겠으니,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관한 불안도 아니고 특정한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ㅣ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겉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도처에 생겨나는 이 순수한 운동, 즉 존립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유동화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인 절대적 부정성의 발로로서, 자기의식의 순수한 자립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노예의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순수한 독자적 요소도 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노예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자립성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식에 단지 막연한 심정상의 자괴감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노예노동 속에서 현실적으로 붕괴에 직면하게 한다. 이렇듯 노동을 수행하는 매순간마다 노예는 자기에게 가해진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뜻에서 사물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 비록 주인에 대한 공포가 지혜의 실마리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 채 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Durch die Arbeit kommt es aber zu sich selbst).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되는 셈인데, 어쨌든 노동에서 사물의 자립성이 유지되는 이상 노예는 사물에 대해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대상이 없이도 욕망은 가능하다는 것?],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 ㅣ 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란 대상의 형식을 다듬어가며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말하자면 이것이 특수한 부정?]. 왜냐하면 노동하는 노예에게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립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das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 자신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물의 형성은 [노예로서]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이 존재하는 모습을 띤다는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공포라고 하는 첫째가는 요소를 불식시키는 부정적인 작용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인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ㅣ맛서 있다. 말하자면 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독자적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사물의 형식은 외면에 자리잡게 마련이지만, 그러핟고 이것이 의식과 별개의 것은 아니며, 오직 형식만이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을 갖춘 진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einer Sinn)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봉사하는 의식이 이렇듯 반성적인 자기복귀를 이루는 데에는 공포와 봉사라는 두 요소와 함께 사물의 형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하며 더욱이 이들 요소가 노예생활 전반을 뒤덮고 있어야만 한다. 봉사와 복종의 기강이 잡히지 않고서는 공포는 형식적인 데 그칠 뿐, 현실생활에 의식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는다[법철학적 주제를 암시한다]. 또한 사물의 형성이 없이는 공포는 내면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의식이 이를 명확하게 의식할 리가 없다. 더욱이 최초의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게 된다면 의식은 다만 자기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에 나타난 의식의 부정성이 역시 자기마저도 부정하는 힘이었다고는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이 본질적인 자기실현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절대적인 공포를 실감하지 않은 채 다만 어쩌다 불안감에 젖어들 뿐이라면 자기를 부정하는 힘은 자기의 밖을 맴도는 데 그치며, 자기의 심혼하저도 뒤흔들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적인 의식이 안주해 있던 스스로의 지반이 여지없이 동요하는 데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딘가에 기댈 만한 언덕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존립을 지탱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는 것은 속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라는 것도 예속된 상태의 자유에 그칠 뿐이다. 사물의 순수한 형태가 그대로 자기의 본질로 화하지 않는 한, 개개 ㅣ 의 사물에 각인된 모습이 의식 전체를 통째로 감싸안는 절대적 개념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거슨 이러저러한 사물을 잔재주를 통하여 가공하는 손놀림에 그칠 뿐, 보편적인 자연력이나 대상 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 23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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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 그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에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노예로서는 그 어느 경우에도 사물을 지배하고 이를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모사된 자립성?주인의 대리?]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는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절적인 행위자이다. 그러나 노예의 의한 주인의 인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인이 상대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주인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하고[주인이 노예에게 가하는 지배의 작용을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사한는 것?], 또 노예가 그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역시 그의 상대인 주인 ㅣ 에 대해서도 행해야만 한다[이 구절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 전도가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조성되어 있는 상태는 일방적인, 부등한 인정의 관계이다." 

『정신현상학』, 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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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은 자주,자립적인 의식으로서, 단지 개념상으로만 그런 존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를 띤 자립적인 존재와 한데 묶여 있는 타자의 의식과 매개된 가운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다. 주인은 욕망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물성을 본질적으로 여기는 의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와 관계한다...우선 주인은 사물이라는 자립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여 노예와 관계한다. 노예는 바로 사물에 속박되어 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종속적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관계한다. 노예로서도 자기의식은 갖고 있으므로 사물에 부정적인 힘을 가하여 사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은 노예에 대하여 자립적인 존재이므로 노예는 부정의 힘을 가한다고 해도 사물을 아예 폐기해버릴 수는 없고 사물을 가공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하여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을  마 ㅣ 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물의 자립성으로 인하여 욕망의 의식에게 그러한 결과가 성취되지 못했던 참에 주인은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개재시킴으로써 사물의 비자립성을 미끼로 하여 사물을 고스란히 향유한다. 이때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은 노예에게 위임되고 노예는 이를 가공하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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