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불명 운동회

단상 Vorstelltung 2012. 9. 24. 15:05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마을 초등학교의 운동회가 지난 토요일에 있었다. 가보니 지역잔치라고 할 만큼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었다. 운동회라는 건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 가본 색다른 풍경이다. 9시 넘어 학교에 도착했을 때 유치원생을 포함해 초등 전교생이 운동장에 사열되어 있는 걸 보고 저런 건 도대체 변하지 않는구나 하면서 욕설이 나왔다. 길게 이어지는 내빈들의 인사말, 도대체 언제까지 아이들은 어른들을 위한 사병인가? 병영문화와 위계구조로 구획된 교육공무원들에게 아이들은 변함없는 먹잇감인 셈이다. 아무튼 시작은 실망스러웠지만 운동회 프로그램은 그나마 구태의연함을 벗어났다. 사실 그들이 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부분일테니까. 예를 들어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춘 청백 댄스 대항전은 운동장의 흙먼지까지 자욱히 일으킬 정도였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잘도 흔들어 대는 광경은 미디어가 점령한 거실문화의 일면이기도 하다.  감기에 걸려 이리저리 몸이 안좋은 나날이었다.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병든 하영근이 우렁차게 떡을 목구멍에 쳐 넣는 두 수재 청년에게 세계를 정복하려해도 일단 건강하고 볼 일이이라고 하듯이, 무슨 일을 하려해도 건강하고 볼 일이다.   

 

                                                       밀, <정치경제학> 중 '정지상태에 관하여'(녹색평론 7-8월)

반응형
반응형
"정치에 있어서도 질서 혹은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과 진보 혹은 개혁을 지향하는 정당 둘 다가 정치적 생활의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필수적 요인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둘 중의 하나가 그 정신적 포용력을 확대하여 질서와 진보를 동등하게 표방하는 정당이 되어서 보존하기에 적합한 것과 폐지해야 할 것을 구분해서 인식하게 될 때 까지 그러하다. 이러한 각각의 사고 유형이 효용을 가지는 이유는 상대방이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출되지만, 각자로 하여금 이성과 정신적 건강의 범주 내에 머물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주로 상대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대 귀족주의, 재산 대 평등, 협동 대 경쟁, 사치 대 절약, 사회성 대 개별성, 자유 대 통제,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다른 대립에 대한 의견이 동등한 자유를 가지고 표현되고, 동등한 재능과 정력을 가지고 옹호되고 이행되지 않는다면, 양쪽 모두가 자기  몫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된다...진리는 인생의 중요한 실천적 관심사에 있어서 반대편 입장을 화해시키고 접목시키는 문제여서, 엄밀히 가까울 만큼의 조정을 해낼 수 있는 광활하고 무사 공평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그 조정은 적대적인 가치하에서 투쟁하는 전사들 사이에서의 투박한 대립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만일 방금 열걸한 풀리자 않은 중요한 문제ㅣ 들 중의 어느 것에 대한 찬반 의견 가운데에서 다른 의견에 비해 더욱더 관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무되고 격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의견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장소에서의 소수 의견이다."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 66-67면.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밀이 말한 것처럼 상호침투하면서 균형을 이룬 역사과정을 거쳤지만, 한국에서 보수는 안정보다는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진보의 파트너가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란 점이 다르다.
반응형
반응형
"전쟁터에 적들이 사라지고 나면, 곧 스승과 제자들은 잠자리에 들게 된다...언어와 문학은 모두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그 속에서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인생에 대해 일반적으로 관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관찰은 모든 사람이 알고, 모든 사람들이 반복하거나 말없이 경청하고, 당연한 진리로서 수용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서 그것도 대체로 쓰라린 종류의 경험을 통해서 그 관찰이 현실로 될 때 비로서 그 의미를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직접 느끼게 전에는 그 전체적 의미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진리가 많다. 만일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의를 익히 들었더라면, 이러한 진리가 뜻하는 바를 더 많이 이해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을 때 그것에 대한 생각을 중지하려는 인류의 치명적인 경향이 그들의 실수에 있어 절반을 이룬다."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김형철 역(서광사, 2002, 1판9쇄), 61면.

그러니까 진리로 묵인되는 사안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집요하게 물어 뜯으라는 것.

반응형
반응형

나는 원래 복수의 책을 병행해서 읽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중간에 읽다가 그만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생처럼 학습이 주된 일상사가 아닌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집에 묵혀 둔 밀의 『자유론』은 그런 식으로 읽다가 책의 1/3 정도의 지점에서 책을 덮은 것이 2003년이었다. 당시 잠깐 다녔던 일본어 학원의 수강증을 책갈피로 써서 시기를 알 수 있었는데, 그 때 줄쳤던 부분은 지금 봐도 공감이 간다. 『자유론』은 강남좌파로 지목된 조국의 인터넷 강좌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저서라 내 생각에는 고등학교에 철학과목이 개설된다면 한 학기 동안 『자유론』을 교과서로 써도 좋다고 본다. 공리주의자로서 개별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때의 자유는 다수의 폭압에 억눌러진 자유로, 이렇게 개별자가 침묵을 강요당하면 사회적 발전도 퇴보할 수 없다고 밀은 본다. 여기서 다수는 정부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는데, 정부는 제도를 통해 소수를 통제할 수 있고, 사회는 여론을 통해 소수를 제압할 수 있다. 특정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이 의사를 제도와 여론으로 사장시키는 것은 다수의 맹목적 폭력이다. 다수가 자신의 의견을 소수의 의견을 묵살한 채  관철시켜가는 것은 스스로 정당성과 유용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다수의 의견은 소수의 의견을 통해 검증받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통해 오류로 판정될 가능성을 놓칠 수 있거나 소수의 의견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진리로 확인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제제도 없이 유유히 라인을 타고 흘러가는 강은 늪지와 모래밭과 같은 여과장치를 파괴하며, 그 결과는 점진적인 사회의 균열과 와해로 나타난다.
 
그나 저나 오랜만에 철학책을 접해서인지 건조한 감이 들어 도서관에서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을 대출했다. 오 헨리의 단편을 고를까 했는데 내가 즐겨가는 서가에 없어서, 역시 앞부분을 읽다가 만 체호프의 작품을 골랐다. 토마스 만의 경우처럼 단편은 중장편이나 대하서사와 비교해 소품이나 대작을 위한 디딤돌로 볼 수 있는데, 체호프에게는 단편이 더 알려져 있다. 체호프도 서머셋 몸처럼 젊은 시절 의사직을 던지고 집필에 몰두했다면 대작을 남겼을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