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취미2 : 꿈꾸는 식물

단상 Vorstelltung 2013. 6. 13. 10:30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어제 차를 타고 오며 가수 출신 DJ의 청취자 사연을 흥미롭게 들었다. 직장인 밴드 생활에 대한 얘기였는데, DJ는 사연을 소개한 후 음악으로만 먹고 사는 가수는 극소수이며 대부분 투잡을 한다고 했다. 오히려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음악에 대해서 더 순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먹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그 좋아함의 순수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꿈이 무엇인지 잊은 채 살기 위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물생활이다. 그렇다면 그런 꿈들이 질식되는 사회는 식물사회인 셈이고. 나도 어느 만큼은 식물상태에 있다. 꿈의 정원과 생활의 압박은 성인의 내면을 반영한다.   

 

좋아함, 꿈이란 취미인가? 연애를 한다거나, 게임에 빠지거나, 극지 여행을 하는 것도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인 선호란 자신이 그곳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그 활동을 스스로 하고자 함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 선호가 자신은 물론 주변인들과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적대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다(사회에 적대적인 것과 사회에 비판적인 것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좋은 선호인 반면 노름은 좋지 않은 선호다. 그런데 독서라고 다 좋은 선호일 수는 없다. 슈퍼갑이 되기 위해 수험서에 특정 세대가 집단적으로 몰입하는 방식의 독서가 그렇다. 엄격히 말해 이건 독서라고 할 수도 없다.    

 

한가지 애매한 지점은, 좋은 선호의 추구가 자신은 물론 주변인을 결과적으로 불행에 빠지게 하는 양상이 있는 경우다. 하루종일 독서만 하고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가장은 조선시대의 양반으로 태어났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선호를 완전히 포기하고 부양만 짊어지는 삶은 서글프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는 이런 삶의 비극을 극대화시킨다. 이에 비해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보여주는 유희 명인들의 수도자적 삶은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주지만, 헤세는 크네히트를 통해 이런 명상적 삶의 토대가 바로 현실적 삶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개성적 삶과 의무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분리의 간격이 클 수록, 그리고 그런 분리를 감추기에 급급한 사회는 개성적 삶을 질식시킨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