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단상 Vorstelltung'에 해당되는 글 203건

  1. 2024.04.08 좇좇소 감상과 관련 기억들
  2. 2024.04.01 기억들2 : 동양철학의 지혜
  3. 2024.03.31 기억들 : 91년도
  4. 2024.02.17 독일 재취업 도전기
  5. 2024.01.23 역대상 : 사실과 서사의 간격

좇좇소 감상과 관련 기억들

단상 Vorstelltung 2024. 4. 8. 20:1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유트브에서 이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의 드라마를 요며칠 즐겨 보면서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와 급식관련 일을 할 때의 기억이 밀려왔다. 첫직장은 금융 솔루션 중심의 벤처기업이었는데, 그 전에 나는 6개월간 개발자 교육을 받고 이곳에 기술영업직으로 입사했다. 이 업체는 이름난 대기업에서 상임이사까지 오른 사장이 퇴사 후 인수한 기업이었다.

6개월간 개발자 교육을 두 군데 교육기관에서 받았는데, 첫번째 기관에서 거의 태반 이상의 수업을 쫓아가지 못하고 수수방관한 터라 제대로 기술을 연마하지 못했다.  컴퓨터는 문서, 그것도 아래 한글의 문서작업 용도로만 활용했을 뿐, 오피스 프로그램도 사용해 본 적 없고 윈도우 탐색기라는 것도 몰랐던 컴맹인 내가 면접까지 본 첫번째 교육기관에서 수강생으로 뽑힌 것은 지금 기억해보면 "디제라티"라는 IT 관련 책을 보고 이 업계에서 꿈을 펼쳐 보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 전공과도 무관하지만 면접관에게 통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합격한 수강생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몇몇에 불과한 인문대 출신들은 프로그래밍 관련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심지어 이 기관의 수강기간 동안 수업을 빼먹고 피서여행을 가기도 했고 한 출판사에 입사지원해 합격했지만 단 하루 출근하고 그만 둔 후 교육장에 복귀하기도 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수업담당 실무자는 가까스로 의무 수업일수를 채운 나를 안스럽게 보면서 수료장을 건네 줬다. 이후 나는 일단 본격적으로 IT 업종 개발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나는 거의 100 여 곳의 관련 기업에 이력서를 보냈고 두 곳에서 면접이 잡혔다. 제대로 된 기술증빙이 안되는 나를 그나마 면접기회라도 준 것으로 고마워 해야 했다. 취업이 안되자 나는 다시 두 번째 교육을 받기로 한 것이었는데, 첫번째는 비주얼 베이직 과정이었었고 두 번째는 자바 과정이었다. 이천년도 초반, 업계의 프로그래밍 언어의 대세는 로컬 기반의 비주얼 베이직이었고 웹 기반의 자바는 아직 생소한 시절이었다.    

아무튼 겨울기간 동안 두번째 교육을 마치고 아르바이이트를 하면서 계속 이력서를 넣다가 초여름에 두 군데서 면접이 들어왔다. 더이상 개발 쪽에서는 면접기회가
없어서 기술영업 쪽으로 방향을 튼 직후였다. 먼저 면접 본 회사는 용산에 있는 네트워크 관련 벤처였고 두번째는 포이동에 있는 금융관련 벤처였다. 면접 후 두곳 모두에서 합격했는데, 벤처라도 중소기업이기에 그래도 좀 안정적으로 보이는 두번째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회사는 벤처기업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부설 연구소도 있었지만 실상은 창고에 불과했다. 그래도 15명 가량의 직원 중 총무 파트 3명과 나, 그리고 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전부 개발직이었고, 사장도 직접 코딩은 안해도 개발과 관련해 업계의 니즈와 트랜드에 정통해 있는 기민하고 끈덕진 기업가였다.

나한테는 이곳이 사회생활의 첫 시작인 셈이었는데 한달의 적응기 동안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감시의 눈은 사장 말고도 또 있었다. 오피스 프로그램에 익숙하지 않아 사장이 내게 일주일 내로 엑셀에 통달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고, 내가 만든 엑셀 양식의 기안서 틀을 놓고 그야말로 열댓번 퇴짜를 되풀이 했다. 그때는 그렇게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사장의 요구에 맞추어 갔다. 그렇게 수습기간이 지나고 옹기종기한 규모의 회사임에도 업무적으로 다양한 일들을 치고 나갔고, 직장 선후배 동료들과 즐거운 술자리도 갖으며 1년이 되어갈 때 쯤, 회사는 정부과제사업으로도 눈을 돌렸고, 나는 이를 위한 문서작업을 맡았다. 이 일을 완료하고 난 후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는 그 일이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로 여겨졌고 개발쪽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반응형

기억들2 : 동양철학의 지혜

단상 Vorstelltung 2024. 4. 1. 01:5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90년대 초중반기 유가철학에 정통한 교수님을 통해 이런저런 기억에 남을 인상을 받았다. 그중 한 일화는  술에 관한 것이다. 술이라라고 한다면 가히 소크라테스를 넉다운시킬 만한 저력을 가지셨던 이분은 뜬금없게도 수업시간에 술에 관한 짧은 강론을 펼치곤 했다. 유독 이것이 요며칠 사이에 떠오르는데, 독일에서 내가 주력으로 마시는 술이 보드카이기 때문이다. 주로 반주로 드는데, 37도의 이 술을 소주처럼 목 구멍으로 바로 넘기다 보니 인후에 부담이 되는걸 느끼게 됐고, 교수님의 말이 바로 와 닿았다. 당시 중국을 학술차 자주 다니시며 독주를 마시는 요령에 관한 것이었는데, 50도 이상의 독주는 바로 넘기지 말고 혀에서 몇차례 굴려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격렬한 알콜은 혀를 일차로 강타하고 목을 타고 넘어가 위장으로 흡수되기 전에 이미 혀를 통해 취기를 일으킨다.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진리다.

대범한 진리는 무엇인가? 부활절 기간인 지금 예수의 부활은 정말 이 휴일처럼 실재일까? 성경과 성경 외 역 사적 사료의 증거능력은 둘째치고, 사도들의 순교 자체 만으로도 증명불가능하지만 개연성있는 증거다. 믿음은 이런 차원 너머 있는 것이지만, 그런 믿음은 어렵고 좁은 길이다.

반응형

기억들 : 91년도

단상 Vorstelltung 2024. 3. 31. 16:35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고3 때 전기대 시험에 낙방한 후 재수를 하려던 계획을 접고 소도시의 후기대에 입학했다. 1년간 학교를 다니며 무수한 일들을 겪는 가운데 무수히도 재수를 고민했다. 당시 캠퍼스의 운동권은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NL과 PD로 양분되었고 신입생은 선택을 때로는 권유의 방식으로 때로는 반강제의 방식으로 받았다. 그러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NL진영의 과 선배들이 주도하는 MT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일단 도피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 도피란 군입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수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비록 정치적 지향은 그 선배들과 달랐을지라도 그렇게 도먕친 것이 미안스러운 감과 아울러 그때 학교를 계속 다녔더라면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반응형

독일 재취업 도전기

단상 Vorstelltung 2024. 2. 17. 16:5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올해 정초부터 놀게 되면서 필사적으로 새 일을 찾으며 임시로 할 만한 일도 알아봤다. 새 일을 잡더라도 비자변경이 필요해 또다시 암울한 대기상태가 몇 달이고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에 돈이 될 만한 일을 찾아야 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 한국에 비하면 더없이 그런 임시직이 너무도 제한적이다. 다행히 전에 같이 일하며 이후 연락하고 지낸 지인을 통해 프랑크푸르트 인근에서 이사일을 하루, 페이스북 광고를 통해 알게 된 한국업체의 프랑크푸르트 메세 전시 보조일을 이틀 한 것이 1월의 전부였고, 내일 당일치기로 이 업체의 컨테이너 하역일을 하러 간다.

1월 메세 전시 보조일은 가정용 과채전용 분쇄기에 들어가는 채소와 과일을 다듬어서 수시로 전시장의 쇼호스트들에게 날라다 주는 일이었다. 원래 5일치 일이었는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틀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사정 중 하나는 이렇다.

이틀째 일이 끝나고 마부르크로 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쥐트 역으로 갔다. 이 때는 마침 독일 장단거리 열차 파업기간이었지만, 열차가 아주 제한적으로나마 다니기는 해서 파업때문에 할까말까 고민되던 이 일을 그래도 한 것이었는데, 둘째날 밤에는 열차가 아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초저녁부터 기다리던 많은 승객들은 열차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리저리 웅성거리며 대체교통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파업기간이라선지 명확하게 열차취소에 대한 안내방송이 없었다. 다만 도이치반 앱에 밤 1시가 넘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카셀 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있다고는 떴다. 이날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추운 밤이었다.

중앙역으로 가는 고속철을 타기 위해 남부 역에서 레기오날을 타고 하나우 역으로 이동했다. 배도 고픈 와중에 춥기도 해서 일단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커피를 시간간격을 두고 먹었다. 3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산한 고속철을 타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해서 카셀행 열차가 예정되어 있는 선로로 갔다. 근 6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이제 집에 가는구나 싶었고, 아무래도 늦은 귀가로 다음날 일이 어렵겠다고 업체 담당자와 이미 소통한 후였다. 그러나 이 열차도 취소되고 말았고 카셀방향으로 가려던 적지않은 승객들은 동분서주하며 S반을 타러가거나 택시나 우버를 알아보고 있었다. 프리드베르크까지는 새벽까지 S반이 다닐 것이지만 그 이상 너머로 가야할 사람들은 그야말로 막막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나는 한 밤을 버티기엔 그래도 프랑크푸르트 쥐트나 하나우 보다는 큰 역사에 있는 것이 한결 낫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일단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플랫폼 출입구에서 동태를 보고 있었다.

이때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 5명이 내 근처에서 우버를 알아보고 있었고 이들도 모두 마부르크 방향이었다.  관광객이라는 40대 여성 한 명에 나머지는 교환학생들이었다. 결국 나는 이들과 우버로 잡힌 SUV 차량을 함께 타기 위해 역사 서문으로 나갔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관광객 여성의 권유로 나는 소말리아 출신의 40대 우버기사에게 얘기를 해야했다. 추가요금 건 때문에. 많은 인원이 탄 만큼 기본요금 외에 추가요금으로 기사는 40유로를 불렀다고 했다. 기본요금은 120유로였다. 나는 현금이 지폐로 딱 20유로만 있었다. 나는 우선 기사에게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동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생들이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추가요금을 20유로 해줄 수 없겠냐고 했는데 기사는 흔쾌히 수용했다. 그리고 나서 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약 1시간 거리의 마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는 본업으로 전기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주말에 우버로 부업을 한다고 했다. 전기일을 하기 위해서 아우스빌둥 3년을 거쳤다고 한다. 특정 분야의 전문직이 아니라도 거의 모든 직업 영역에서 아우스빌둥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당장 돈이 안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아우스빌둥을 밟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루 하루 쫒기는 상황에서 직업교육의 기회는 그저 그림의 떡으로만 보일 뿐이다.

반응형

역대상 : 사실과 서사의 간격

단상 Vorstelltung 2024. 1. 23. 23:3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출애굽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경과 시간은 역대상에 나오는 야곱(이스라엘)의 족보를 근거로 추정해 보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0 년 안팍으로 보인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야곱의 12 아들들이 이집트에서 번성하다 출애굽하는데 까지는 불과 3 세대 밖에 걸리지 않는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60만 이상이라면, 야곱의 아들들로만 이런 인구가 될 수 없고, 야곱을 따라 오거나 이후에 이집트로 추가유입된 상당한 인구가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바빌론 유수(기원전 5세기)가 역사적 사실인 점을 볼 때, 이로부터 고고학적 증거가 희박한 그 이전의 구약 서사까지의 시간간격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솔로몬 이후 분열된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의 존재는 어느 정도 역사적 실체를 갖고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단군의 고조선을 보는 시각처럼 말이다. 바빌론 유수기 잡혀간 이스라엘 랍비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일신교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추정은 그렇다치더라도 규범과 서사를 통합시킨 경전을 태초의 세계와 그 묵시론적 종말의 선상에서 산출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물론 신약이 없었다면, 그 문체가 이와 너무도 상이한 구약만으로는 제한된 영햔력만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민족이 이처럼 장대하고 파급력 깊은, 서사와 규범을 통합한 경전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그들 만의 것이 아닌 보편성에서도. 서경, 시경, 불경은 막스 베버가 보기엔 기독교가 도달한 보편주의에 못미치는 경전이다. 과연 그런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