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를 읽고

책들 Bücher 2010. 4. 12. 17: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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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허망한 기분에 빠졌다. 작가의 사기에 놀아났다는 느낌도 들고, 광적인 천재의 결말에 허무함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10월 이후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소설임에 틀림없다. 고독하고  괴팍스러운 천재의 기행을 다루는 소설에는 언제나 신비감이 감돌기 마련이다. 이것도 하나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 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옴 자신도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이 소설을 구상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폴 고갱의 삶을 타히티까지 쫓아가서 조사했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이 아니다. 고갱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허구의 인물일 뿐이며, 그의 모든 그림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남태평양의 섬 깊은 산속에서 눈이 먼채 그린 벽화는 완벽한 진리, 미를 향한 허구의 작품이며, 마치 진리의 부재를 상징하듯이, 작품 속에서 이 벽화는 불타버린다. 완성 뒤에 바로 사라짐이다. 

예술이 마치 어떤 악마가 내린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몰고 간다면,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자신의 판단, 자율성이 마비된 채 끌려가듯, 인생을 송두리채 전환시키는 것은 경이롭지만, 너무도 위험해 보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한가지에 매진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은 광적인 신도와 흡사하다. 예술의 또다른 광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비롭고 즐거웠던 한주의 책을 오늘 반납할까 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 입가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인들이 자기네의 영역을 침입하면 성직자들은 불경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헨리 숙부[어린 시절 부모를 여윈  모옴은 실제로 사제였던 숙부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는 윗스터블 관할 사제를 이십칠 년이나 지냈는데, 속인이 성경을 인용하면 악마도 언제나 제 좋을 대로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숙부는 일 실링에 영국산 굴을 열세 개나 살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달과 6펜스』,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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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급박한 전환

문학 Literatur 2010. 4. 11. 16: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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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사람[스트릭랜드와 캡틴 니콜스]은 마르세유에서 넉 달 가량을 같이 어울려 살았던 모양이다. 그 생활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스릴 있는 사건이 터지는 모험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하루가 하룻밤 잠자리와 고통스러운 허기를 면할 음식을 얻는 일로 다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달과 6펜스』, p.235.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 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스트릭랜드]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남태평양 타히티의 숲속]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동, p.254.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대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정말 아브라함[화자의 촉망받던 의대 동기생]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 ㅣ 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상동,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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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동네로 이사온 선배와 만나서 『달과 6펜스』에 대해 얘기하다가 술을 진탕 마셨다. 다음 구절은 스트릭랜드가 깊은 병에 들었던 자신을 집으로 데려와 간호하도록 해준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때문에 생긴 문제와 관련해 하는 말이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ㅣ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달과 6펜스』, 202~203.

이 소설에는 중간 중간에 남성 중심적인 원시적 여성관과 아울러 철학적 훈계나 설교 분위기의 서술이 나타난다. 작품을 작가의 정신이 반영된 산물로 보는 전통적 작품론은, 『롤리타』나 『제 49호 품목의 경매』의 경우처럼 작품을 작가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전개시키는 현대소설의 조류와 비교해 볼 때, 다소 보수적인 것이다. 동일률적인 철학과 달리 차이를 시초부터 설정하는 들뢰즈에게 작품은 리좀으로 이루어진 연결망이다. 고원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서 『천 개의 고원』이 된다.  자신에서(an sich)부터 나와서(für sich)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anundfür sich)은 오디세이의 귀환, 자신 안에서의 여행, 내재성일 뿐이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며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유목이며 외재성이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욋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달과 6펜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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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 내면의 스파이

문학 Literatur 2010. 4. 5. 23:1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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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찰스 스트릭랜드]가 권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지겨운 인간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려고 화가가 되고자 결심했다면 이해할 만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야 흔히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내 느낌으로는 그의 경우는 그런 흔해 빠진 경우가 아니었다...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의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창조 본능은 그 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까지 몰아간 것이 아니었을까...ㅣ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달과 6펜스』, 74-75.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대체로 자신을 속이는 말이다. 그 말은 아무도 자신의 기벽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또한 기껏해야 자기가 이웃의 지지를 받고 있 ㅣ 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낼 뿐이다...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문명인의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일 것이다...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전혀 상관않는 사내가 여기 있었다. 그러니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이 사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자는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상동, 75-76.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이] 적(敵)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동,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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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스트릭랜드부인]는 연극 구경을 하듯 작가들을 바라보았으며, 이제 그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굳게 단힌 그들의 세계도 방문할 수 있게 되자 자신이 정말 더 대단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들은 인생을 게임하듯 살았는데 그녀는 작가들에게는 그런 방식이 어울린다고 여겼지만, 자기는 거기에 맞춰 행동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작가들의 괴팍한 도덕관도 기이한 웃차림이며 터무니없는 논리나 역설처럼 그저 재미있게 여겨졌을 뿐 그녀의 신조에는 눈곱만치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달과 6펜스』, p.27.

"문명인이란 참으로 이상한 관습을 생각해 내어 짧은 인생을 이런 따분한 일에 낭비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파티를 보고 있자니, 여주인이 왜 굳이 힘들여 손님을 청하며, 손님들은 왜 굳이 힘들여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두 열 멸이었다. 다들 무심하게 만나서 안도감을 느끼며 헤어진다. 이것은 물론 순전히 사교적인 모임이었다. 스트릭랜드 부부는 별 관심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녁 식사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초대했으며, 그들은 초대를 수락했던 것이다. 왜? 부부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 따분하니까."

상동, p.32.

"수많은 부부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산다[안온한 부모가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고 늙어서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생의 보람을 누리는 삶].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 무렵에도 강했던 내 타고난 기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나도 그런 삶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잘 정돈된 행복이 있었다. 하지만 내 혈기는 좀더 거친 삶의 방식을 원했다. 그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무엇인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는 더 모험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험한 암초와 무서운 여울도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상동,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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