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 : 91년도

단상 Vorstelltung 2024. 3. 31. 16:3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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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전기대 시험에 낙방한 후 재수를 하려던 계획을 접고 소도시의 후기대에 입학했다. 1년간 학교를 다니며 무수한 일들을 겪는 가운데 무수히도 재수를 고민했다. 당시 캠퍼스의 운동권은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NL과 PD로 양분되었고 신입생은 선택을 때로는 권유의 방식으로 때로는 반강제의 방식으로 받았다. 그러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 NL진영의 과 선배들이 주도하는 MT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일단 도피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 도피란 군입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수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비록 정치적 지향은 그 선배들과 달랐을지라도 그렇게 도먕친 것이 미안스러운 감과 아울러 그때 학교를 계속 다녔더라면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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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결과들 : 바울과 근대, 메시아적인 것의 변용
7장 세계정치로서의 니힐리즘과 미학화된 메시아주의 : 발터 벤야민과 테어도어 W 아도르노

166 벤야민 /신학정치 단편/ : 역사의 종말이자 파국으로서의 메시아주의
168~169 메시아적인 것과 상극인 행복에의 추구(세속화)는 몰락을 가져오고 결국 메시아의 나라를 앞당김. 행복은 무상함과 동일시되며, 괴테나 니체의 영원한 쾌락과 반대됨
170~171 고린도서와 로마서의 hos me(아닌듯한 삶)에 대응하는 벤야민의 니힐리즘 : 소멸, 무상함으로 스러져 가고자 애쓰는 것을 세계정치의 과제로 삼는 것. 바울에게 이 세계정치는 로마제국 파괴. 그에게는 로마제국에 대한 니힐리즘적 시각이 중요
벤야민의 창조에 대한 바울적 개념 : 창조는 고통이자 헛된 것(로마서 8장), 피조물의 한숨
173 무상함 아래에 있는 자연은 신음하고 한숨 지음. 이는 유대인의 통곡의 기도에 대응
174 이런 니힐리즘에 대한 저항은 니체 이전에 이미 켈수스Kelsos가 논증
175 청년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종교사적 논의가 아닌 믿음의 고백
177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아도르노에게서는 미학으로 가설화됨(Als ob). 벤야민의 해당 텍스트는 바르트의 /로마서강해/와 견주어 보면 그리스도교 외부에서 이루어진, 바르트에 비해 덜 성공적인 또다른 변증법적 신학(아마추어 신학). 이는 타우베스와 슈미트도 마찬가지. 교회와 신도(군대)의 기반이 없음.
178 바르트에 필적할 만큼의 강렬함을 지닌 벤야민에게 내재성, 선험성(자신으로부터의 완성)이 없음. 절벽을 횡단할 수 있는 다리는 건너 편에서 오는 것(외재성)

8장 성서 종교로부터의 탈출 :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180~181 바울과의 첫번째 철학적 대결 : 스피노자, /신학 정치적 논고/. 이는 신학과 계시(인간의 복종을 요구)로부터 철학을 해방시키려는 싸움. 여기서 두 가지 교두보는 솔로몬과 바울. 스피노자의 예정설(필연적인 자연법의 세계) 구상에서 바울은 주요한 전거
181~182 고대와 근대 철학의 파괴자들(안티 철학) : 맑스, 키르케고르 그리고 니체
니체의 일관된 주제 : 이성, 합리성, 곧 퇴락의 역사(플라톤-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한 전면 포격
183~184 니체의 비판대상의 단계적 이동 : 소크라테스에서 사제유형으로. 데카당스(퇴락)의 역사는 원한감정의 독을 품은 사제유형의 등장으로 발생. 이 사제유형의 최상급이 바로 바울(소크라테스와 예수 등을 오고가다 /아침놀/ 이후 바울로 타격지점 고정)
184~185 타우베스가 보기에 자기모순에 빠진 니체의 전략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구가치체계에 가장 뚜렷한 각인을 남가 바울을 질투심의 감정[또다른 원한감정?]으로 전복시키고(탈가치화, 가치전복) 더 위대한 입법자로 등극하기 위한 새로운 성서 제시(차라투스트라). 바울의 상징화된 가치를 원한감정으로 물들임으로써 극복하려는 것
186 스피노자의 예정설의 주요 참조문헌 : 로마서
186~187 철학의 두 가지 방식 : [소승]진리와 [대승]진리. 전자는 고전철학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후자는 맑스와 그리스도교로서 그리스도를 가로질러 헤겔에게로.
187~188 타자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여가를 얻어 지혜를 얻는 자는 노예를 부릴 수 있어야 함(귀족주의적 지혜, 비도덕주의). 이 테제의 결정적 적이 바울
196 바울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고린도전서)을 통해, 그 고통을 통해 영원회귀적인 삶에 유죄판결을, 저주를 내린 것(니체 유고)
197~198 우주에 관한 상반된 두 가지 이해방식 : 예외(기적)의 인정 여부(슈미트 대 니체).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한다면 1+1=3이 될 수 있음. 이것은 하나의 결정(결단). 예외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 무한반복의 삶을 침해
203~204 그리스도교에 대적하는 니체의 휴머니즘적 동기 : 의식적인 자아 안에서 그 의지를 허물어 뜨릴 수 있는 심대한 무기력이 존재. 이는 결국 양심으로 나아가고, 이를 통해 희생제의는 폐지된 것이 아니라 실체화됨(바울의 변증법 : 죄, 희생, 화해의 영원순환). 그러나 니체에게 무한생성의 존재 자체에는 죄가 없음
198 무한생성, 영원회귀는 바울의 다마스쿠스에서의 환각경험에 대비되는 니체의 환각경험, 근본경험의 산물
204~205 여기서 프로이트 등판. 테제 : 인간 자체를 구성하는 죄의 발견, 곧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06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 무의식(바다)을 자연과학적 기술로 설명(간척)하려는 프로젝트. 그러나 근본상황(죄의 수렁)의 변화는 없음. 즉 그의 의도(계획)보다 그의 통찰이 더 강력
207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바울의 직계후손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종교의 기원)
213 아버지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아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로의 이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충동의 실현[소망의 충족]이자 바울에게서 이중계율[율법과 믿음, 율법과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의 계율로 급진화하는 것
213~214 이러한 이행은 인류에게 죄의식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할례의 철회와 이방인 수용의 구원관으로 나아감
214~215 1930년대 쓰여진 /인간모세와 유일신교/(종교의 기원)에서 보이는 프로이트의 유려한 문체. 이는 당대의 슈미트나 하이데거의 극히 흥분된 문체와 대비.
215~216 종교의 기원 인용정리 : 야훼와의 불화(그들의 불복종에 따른 야훼의 분노에 대한 그들의 적의)에 따른 죄의식(양심의 가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남. 이 의식이 엄격한 율법주의로 나감. 즉 그들의 고도의 윤리적 관념은 야훼에 대한 억압된 적의에서 비롯된 강박신경증적 특성을 보임
215 이스라엘 민족의 죄의식이 주변이방인에게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번짐(보편화). 이 울적한 상황의 해결자가 바울. 원죄에 대한 그라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관
219 바울의 역할(환상의 차원에서 구원책 제시)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프로이트 : 문화이론[정신분석학의 사회적 적용]을 통한 치료책

https://youtu.be/1A73Ecdw4sU?si=AFEP75ReoXi1BOK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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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결과들 : 바울과 근대, 메시아적인 것의 변용
5장 이 세계 안에 있는 낯선 자들 : 마르치온과 그 후계자들
132~134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소망과 믿음을 제치고 남는 이유는, 고전적 의미에서 사랑은 결핍이기 때문(플라톤, 심포지움). 타인의 존립근거. 완벽한 상태에서도 존재하는 약함, 결핍을 포함하는 구원의 존재론, 홀로 완벽함이 아닌, 공동의 결핍에 따른 공동성
134~135 바울로부터의 두 갈래 길 : 국교주의와 마르치온주의. 하나르크의 /마르치온/ : 구약의 신은 신약의 신이 아님. 이런 주장을 펼친 마르치온의 신약복음서에 대한 응답이 기독교 정경의 탄생임
136 파문에 대한 바울의 불안, 창조주 하느님의 악마적 특성은 구원과 관련 없음. 왜냐하면 창조주는 악을 창조하기도 하기 때문(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구약신봉의 유대교를 비난하는 근거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
137 생존을 위한 교회의 대응 : 구약과 신약의 조화 간구. 이는 교조주의적인 알레고리적 해석도입으로 이어짐. [신약 항목과 일대일로만 대응, 유비되는 구약의 항목]
138 루터 : 율법(잔혹한 신)과 복음(사랑을 베푸는 신)의 분리
139 마르치온주의 교회의 급진적 사명 : 금혼을 통한 인구소멸(세계종말). 이는 독신자인 바울의 영향을 받음
142 신약에서 창조는 무의미. 창조와 구원을 잇는 실은 아주 미약함
145 하지만 바울에게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한 몸임

6장 절대를 향해 결단하는 열심당원들 : 칼 슈미트와 칼 바르트
147~148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개신교(마르틴 라데, 아돌프 폰 하나르크)와 독일 유대인(헤르만 코헨)의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은 붕괴(하느님과 인간세계의 조화를 누리던 빌헬름 황제 시대라는 건설시대 Gründerzeit 의 종말)
149 변증법적 신학(교회적 변증법)의 주요변수 출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여당)에 대항한 또 다른 야당은 에른스트 트뢸치, 페르디난드 에브너
150~151 이 시기의 관련 문헌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프란트 로렌츠바이크 /구원의 별/. 그리고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 카톨릭의 변종으로서 슈미트는 켈젠의 법실증주의[세속주의] 비판
152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 :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붕괴 속에서 태어난 변종
슈미트의 /정치신학/ : 예외상태(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주권자 상정. 이는 베버의 애매모호한 카리스마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나옴.
153~155 정상상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예외의 개념은 키에르케고르의 산물. 이 개념은 당대의 유행 현상으로서 슈미트, 로렌츠바이크, 에브너에게 영향을
미침.
155~156 : /정치신학/ 3장 : 근대 국가론의 중요개념을 신학 개념으로 환원(유비). 법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 근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으로 수반,형이상학적 신학인 이신론은 기적 개념의 예외상태를 거부함에 따라 질서에 대한 주권자의 직접 개입을 거부.
156~157 슈미트를 본 대학으로 초빙한 한스 켈젠도 신학과 법 사이의 유비를 형식적 차원과 정신분석적 차원에서만 인식. 이에 반해 슈미트는 법학 개념이 신학에서만 의미와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봄
158~159 형이상학적 이행이나 종합, 타협(세속화)을 거부하고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슈미트
162 정신의 역사에서 신학적 은유들의 정치적 잠재력 관찰(타우베스) gegen 슈미트의 법학적 개념들의 신학적 잠재력
163 반혁명의 묵시가 슈미트 : 국가권력의 [안정성]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카오스[무정부주의]를,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걱정하는 억제자(카테콘)의 충동

https://youtu.be/7OR7sT4FVCU?si=qk_VKGzDXMPfFsOO

https://youtu.be/d7rDQXO5SN4?si=fy0GARE_JZvhhh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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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독해 : 바울과 모세, 새로운 신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다
1장 <로마서>의 수신자
1.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로서의 복음 : <로마서>1장 1~7절 독해
33쪽 공로 보다는 믿음, 그것의 내적 논리
35 바울의 귀향(유대교로의), 저자의 과업
41  율법에 대한 도발적 변주-믿음의 복종
44 서신의 전략-권력 중심부 타격
45 카이사르 숭배에 대한 공격
46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은 카이사르 숭배에 대한 항의

2.예루살렘과 세계선교의 정당성 : <로마서> 15장 30~33절 독해
51 13번째 사도로서의 정당화 요구-예루살렘 공동체로의 직접 헌금
보유 :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의 운명
58 이슬람 전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유대교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융화

2장 노모스 : 법과 정당화-<로마서>8~11장 독해
60 로마서에서 율법의 개념 : 정치신학 gegen 노모스 신격화
62 바울에게 율법의 의미-시대 보편성
63 그리스적 유대교적 헬레니즘적 선교신학의 타협안에 대한 바울의 거부

3장 선태과 파문-<로마서>8장 31절~9장 5절 및 <탈무드>b. 베라코트 32a절 독해
77 동족의 생존을 위한 파문의 각오-모세, 바울(정당화 작업)
81 토라의 주제-신의 분노로부터의 피신(속죄)
     바울의 이야기는 화해, 욤 키푸르(화해의 날)
92 바울과 모세의 공동문제 봉착-백성의 죄(욤 키푸르 전례와 바울의 문제)
93 이스라엘의 질투 유도 :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닌,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넘어간 자로서의 사명

4장 프네우마 : 구원사의 능가와 이 세계의 극복-<로마서>9장~13장 독해
97 예표론적 능가전략 : 모방의 구원사(신약)
      모세를 능가하려는 바울(고린도후서)
98 바울의 경쟁상대는 예수가 아닌 모세-공통의 과업, 새로운 민족을 세우는 일
99 정적주의의 깊이
102~106 헤겔과 상이한 바울의 정신Geist
107~109 문헌학적 성서/철학 비판(역사적 의미만 인정)-스피노자, 니체
113~114 화해의 날의 전례 : 신의 절멸의 맹세에 대한 철회요구 기도, 바울의 비슷한 시도(로마서 9~13장)
120 로마서 9장~11장 구약인용의 목적은 질투의 드라마 상연. 유대인의 죄->이방인의 구원->이방인 질투(로마서 11장11절)
124 칼 슈미트의 반유대주의의 근거 : 서기 70년 이후 교회가 망각한 변증법,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공적인 의를 위해 하나님의 적이 되었었던 것
128~130 바울의 세계사에 대한 묵시론적 태도 : 구원(재림)의 근접에 따른 hos mä(마치 아닌듯이), comme si

유투브 서평 영상 링크(아래)

https://youtu.be/c9MZOokZAtw?si=6jzwCUa_9uq6puLj

https://youtu.be/cFVxnzuHXkI?si=dFjsiOHGWL_O3Q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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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티니 고진, 윤리21

칸트 Kant 2024. 3. 19. 07:2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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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윤리 : 영미 경제학을 넘어서

'인정투쟁'에서 악셀 호네트는 헤겔의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원자적 개인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기술한다. 원자적 개인인주의는 고립된 주체들로 이루어진 이론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므로, 실제적인 세계,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된 세계를 배경으로 할 수는 없다. 칸트 철학의 지적 계보를 놓고 보면, 칸트는 호네트를 포함한 독일의 비판 이론 계열에서 헤겔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미의 윤리학에서 칸트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물론 해외와 국내의 철학 석박사 학위 논문을 놓고 보면, 칸트 철학에서 주제를 잡은 논문들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지만, 칸트를 확장된 지평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독창적 작업을 보여준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앞서 말한 칸트 윤리학의 원자적 개인주의적 규정은 가라타니 고진에게 말도 안되는 기술로 격하될 것이다. 그는 칸트의 준칙의 보편화 가능성에서, 보편화를 특정 역사에서 배태된 공통감각에 묶여 있으면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특정 사회나 공동체에 예속된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을 위한 윤리라는 것이다. 그런 윤리가 과연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칸트의 실천이성에 쫓는다면, 그러한 윤리는 새롭게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나, 분석철학을 하는 이들에게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칸트 해석에는 심한 비약과 과장된 해석, 왜곡된 전용이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가라타니를 기만적 학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고전이 초월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이것이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 적합성을 갖고서 해석될 수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특정한 해석으로 칸트를, 마르크스를 가두려는 것은 교조주의의 발흥을 의심케 한다. 물론 이런 철학자들을 정밀하게 읽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칸트에게서 칸트를 넘어서는 관점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비판의 대상은 되겠지만 비아냥 거릴 만한 일은 아니다. 비판은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이중성으로 돌아가는 기계이지만, 비아냥은 결국 자신의 무지만을 폭로할 뿐인 불안한 심정이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관통하지 않고서 칸트에 관한 피상적 독서와 풍문으로 칸트를 규정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나,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은, 자기 확신에만 젖은 이해일 뿐이다. 칸트에 관한 글을 본지 꽤 오래되었지만, 정작 아직 세 비판서를 섭렵하지 못한 내가 '실천이성비판'과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도중 정리되지 않은채 파고드는 생각은(물론 나만의 생각은 아니지만) 칸트의 근본적 관심사는 윤리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윤리학은 종래의 윤리학이 아니다. 영미 경제학이 효용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를 바탕의 윤리학으로 깔고 있다는 점은, 이 새로운 윤리학을 암시한다. 비록 영미 경제학은 엄연히 분과된 경제학이지만, 분명 그 설명방식에 있어 기본으로 가정한 개인은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공리주의를 내포하는 것처럼, 이 새로운 윤리학은 이론적 인식과 보편적으로 추구할 만한 실천을 동시에 보려는 것이다. 즉 이 새로운 윤리는 경제학과 철학의 결합, 도무지 섞일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마르크스와 칸트의 결합이다.

이 결합의 단초로 가라타니가 짚는 대목은 '윤리형이상학 정초'에 있다. "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BA, 67/IV-429)  '네 자신의 인격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인간을 수단으로서 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한국에서 칸트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이는 이 유명한 구절을 '너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는 다분히 도덕주의적 훈계조로 해석하지만(백종현, "실천적 자유와 도덕법칙", 실천이성비판에서, 아카넷 2002, 481면) 가라타니는 이 구절에서 사용된 보조사를 세밀히 읽어내 정치경제학적 의미도 캐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관계가 임노동임을 하나의 자연사적 흐름으로 파악한 노년의 마르크스에게서 청년 마르크스의 윤리가 읽혀 진다. 그것은 이러한 임노동 관계가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라는,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명령이다. 이는 "인간이 굴욕당하고 압박당하며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청년 마르크스의 주장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정치경제학에 칸트를 도입함으로써 이론과 당위를 접목하려는 신선함도 보여준다. 호네트에 따르면 헤겔은 칸트 철학을 당위적 요청으로 일축시키지만, 칸트의 기획 전반을 놓고 보면, 자유인이 되라는 명령은 결코 인과율로 규정되는 세계, 이론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면, 칸트의 윤리학은 한낱 당위적 요청만을 하는 호소에 그치지 않는다.

윤리의 또다른 차원 : 국가를 넘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윤리의 또다른 차원의 규정은 세계시민적 윤리라는 점이다.  이 책의 1장에서 가라타니는 기다 미노루의 '미치광이 부락 주유 기행'이란 소설을 인용하면서 일본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편협한 인간관계를 지적한다. 자아정체성도 없이 농촌 '사회'라는 틀에 개인이 매몰된 곳에서 우정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공동체는 자기보존을 위한 터전일 뿐이므로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고, 인간관계도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도 '자기'는 없다"(29면)는 상태다. 이러한 상태는 농촌에 전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라는 정체불명의 괴력이 가족, 조직, 국가에 전방위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여러 부문들에서 전승된 정서로서의 공통감각이 생긴다. 가라타니는 일본의 가정과 조직이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더욱 편협할 정도로 공동체의 장력에 구속당해 있다고 보지만, 그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오히려 가족과 조직을 포함한 사회 보다 큰 범위인 국가를 향해 있다.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년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성숙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집단(국가)으로서는 항상 미성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나 노파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적 도덕에 비하면 훨씬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래 국가와 국가 사이란 겉치레말이 아무리 요란해도 德義心은 그다지 없습니다..ㅣ국가가 평온할 때에는 역시 덕의심이 높은 개인주의에 중점을 두는 편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윤리21, 82-83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소논문에서 칸트가 구분한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가라타니는 자신의 윤리에 맞게 고쳐 읽는다. 이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국가적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고, 국가를 넘어선 이성의 코스모폴리탄적 사용으로 보는 것이며, 오히려 조직과 국가의 틀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용에 따라 영리 조직이나 공공 조직인 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공적인 이성의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활용해 미학적 태도변경을 이성의 공적인 사용 영역에도 전용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태도변경을 통해 공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자의 자유에 달렸다. 그리고 이 자유는 자신에게는 명령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자유다.

여기서 칸트 철학의 핵심적 주제이면서도 논의의 과정상 곤혹스러운 부문은 자유가 어떻게 명령되어지냐는 문제다. 칸트는 자유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봄으로써 자유를 해명하려는 이성의 작업에 한계를 정한다(도덕법은 자유의 인식 근거이며, 자유는 도덕법의 존재근거). 신, 영혼의 불멸이 이성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도덕을 위해 요청되는 바처럼, 자유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당위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헤겔은 칸트의 자유가 당위에 불과하다고 하며, 공동체에 기반한 인륜을 제시하지만, 인륜을 비롯해 신과 영혼의 불멸로 도덕을 강제하는 것은 타율적 방식인데 비해, 실현되지 않은 미규정의 자유를 사용해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자율적이다. 여기서 물론 헤겔의 인륜과 종교(신/영혼의 불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헤겔의 인륜이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갈 만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종교에 관한 헤겔과 칸트와의 인식 차이를 짧게 지적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칸트에게도 윤리의 형이상학(자유)과 현실의 도덕법 사이에 국가와 종교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칸트의 입장은 헤겔보다 적극적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는 단지 도덕법의 집행을 위한 기구에 불과하며, 종교는 도덕법의 실천을 돕는 유용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이에 비해 헤겔은 국가에 적극적인 성격을 부여하며, 그가 제시한 사회관의 배후엔 신교가 자리잡고 있다. 칸트가 초월적인 방법, 즉 경험 밖에서 경험세계를 관찰하는 형이상적 방식을 택했다면, 헤겔은 역사 속에 구현된 세계를 정신이라는 메타포로 전환시키고, 이 정신을 현실에 다시 구체화시키는 현상학적 방식을 택했다고 대비될 수 있다. 단, 칸트도 말년에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그 모호한 자유의 확고한 기반을 위해,  법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작업을 한다. 이는 자신이 제시한 윤리의 형이상학을 현실의 도덕법으로 구체화시키려는 시도다.

가라타니가 윤리의 대상으로 삼는 타자는 시간적으로 미래세대를 포함하며 공간적으로 세계인을 아우른다. 칸트에게서 이성의 주체가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칸트 철학의 생태학적 지평 확장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세계인에 적용될 수 있는 윤리의 형이상학, 보편화 윤리라는 위상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내국민 관계에서 보다도 국가간 관계에서 야만성이 더욱 강고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야만성은 어느때고 분출될 수 있는 분쟁의 계기가 되고 있다. 가라타니는 전후 일본의 책임문제를 거론하면서, 인식과 책임이 혼재된 상태에서 1억 총참회를 외친 황족 출신의 수상을 수상하게 본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군부이고 이것을 승인한 것은 천황이며, 국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발성이 있더라도 전쟁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므로, 책임의 과중은 군부와 천황에 무겁게 내려지고 국민에게 경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황은 일본내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미군정에 의해 전쟁책임으로부터 벗어났으며, A급 전범들은 내각과 신사로 모셔졌다.

가라티니가, 국가가 행하는 전쟁 범죄에 개인들이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는 일을 중단시키는 방안으로 제시하는 일은 사유재산의 폐지다. 여기서 사유재산이란 국가가 걷어내는 세금으로 축적된 재산을 의미한다.                

"엥겔스나 레닌과 달리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찾았다. '자본론'에서 그는 그것을 '개체적 소유의 재건'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협동조합에서는 각자가 자유로운 소유자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폐기라고 하면 곧 국유화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란 어떤 의미에서 국유재산이고, 그 증거로 우리는 그 소유에 대해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유재산의 폐기란 국유재산의 폐기, 즉 국가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윤리21, 188면)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를 폐기할 것인가? 그 실천적 출발점은 세계인이 되는데 있다. 세계인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칸트의 자유, 윤리가 충분히 음미될 주제임이 드러날 것이다.  

2007.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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