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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에 이어지는 전쟁 이후 세대로 80년대 초반 조용한 공감을 일으켰다는 임철우의 소설집 『아버지의 땅』을 읽었다. 11개의 단편 중 4개의 작품은 한국전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전쟁문학이면서도 서정성이 짙다.
 
<곡두 운동회> : 좌우의 광기어린 대립을 우화화 한 작품. 이런 광기는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에서 소설의 제목처럼 소피에게 두 남매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명령한 아우슈비치의 미치광이 장교의 광란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새벽> :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대한 또 하나의 우화.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의 공간을 마음대로 침범하던 낯선 자들의 무례한 횡포가 위층에서 일어난다.
 
<아버지의 땅> : 아버지가 전쟁중 월북한 54년 생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짙은 작품이다. 금강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은 한국전쟁의 허리 봉합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대남에 있던 공산 잔류의 월북을 위한 주요한 루트였다. 강원도 산간에 있는 한 마을은 이 산맥의 줄기가 급경사를 이루는 낭떠러지로 험난한 지형을 이루는데, 이런 지형탓에 마을주민은 빨치산과 국군 양 진영으로부터 길지기로 동원된다. 기동훈련을 하던 두 병사가 참호를 파다가 발견한 피피선에 묶인 유골은 월북을 하던 빨치산인지 이 동네의 주민인지 알 수 없다. 마을 어른의 북어와 소주로 제를 받은 이 유골은 작가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유골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사평역> :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매우 아름답게 연출할 구석이 있는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각색해 장편으로도 충분히 연장할 소재를 갖추고 있다. 톱밥 난로의 온기에 모여 앉아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2시간이나 연착되는 완행열차를 기다리면서 삶의 애환을 찢어진 북어 쪼가리를 나누며 털어 놓는다.

<뒤안에는 바람 소리> : 인민군 점령 시기 빨갱이 앞잡이로 고향 마을을 휩쓸던 마을 친구들은 상황이 역전되자 산으로 피신하고, 마을 후배 을석을 통해 식량을 지원 받으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을석의 어미는 이미 을석이 밤마다 어디에 다녀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탈출하기 전날 밤, 어미가 잠들어 있는 을석을 놔두고 지서에 다녀왔을 때, 사실 을석은 자고 있지 않았다. 흰 옷을 입고 광풍으로 몰아치는 뒤안의 바람은 출애굽을 앞둔 유대민족의 집에 불어 닥치는 죽음의 광풍처럼 피를 갈구 한다. 결국 문앞에 피를 묻혀 놓아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듯이, 어미는 서로 간 것이다. 

<어둠> : 임신중 교통사고로 소아마비 아이를 치여 숨지게 한 부부의 이야기. 여인은 속죄를 하듯 사고장소의 공원으로 나가 무너진 삶을 한탄하는 낯선 사내에게 아이를 갈망한다.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에서 미친 여자가 분만한 아이와 같이.

<잃어버린 집> : 건장한 남편과 어여쁜 아내, 그리고 딸. 이렇게 세 명의 핵가족이 임철우의 이 단편집에서 전적으로 나오는 가족 형태이다.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물론 이 가족에게도 불운이 닥친다. 해갈이를 하던 집의 감나무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아이가 집을 떠난 이후로 매해 진홍빛 감을 깊어가는 가을에 주렁주렁 늘어 놓으며 익은 감을 낙하시킨다. 삶의 아픔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는가.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 무등산으로 도주한 좌빨 무리에게 소개된 산자락의 한 초가에서 불빛이 보인다.  소개령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온 어미는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인데, 이 어미의 뒤를 쫏아 미친 여자와 군대가 따라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어미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무등산으로 도주한 아들이 돌아온 줄만 안다. 호롱불빛이 세어 나오는 집을 보고 마치 불나방처럼 달려든 아들은 또 하나의 생명이 잉태되는 집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개도둑> : 불운한 가족사의 애환을 품에 안고 큰 아버지 댁에서 자란 주인공은 역사에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묘지가 장마로 범란한 강발에 휩쓸려 가버렸다는 전갈을 받는다.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해 못견뎌하던 어머니는 강원도 탄광 어느 대포집으로 떠나 버렸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주인공에게 이 비극의 운명은 전쟁의 참화와 다르지 않다. 불이 일어나는 개의 눈빛에서 광기어린 아버지의 눈빛을 읽은 주인공은 개를 안고 뛴다. 강에 흩어져 흘러가 버리는 아버지의 잔골을 수습하는 것이다. 

<그물> :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한파로 무역회사에서 퇴출을 당한 미스터 김은 25층의 빌딩에서 벗어나며 마치 그물에서 자신이 빠져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인에겐 고분고분하면서도, 과자까지 상납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세든 사람에겐 사납게 짖어대기만 하는 개 한 마리도 어쩌지 못하는 소시민의 운명을 발견한다.

<수박촌 사람들> : 신흥 부유 주택단지인 행복동에 사는 남자들은 씨없는 수박이란 소문의 진상에는, 마을 통과하는 시내버스가 동네 이미지를 실추시킨다는 근거로 항거를 나온 이 동네 아줌마들의 힘이 있었다. 

출판이력 :  1984년 초판(문학과 지성사), 1994 15쇄, 1996 재판, 2007 13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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