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관한 고백

문학 Literatur 2011. 5. 30. 23: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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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읽은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이후, 이 작가의 작품이 끌렸다. 일단 잡힌 것이 『보이는 어둠』. 갓 노년에 이른 작가가 우울증에 걸려 정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의 과정을, 아마도 정상적인 정신의 상태일 때 기술한 에세이로 보인다. 잘 모르던 작가였는데, 그러한 걸작을 남긴 작가가 이런 병에, 그리고 그 자신이 겪어서 보기에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 중병에 빠져든 것이 『소피의 선택』에 흐르던 유쾌하면서도 슬픈, 격정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장면들과 뒤섞이면서 서글퍼진다. 

"나를 휩쓸고 지나가 결국 12월에 입원하게 만들었던 폭풍우는, 6월쯤에는 포도주 잔 정도의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구름-표면적인 위기-은 내가 사십 년 동안이나 남용해왔던 술과 관계가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져나온 논문과 책에서 볼 수 있듯, 전설적일 만큼 치명적으로 술에 의존했던 수많은 미국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환상과 몽롱한 행복감으로 안내하고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마술적인 유도물로 술을 애용했다. 진정제나 승화의 도구로 술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거나 ㅣ 변명할 마음은 없다. 술은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는 단 한 줄의 글도 쓴 적이 없었지만 나는 글을 쓰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과 더불어 종종 술을 이용했다. 술은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는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술은 나의 오랜 지적 동반자였다. 게다가 날마다 봉사를 요구했던 절친한 친구로서 내 영혼 깊은 토굴 속 어딘가에 오랜 세월 동안 감춰두었던 불안과 싹트는 공포를 진정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내 시련은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출현했다. 나는 배신당했다. 그 시련은 어느 날 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다가왔다. 더이상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마치 내몸이 마음과 더불어 궐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날마다 술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졌던 내 몸이 갑자기 술을 거부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더더욱 술이 필요한 그 순간에 술이 내게서 등을 돌릴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많은 술꾼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거부현상을 경험한다고 했다...하여튼 술을 마ㅣ시기만 하면 , 심지어 한 모금의 포도주조차, 구토를 일으켰으며 절망적이고도 불쾌한 멍한 기분과 가라앉는 느낌과 끝내는 눈에 보일 정도의 혐오감이 나를 휘감었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친구가 서서히, 마지못해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늘 그렇듯이 한순간에 내 곁에서 떠나버렸다."

윌리엄 스타이런 William Styron,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 (1992) 임희옥 역(문학동네, 2008, 1판 7쇄), 49-51면.

그래도 술은 약에 비하면 건강한 정신에겐 강장제이지만,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태는 퇴락이다. 스타이런은 너무 마셨던게 아닐까. 

"이제서야 확신하는 바이지만, 술은 우리가 서로 작별을 고할 때 나에게 심술궂은 속임수를 썼다.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그럼에도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은 한 번도 말 그대로의 우울증을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안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했다.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패막이 노릇을 했던 동맹군인 술이 갑자기 증발해 버리자, 악의 사신이 무리지어 잠재의식으로 몰려오는 것을 막아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상동,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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