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EBS에서 두번째로 본 건데 실험적인 요소가 가미된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첫장면 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타르코스키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긴 정지화면의 프레임에 갇혀 세 배우들이 마치 세 봉우리의 산처럼 우직하게 앉아 있으면서 영화의 서막이라고 할 만한 대사를 펼친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시대의 삼강 중 통일일본의 유력한 세력으로 꼽히던 다케다 신겐은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신할 '카게무샤'(그림자무사 :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세우는 영주의 짝퉁) 후보를 면접한다. 영지의 가택 본청의 연단을 중심으로 낮고 굵은 톤의 음성들이 교차하다가 천박한 목소리가 솟구쳐 올라온다. 카게무샤로 낙점된 이 인물은 좀도둑질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신겐의 눈에 띄어 본청에 불려져 온 것이다. 좀도둑질을 하는 자신에 비해 무참히 인명을 살상해온 신겐이 더 악질이 아니냐고 대들자 신겐은 그의 대범함을 치켜 세우며 그를 카게무샤로 훈련시키도록 명령한다. 영화는 한낱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권력자에 동화되는지 보여준다. 그림자는 단지 모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에 몸을 바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점. 죽은 신겐을 흉내내는 장면에서 비장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논란의 지도자가 죽자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파도치고 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나오지 않았을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카게무샤를 세워야 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세력에 비해 이 무슨 현상인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EBS에서 두번째로 본 건데 실험적인 요소가 가미된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첫장면 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타르코스키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긴 정지화면의 프레임에 갇혀 세 배우들이 마치 세 봉우리의 산처럼 우직하게 앉아 있으면서 영화의 서막이라고 할 만한 대사를 펼친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시대의 삼강 중 통일일본의 유력한 세력으로 꼽히던 다케다 신겐은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신할 '카게무샤'(그림자무사 :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세우는 영주의 짝퉁) 후보를 면접한다. 영지의 가택 본청의 연단을 중심으로 낮고 굵은 톤의 음성들이 교차하다가 천박한 목소리가 솟구쳐 올라온다. 카게무샤로 낙점된 이 인물은 좀도둑질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신겐의 눈에 띄어 본청에 불려져 온 것이다. 좀도둑질을 하는 자신에 비해 무참히 인명을 살상해온 신겐이 더 악질이 아니냐고 대들자 신겐은 그의 대범함을 치켜 세우며 그를 카게무샤로 훈련시키도록 명령한다. 영화는 한낱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권력자에 동화되는지 보여준다. 그림자는 단지 모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에 몸을 바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점. 죽은 신겐을 흉내내는 장면에서 비장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논란의 지도자가 죽자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파도치고 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나오지 않았을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카게무샤를 세워야 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세력에 비해 이 무슨 현상인가.
전직 대통령이, 무슨 대역죄를 다루는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사정기관의 표적수사에 죽음으로 백기투항했다. 그러나 죽음으로 백기를 든 것에는 치명적인 분노가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지만, 영영 그럴 가망성이 안보이기에 극단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스캔들이 당사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종결되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아직 집권에서 물러선지 얼마 안된, 그럼에도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 오르던 인물의 경우는 깊은 충격을 준다. 이 충격은,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한 인간이 맞이한 좌절을 드러낸다. 인권변호사로서, 비운의 정치인으로서, 말많은 논란의 대통령으로서, 소탈한 시골마을 이장같은 이미지를 보였던 인물의 과오가 극단적 선택으로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상황에 그의 지지자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대중에게 분노를 유발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비극에는 너무도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인간적으로 그는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비루한 세상을 등지고 영원한 평화의 세계에서 안식하기를 빈다.
지난주 김광수 경제연구소 부소장의 강연 중 합성의 오류라는 얘기가 나왔다. 운동장 관람석의 오류라고도 불리는데, 관람석의 앞줄에 있는 사람이 경기를 더 잘 보기 위해 일어서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결국 경기장의 모든 관객들이 일어서서 불편하게 경기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부동산 버블을 빗대기 위한 비유인데, 비단 이 오류는 이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교육에도 그대로 들어 맞는다. 성년이 될 때까지(물론 성년 이후라고 더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좋은 학벌을 갖추기 위해 대부분의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사교육시장에 뺑뺑이 돌리는 현상도 어떻게 하면 좀더 힘들게 경기를 볼 수 있을지 골몰한 결과이다. 내집 마련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기 위해 누적된 가계부채가 내수시장을 짓눌리는 정도가 수도권에서 극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으로 재미를 봤던 과거의 재미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해 그래도 부동산에 기대를 거는 심산이나, 아이들의 심성이나 자질, 기대를 외면하고 오로지 입시를 겨냥한 살벌한 사교육 열풍으로 몰아치는 심산에는 일종의 도박심리가 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정말 부동산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이 있을 거고, 명문 대학에 들어가 인생의 전반에 꽃을 피우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얼마 안되는 희소한 '성공'을 위해 대다수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뭔가 잘못, 아니 웃기는 일이다. 집이 없어도 여유롭게 살 수 있고,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는 그리 고고한 이상도 아니다. 다수가 편하게 앉아서 경기를 지켜볼 수 있도록, 앞에서 기를 쓰고 서서 보려는 소수를 앉히면 그만이며, 이런 요구는 최소한 유권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권리다.
용산참사의 경우가 보여주는 바처럼, 메이저 건설사와 결탁된 도심 재개발공사가 도시 서민의 삶의 기반을 옥죄는 것이 흡사, 19세기 초반 미국 독립 이후 백인들이 동부에 산재해 있던 인디언들을 서부로 몰아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얼마 안되는 보조금을 주고 인디언을 미시시피강 너머 서부의 허허벌판으로 쫓아내지만, 얼마 안되어서 새로운 이 정착지도 착복되고 만다. 그럴싸한 협정을 만들어 인디언을 보호하는 시늉을 하지만, 겉치사일 뿐, 속내는 인디언이 이주를 거부하면 무력도 불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경계에 놓인 도시의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좀더 근본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경제학에 관한 한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이런 글을 쓴다. 운영자는 경제학 박사과정 내지 박사후 과정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전공하는 특정 경제학을 소개하면서 이러저런 잡글도 올렸나 보다. 그러다가 이제 이런 딴짓거리는 안하고 오직 자신이 공부하는 특정 경제학에 관한 자료만 올린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오직 전공 분야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관심이 있어서 사회현상과 연관된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한다. 물론 블로그에 자신의 취향이나 의견을 올린다고 뭐 대단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자가당착이지만, 자신의 학이 엄정한 중립을 지킨다고 자부하는 것도 대단한 착각이다. 학의 가치중립성 주장은 학의 가치연관성을 가리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다. 원자폭탁을 만드는데 자신의 양자이론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아인슈타인과 함께, 원폭금지운동에 동참한 폴링과 같은 과학자들은 학적 가치중립성의 전복을 드러낸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각 개별학문에는 고유한 내적 체계와 방법론, 엄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자신의 학의 시추공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다면, 이런 학은 도구적 정신노동에 전락하고 만다. 블로그는 자유로운 개인적 주장의 표출공간이므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주장에 무슨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학문간의 이질성은 민족간의 이질성과 유사하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이다. 하나의 언어 보다는 여러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현상은 더 다채롭게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의 언어만이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학적 세계에서 또다른 제국주의다.
영화 <파니 핑크>는 아마도 90년대 중반에 본 걸로 기억하는데, EBS에서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외양은 예전 청계천의 쓰러질듯한 아파트처럼 생긴 아파트의 옥상에서 무당으로 나오는 세입자가 추는 춤이다.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춘 곳에서 원시적인 무희가 전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낌을 일으킨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연은 이성이다'라는 결론적 명제를 <계몽의 변증법>에서 내렸다. 이때의 이성은 자연의 폭력을 이성이 전유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이다. 이성은 맹목적인 자연의 질서를 비켜가는 계략으로 자연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자연을 이성은 다시 재현시킨다. 잠자리의 모양과 비행방식을 모사해 전투헬기를 만드는 것은 이런 경우다. 이성은 모사를 통해 탁월하게 자연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지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타락한 자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성(Vernunft)을 협의의 이성, 곧 오성(Verstand)에 축소시켰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감성에서 받아들인 현상의 다양을 범주화시키는 것은 오성의 몫이다. 이성의 기능은, 이러한 범주화를 위한 선험적 법칙을 만드는 것인데, 이 법칙은 결코 자연 혹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도 이성이 만든 법칙을 자연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능은 바로 통제적 사용이다. 이성은 법칙을 창안하지만, 이 법칙은 무한한 자연 앞에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칙은 언제나 그 변경이 개방되어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은 세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미학, 윤리의 경로다. 주술은 미학에 가깝다. 물론 이 세 경로는 혼용이 될 수 있지만 혼동이 되서는 곤란하다. 애인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의 유전자가 잘못되어 있다'는 판단은, 아무리 의학적 관찰에 기반했더라도 잘못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은 사물을 대하듯 인간을 대하는 풍조가 있는듯 하다. 이성의 통제적 사용보다는 이성의 통압적 사용이 사회를 질식시키는 듯한 질서를 부여한다. 이런 곳에서 주술의 힘은 바로 인간의 시원적 본성을 선명하게 부곽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