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역사철학

헤겔 Hegel 2007. 5. 30. 17:5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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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유산

칸트는 그의 역사철학 관련 글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계몽을 이성을 사용할 용기로 보고, 국민이 자발적으로 시민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일정한 제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입법적 권위와 함께 계몽 군주에게 부여한다. 여기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이 이성을 역사적 자료를 동원해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헤르더의 시도를 비판한다. 헤르더의 ‘인류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에서 칸트는 헤르더가 이성을 비롯해 인간이 가진 고귀한 가치가 혁명적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상태를 자연의 저차원과 고차원의 연결고리로 본 점을 비판한다. 또한 칸트는 헤르더가 불가지한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더욱 모르는 ‘물질적 작용에 의한 정신의 발생’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비판한다. 그러나 불가지한 정신을 놓고 벌이는 이러한 비판은 타당한가? 현대의 심리철학이나 진화심리학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이와 같은 헤르더의 작업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에는 칸트가 남긴 유산들이 산재해 있지만 우선 헤겔은 이성을 주관 밖의 현실에서 자기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총체적 이성으로 확장시키는 면에서 칸트의 이성을 넘어선다. 즉 이성은 모든 실재의 근거이면서도 관념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자신을 실현시키는 것이며, 세계역사는 바로 이성이 활개하는 장이다. 특히 헤겔은 이성을 외부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이성에 국한하지 않고 개체적 의미로서의 이성으로까지 진입시키며, 이성에 섭리성을 부가하여 보편적 원리인 이성이 인간사의 총체적 현상에 적용될 수 있도록 무한한 힘을 행사하도록 한다. 여기서 이성(Vernunft)은 정신(Geist)으로 해석되는데, 이성의 정화된 형식자체는 논리학이 다룰 문제인 반면 현실세계에서의 이성은 정신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과는 달리 대립물의 통합과 폐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존적인 것이고 그것의 본질은 자유이다. 세계역사는 이러한 정신이 자기 본성에게로 향하는 것, 즉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자유의식의 진보과정이다. 언뜻 동일성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무참한 희생이 치러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정신이 자기 실현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결국엔 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한 발판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사후적 해석은 섭리설과 별차이가 없다. 이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정신의 본질인 자유 자체는 내재적 이념(즉자적 상태)이고 이것의 수단은 외재적 현상이다. 그런데 후자는 정열에 의한 일반적인 인간활동으로서 정신이 아직 발현되지는 않은 가능성 상태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정열적 활동은 자신들의 타산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만족적인 활동으로 보이나, 세계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보편적인 이성이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여기서 개체적 자기의식(Ego)은 절대이성의 대립물이다. 이러한 대립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의 운동이 진행된다. 즉 절대정신은 나폴레옹과 같은 정열적 인간을 끌어들여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열적인 위인의 활동이 진정으로 절대이성의 실현수단으로 증명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역사적 평가에서나 가능하므로 결과의 유용성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와 다를바 없다. 그러므로 현재 벌어지는 일이 미래에 가서는 진보의 수단일 것이라고 지금 증명하기에는 이성이란 기준이 불확정적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성에 대한 헤겔의 형이상학적 설명은 규범성을 벗어나서 유용할 수 없어 보인다. 이성의 유용성을 떠나서 이성을 적합하게 정의할 것이 있을까?
 
헤겔에게 이성의 유용성이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 내용의 실현은 한정적인 관습과 법의 형태를 취하지만 보편적 내용 자체는 윤리적 공동체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은 유용성이 아닌,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헤겔은 실현수단이 결여된 이념을 공허하게 본다. 이것은 이념의 본질에도 어긋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념의 목적은 즉대자적인 자기실현이기 때문이다(윤리적 공동체를 유용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그러한 공동체가 필연성을 담지할 정도의 근거를 갖춘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인간유의 지속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의 본래적 정당성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유용하다).


자유의 가능성과 세계사의 발전 척도


  헤겔은 국가를 주체의 의지와 이성의 의지가 결합하여 내재적 이념을 실현시킨, 외화된 도덕생활의 상태로 본다. 여기에서 개인은 보편성에 위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의 자유를 누린다. 이러한 맥락에 놓인 국가의 상태가 자유의 충족인 것은 개인보다는 전적으로 국가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분명히 개인의 자유에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긍정적인 현실성이라는 헤겔의 견해는 현실의 지배질서를 공고화함으로써 개인의 육욕적이고 변덕적인 특수의지를 짓누르는 권력의 작용을 정당화시키는 면이 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헤겔은 잠재태적인 이념의 상태보다 이념의 실현(실천)을 더 중시한 것으로도 보는 해석도 있다. 바로 이 실천의 폭, 인간 자유의 폭을 어느 정도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헤겔이 거대한 힘을 지닌 사유체계의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헤겔 철학의 실존성은 태초로부터 완성된 의식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음을 말한다(Merleau-Ponty, p.65). 그러나 헤겔의 총체적 이성에서 벗어난 자유 내지 실천은 본래적인 헤겔의 의도와는 상충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헤겔이 국가에 부여한 합리성이 인간의 현실적 행동에 대항해 우세하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권위는 칸트가 시민사회의 계몽을 위해 군주에게 부여한 입법적 권위와 물리적 강제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된 것이 정신이 역사에 행사되는 기제를 밝혔다면 이제는 그 기제가 현실에서 드러난 모습과 그 척도를 말할 차례이다. 완성된 국가의 결정체는 헌법이다. 법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헤겔은 자연상태에 대한 규정 문제를 논한다. 헤겔은 자연상태를 홉스 식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란 설명을 역사적 사료의 빈곤을 들어 거부한다. 또한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의 수정인 대의정이 인민층과 통치층을 분리한다는 생각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발상에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관적 의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며, 집단적 방식으로 강제된 법률이 소수의 의지를 무시하는한 그것이 만장일치로 결의된 것이라해도 거부된다. 한편 모든 동의가 충족된다면 국가는 투표기구로만 한정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의 국가가 그렇게 나약하지 않은 것은, 국가 원리인 헌법이 신적인 본성 자체인 보편적 의지를 주관적 의지를 지닌 개인들에게 실현-정신이 자기 자신 안의 대립물을 극복하면서-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에 있다.


  헤겔에게 역사적 대상으로서 철학적 고찰이 될만한 것은 의식과 의지, 행위 안에 합리성이 드러난 것으로서 그것의 형태는 법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전무한 상태, 즉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는 임시적인 주관적 통치명령이 보편타당한 법을 대체하고, 영속적인 사건의 기록(과거의식)이 전무해 현재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덧붙여서 예술이나 교양의 발전도 국가(법의 상태)와 병행해서 발전하는데 왜냐하면 구체적 실현수단으로서의 공동생활을 위한 법, 제도와 마찬가지로 공동생활을 위한 외재적 실현수단으로서의 교양-예를 들어 조형미술-만이 보편성의 최성기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칸트. 이한구 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헤겔. 김종호 역 『역사철학 강의』. 삼성출판사 1993.

 G. Hegel,  The Reasons in History. tran. by R.S.Hartman. Bobbs-Merrill. 1953.

 M. Merleau-Ponty, Sense and Nonsense. tran. by H.L.Dreyfus & al. 
                                   Northwestern Univ. Press. 1964.


*십몇년전 쓴 레포트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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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군왕주의

주장 Behauptung 2007. 5. 18. 09: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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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왕릉에서 문화재청장이 지역 유지들과 부탄가스로 고기를 구워 먹은 일이 논란이다. 어제 MBC 9시 뉴스는 이런 행태를 몇년전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창경궁의 저녁 만찬 파티와 마찬가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해석을 가한다. 종묘에 어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못들어가게 하는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들은 분명 형평성에 어긋난다. 왕릉이나 왕궁, 종묘는 어떠한 곳이길래 거기서 고기를 구워 먹어서는 안되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들어가서는 안되나? 나는 이런 금지의 원칙이 고유한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라는 측면에서 제기된다면 마땅히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괴테의 생가 앞마당에서 관람객들이 프랑크소세지를 구워 먹는 일을 상상하기 힘든 맥락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논란에서 비판의 준거로 작용하는 일말의 사고에는 아직도 조선왕조의 유산을 성역화시키려는 심리적 군왕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을까? 2차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이 봉양된 일본의 신사 참배를 미디어에서 즐겨 비난하는 이면에는 우리에게도 성역화시킬 무엇이 필요하다는 절규에 가깝다.

고궁이나 왕릉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일은 문화유산에 대한 모독이지 결코 성역화된 왕조의 잔재를 침범하는 일은 아니다. 심리적 군왕주의야말로 공화주의에 대한 심리적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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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1 들여다 보기

영화 Film 2007. 5. 16. 17:4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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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중국 대륙영화를 제외하곤 홍콩 영화란 주윤발 시대의 홍콩 느와르나 액션 코메디가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재미도 있으면서 무게감있는 갱영화일 줄은 몰랐다. 최근 개봉되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가 '무간도'의 리메이크란 점이 이 영화의 무게를 반증한다.

무간도는 열반경에 나오는 18번째 지옥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스파이의 내면 상태를 암시한다.  

유덕화, 양조위의 주연도 돋보이지만 황추생(황국장), 증지위(한침)의 조연도 볼만하다.

영화 종반부에서 다른 삶(선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경찰 간부직 스파이 유건명(유덕화)에게, 경찰신분을 숨긴채 갱스파이로 젊음을 소진한 진영인(양조위)이 코웃음친다. 그러자 유건명은 진영인에게 자신을 죽일 거냐고 묻자 진영인은 다시 코웃음치며 자신은 경찰이라고 한다. 이때 유건명의 이 한마디가 카메라 원격조정으로 화면을 급변시키면서 그대로 진영인이 유건명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게 한다.

                                                 "그걸 누가 아는데?"

경찰 후보생 시절에 갱스파이 임무를 위해 특채로 뽑힌 진영인이 경찰학교에서 추방되는 형식으로 나갈 때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면접관과 황국장 뿐이었다. 이 영화는 초반부에 이 면접관의 장례행렬을 보여 주면서 본래 경찰 신분인 진영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지탱하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보여준다. 한침을 올가미를 만들어 합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 진영인과 접선을 했던 황국장이 갱들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 남았던 한 축 마져 무너진 후,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진영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유건명 한사람으로 전도된다. 즉 진영인은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이 신분을 증명할 데이타를 이미 삭제해 버린 사람을 놓고 총을 겨누는 것이다.  

진영인으로서는 유건명을 죽여서는 안된다. 죽이면 자신의 신분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유건명은? 경찰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그는 자신 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정리되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상으로 유건명이 진영인과 진정으로 '합작'을 바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살려준 경찰 내부의 또다른 부하 스파이를 여지없이 살해하는 것을 보면, 그가 믿는 것은 그 자신 밖에 없다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단지 진공 엠프로 음악듣기를 좋아하는 취미의 공통성이 '합작'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제 자신 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법칙과 규율이 없는 곳으로 '나도 나가고 싶다'라는 유건명의 말은 승자의 반성일 뿐이다. 그래서 도덕은 강자를 위한 것인가?

*영화 시작부에 대여섯명의 청년들이 한침의 설교를 듣고 경찰학교에 입사하는 것을 보면, 경찰 내부에 유건명의 정체를 아는 스파이가 또 있을 수 있고, 진영인이 죽은지 6개월 후 그의 신분이 회복되는 점은 이런 이야기 구도를 희석시킬 소지가 있으나,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골격을 드러내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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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이야기

책들 Bücher 2007. 5. 15. 17: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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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으로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의 단편이다. 절판된 책인데 논술고사의 여파로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역시 입시의 힘은 무섭다. 금주차 한겨례 21에도 논술예상문제가 부록으로 수록될 정도이니. 

오래전에 보았던 '좀머씨 이야기'와 흡사한 면이 있는 이야기다. 도대체 저 멀대같은 인간은 왜 밤이나 낮이나 온종일 걷기만 하며, 역시 멀대같은 창백한 한 인간은 필경만을 하고 다른 업무지시에 대해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거부만을 하는 것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보기 힘든 괴이한 면들이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두 명 다 죽음을 선택한다. 선택당하지 않고.

보통과 다름을 사람들은 좀처럼 받아들기 힘들어 한다. 형평법원장으로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섬세한 배려는 기대하기 힘들다. 어느 고용주가 자신의 업무지시를 아무런 근거없이 단지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거부하는 직원을 견딜 수 있을까. 당장 소리를 버락 지르며 짐싸고 나가라고 할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한 늙은 변호사가 기괴한 대상으로 몰리는 한 인간에 보이는  반응이다. 나중에 풍문으로 들은 바틀비에 대한 신상, 그러니까 그가 미수령우편물처리담당자였다는 이력만으로 바틀비에 관해 변호사는, 아니 멜빌은 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이질감으로 삶의 수위는 깊어지는 것일까.  

200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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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위기, 일상의 위기

책들 Bücher 2007. 5. 14. 17: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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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조속히 처리할 일이 있어 사무실에 평소보다 일찍 왔다. 산을 넘어 오면서  예전에 연수를 받던 중 한 시민단체 간사가 자신은 늙어서 부시와 함께 무덤에 가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짬짬히 김재명의 '석유, 욕망의 샘'(프로네시스, 2007)을 보면서,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축이 석유를 기점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20세기 초반까지 본래 국경 구분이 모호했던 중동에 석유를 둘러싼 이권분쟁으로 강대국들이 경계를 긋시 시작한 이래, 석유 때문에 내국민 간에는 물론 국제적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별 새로울게 없는 사실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흔들릴 수 없는 상식으로 굳어진 면이 있다. 그러나 미국이 벌이고 있는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 그리고 고조되는 이란의 위기 등 국지적 분쟁의 원인이 너무나도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라는 편의적 자원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일상적 진실에 부딪치게 한다. 아프카니스탄은 아직 발굴되지 않는 미래 석유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1차 석유파동을 초래한 1973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후 , 산유국간의 가격 담합체인 OPEC의 주요 구성원인 이란의 팔레비 왕은  석유값을 코카콜라 값으로 올릴 수 있지 않냐고 했다. 코카 콜라 1 배럴은 900원 대  환율로 200달러다. 산유국간의 담합이든, 강대국의 석유 주권 개입이든, 가능한 대체 자원의 확보이든, 석유의 위기는 일상생활의 위기로 몰려오는데 주말만 되면 차를 타고 깨끗한 자연의 품으로 가고 싶어하는 바램들을 바이오 디젤이 얼마나 채워줄지 기대된다. 일을 처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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