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Commune : 지역 살림에 대한 시론
사람은 모자간 육아의 단계에서 벗어나면 시원적 생활세계*인 가정을 벗어나 일정한 교육시설에서 사회화의 첫발을 들여 놓는다. 이때의 교육시설은 주로 영영아, 영아, 유아를 돌보는 시설로 지역의 생활세계에 속한다. 아이가 성장해 성년이 되어갈수록 이러한 일차적 생활세계**는 지역 생활세계에서 이차적 생활세계인 광역의 생활세계로 확대되며, 성년은 더 이상 교육만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생산활동을 통해 자기 삶과 후세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인의 단계이다. 물론 이런 얘기는 순전히 모범적인 예에 불과하며, 실제로 일차 생활세계와 이차 생활세계 간에는 간극이 있어서 지역의 생활세계와 광역의 생활세계가 틀어지는 것이 청년백수 현상인데, 광역의 직업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예이다.
여기서는 일단 광역의 생활세계를 학교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동네의 단위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보자. 유아단계부터 동네 단위의 교육시설을 벗어나 광역단위로 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중등교육기간까지 사람들은 동네 단위의 일차적 생활세계에서 있기 마련이다. 지역평준화가 흔들리면서 중고등학생들이 광역의 생활단위로 편입해 가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공교육도 점차 광역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사교육은 체인점처럼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광역 단위로 확장을 꾀한다.
교통체계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매우 유동적인 사회에서 생활세계를 지역과 광역으로 나누는 것이 억지로 보인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한창 주창되는 로컬푸드 운동을 볼 때, 먹을거리의 안전성과 에너지 부하 절감에서 지역이 주목된다면, 여기서 삶을 피워나가는 사람들의 생활세계도 간과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지역과 광역으로 지역을 분화하는 것이 단지 행정 편의적인 구획만은 아니다. 지역의 먹을거리가 지역에서 순환하는 흐름이 가능하다면, 지역에서 자란 아이들이 지역에서 성년을 맞고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모델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이 둘이 관련되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자립적인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아미쉬처럼 종교에 기반한 폐쇄적인 자립형 공동체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지역의 생활세계는 이렇게 강한 공동체성을 염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농촌사회를 기반으로한 공동체 모델은 분명 패기할 과거의 잔재는 아니지만,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과제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한 종교나 이념을 구심점으로 삼는 공동체와 상관없는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까? 물적, 인적 흐름이 지역과 광역의 구분을 의미없게 만드는 체제에서 지역의 자립적 경제란 수치상의 구분에 불과할 뿐이다. 먹을거리의 지역화도 어느 선상에서 한계가 있다. 도심에서 벼가 자라는 토지를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먹을거리를 통해 지역의 살림에서 되먹임 작용이 일어난다면, 살림의 차원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서도 지역에 기반을 둔 모델이 가능하지 않을까?
주)
*‘생활세계’라는 표현은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영역은 밀접히 맞물려 돌아가는데, 정치와 행정, 경제 영역을 포괄하는 체계는 생활세계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지만 반대로 생활세계가 체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론이라는 수동적 반사 외에는 극히 미미하다.
**가족 중심의 시원적 생활세계와 마을, 지역 중심의 생활세계를 통틀어 일차적 생활세계라고 규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