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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3년, 이미 그 전에 성리학에 기반한 실행으로 조정에서 인정받아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을 하던 조광조는 태조 때 부터 내려오던 미신적 제의, 즉 왕실에서 초제나 기우제 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관청인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제의는 도교적 이단으로서 성리학의 이념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조광조에게도 중종에게도 이 소격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중종과 조광조 간의 힘의 대결로 귀결되고 만다. 소격서 혁파 주장은 조선 초기부터 줄곧 제기된 주장이라 새로울 게 없는 일이지만 조광조는 이 소격서 폐지여부가 앞으로 자신이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을 어떠한 타협이나 절충도 없이 관철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겨 끈질지게 밀어 붙인다. 결국 조광조를 따르던 대간들이 사직을 불사하며 왕에게 압박을 가하고, 삼정승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1년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되고나자 중종은 소격소를 다시 부활시킨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함으로써,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자신에게 부담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정공신들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소격서 논쟁으로 왕의 권위를 궁지에 몰아 세우며 밀어붙이는 조광조를 결코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소격서 따위는 별 문제거리가 아니며, 당시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이를 문제삼는 것은 꼰꼰한 유생의 불필요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정략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사실 조광조가 성리학적 이념에 부합한 정치를 구현한다는 것도 공자에 의해 윤색된 먼 상고시대의 통치를 이상화해 신하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소격서 논란에서 조광조의 내면을 압박한 것은 원리주의적 유생의 양심이라기 보다는 왕의 권위에 일격을 가하려는 모험주의적 정략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고속승진을 하다가 36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젊은 정암은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때문에 조선 성리학의 계보(정몽주-길재-김굉필-조광조)를 잊는 성현으로 추대되어, 남명과 같은 사림들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즉 정치가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의 그를 기리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정두희, '조광조'(아카넷, 2000)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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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티 전략

카테고리 없음 2007. 4. 13. 11:0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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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서인 스티븐 카터의 『르네상스 메니지먼트』와 교양서인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에는 하나의 공통된 논의가 있다. 공통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 둘다 현재의 시대적 흐름에서 공유하는 점이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 공통점은 자발적 조직에 두는 강조이다. 레비는 사회적 유대를 겨냥한 과거의 조직이 몰 중심의 조직이었다면 현재는 나노, 분자 중심의 조직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몰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분자 하나 하나의 자발성 보다는 중심 핵의 통제에 의해 움직이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말한다. 반면 분자 중심이라는 것은 분자 하나 하나의 개별성과 차이성에서 전체의 활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자치 체제를 말한다. 그리고 레비는 이러한 분자 중심의 비유를 통해 인간을, 인간 지성을 강조한다. 어떠한 집단체제 방식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창조하고 지속시킬 인간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한 집단이 중심지도부의 몰락으로 전멸의 위기에 처할 지라도 인간 개개인의 힘에 의해 집단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잘 정비된 체제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것은 죽어있는 체제에 불과하다. 다만 레비는 기술체제의 발전을 인간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점을 강조한다. 신화시대의 개념인 희생, 신, 충성과 같은 특정 고정점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유대 방식이 기술체제의 발전 덕분으로 유동성을 갖는 유연한 방식의 통합으로 대체가능함을 말한다. 즉 과도한 책임을 특정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이를 기술체제에 맡켜 구성원에게 고르게 분산시키는 기술 진보를 이용해야 함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처럼 인터넷 망이 전역 곳곳에 뚫려있고 거대 온라인 기업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커뮤니티가 구축된 상황에서 그러한 자발적 조직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진부할지 모른다. 다만 자발적 조직의 결합을 위한 물적 기술적 조건은 너무도 풍부히 마련되어 있지만 이것을 최적으로 활용하는 지성의 풍토는 아직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성이란 연구실에 코박고 있는 집단들의 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사람들-레비의 표현을 빌면 소방수, 경찰, 간호사, 사회보장요원,NGO멤버,스포츠센터 지도원 등 신프로레타리아 사람들이 의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의 그것이다. 제도권 미디어 장치가 코방귀뀌는 이들의 목소리가 공중에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충분히 기술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발화가 가진 개별성을 최대한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서 기술적 중개자는 집단의 담화 지형을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검산한다."(레비)

200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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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몽상

카테고리 없음 2007. 4. 12. 09:1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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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기는 놈 있고
기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어제 회식으로 청계산에 있는 토담이란 고기집에 갔다가 탤런트 이훈을 봤다. 죄수인양 모자를 푹 뒤짚어 쓰고 조촐히 술마시는 모습이 웃고 떠들며 노는 우리에 비해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유명했던 시절도 있는가 하면 주춤하던 시기도 있기 마련이다. 삶의 특정 계기만을 절대화시키는 것도 집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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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관해

문학 Literatur 2007. 4. 11. 10:0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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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없는 노선

   테오 앙겔플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은 사건진행틀을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빌려 왔으나 완전한 귀향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에필로그를 달리한다.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필자의 해석이지만 감독의 생각은 도의적 귀향의식을 지향한다고 본다. 즉 발칸반도 일대의 정의(justice)가 도륙당하는 현장에 주인공인 하비 키이텔이 오직 세계 최초의 시선(필름)을 찾기 위해 뛰어들어, 이 필름과는 상관없이 일어나게 된 일종의 서정적 다짐 내지 선(善)에의 의지를 에필로그에 흘린 점에서 세계사의 혼란에 초연히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지 창출을 천직으로 하는 앙겔플로스같은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보다 더욱 무겁고 진지한 시도는 타르코프스키가 이미 시적인 정서로 스크린에 담아 냈다. 히틀러가 전인민에게 빵을 분배하겠다는 편집증적인 일념으로 자신의 책임의식을 광기어린 철십자상에 쏟아 붓듯이 예술가는 정의의 복권을 위해 자신의 광기를 활용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이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비약이다. 그러나 남을 위한 다고 절실히 자각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위선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다면 윤리적 각오가 깃든 광기를 히틀러의 그것과 견주는 것이 황당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의 처소를 찾아 헤매는 혜가(慧可)를 달래주는 달마(達磨)대사는 마음을 소급불가능한 것, 곧 그 움직임의 방향은 물론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본다(오진탁, 26). 이런 점에서 볼 때 누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할 것이며 이에 더 나아가 자신의 도덕의식이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성인(聖人)의 덕성조차 일종의 〈울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를 들어 세속적 욕망을 차단시킨다는 목표아래 심신순결훈련으로 혼탕에 들어간 남녀 제자들 중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여성에게 단발령을 내린 간디의 시도를 Erik  H. Erikson은 〈도덕적 잔혹성〉을 벗어나지 못한, 육체에 대한 미련의 잔영으로 본다(김우창, 287). 물론 그러한 세계사적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학자의 날카로운 지적은 소아병적 발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각고한 노력으로 보편적 의도를 실행한 세계사적 위인이 자신의 목적에 다다르면 무용지물이 되고마는 결과는 위대함과 특출남을 혐오하는 시기심 많은 사람들과의 화해점이기 때문이다(헤겔, 92). 이런 점에서 인문학의 특성은 양날도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반성의 예리함이 타자는 물론 자신에게도 향해 있으므로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無住를 위한 훈련에 부합될 것이다. 無住에의 집착, 곧 반성을 목적으로한 반성, 의심을 위한 의심, 반대를 위한 반대는 경계의 대상이겠지만.
   만인을 보살피겠다는 도덕가의 만용은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돌보겠다는 보살의 고뇌에 다름아니다. 『금강경』에 따르면 이러한 보시욕(布施慾)은 자기라는 망상의 흔적(我相)과 타자라는 망상의 흔적(人相)이 남아있어 "자기가 없으면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없으면 중생 세계가 자연히 적멸해질 것"(오진탁, 35)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다. 필자는 無我를 불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조명해 본다면 타자에 대한 관심과 '나' 자체의 타자성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관심의 단서를 '나'에 대한 관심, 곧 '나'의 타자성, '나'의 대상화에서 찾는 것이 그 역의 방법보다 비교적 수월함은 아테네의 광장에서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이나 일종의 주체철학인 유학의 修身모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 맑스주의와는 달리 투쟁에서 주체를 실체화하는 것에 반대하여 주체의 부재를 상정하면서도 개인(individuals)을 처음이자 마지막 구성요소로 중시할 뿐만 아니라 미시개체(sub-individuals)마저 포괄하는 푸코의 말(Foucault, 208)은 '나'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된다. 

  앎의 훈련, 곧 〈진리놀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을 〈시험〉하는 푸코는 성의 역사라는 실증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문제틀을 경험적으로 고찰해 보려는 '미완성 교향곡'을 남긴 것이다(푸코, 23). 이러한 작업은 나를 통해 남을 이해한다는 소박한 忠恕 개념이 지닌 의도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자유로운 대신 의미의 담지가 고정적일 수 없는 지식의 팽창적 가지치기가 무의미하고 무계획적인 혼돈의 분화(分化·噴火)라고만은 할 수 없다. 비록 一以貫之**라는 화끈한 성인의 경지는 이제는 이상적인 꿈에 불과하나 예술작품에서 나타나는 이질적인 일관성(김우창, 295)은 一以貫之의 지양된 해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바흐의 셀 수 없는 작품을 바흐의 것으로 들리게 하는 심미적 지향성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미학의 방법론이 도덕이나 지식영역, 더 나아가 사회체제에 순수히 형식상으로나마 파급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기대는 말그대로 추상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군자의 성정(性情)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詩經』을 편찬한 공자의 이상, 즉 고대 중국의 〈카오스〉와 같은 〈대륙적 상황〉에서 원활한 통치를 위해 요구되는 〈직관적, 시적 능력〉(정재성, 30)은 현대에의 적용가능성에 있어서 희박한 것은 둘째치고 대중기만을 위한 선동 내지 고도의 지배기술인 〈문화산업〉의 전략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판단만으로 증식하는 현상들의 다차성을 수용할 수 없다. 전체화되면서 개별화되는, 미분화되면서 분화되어가는, 자기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이미 자기 것이 아닌 '나'의 타자, 솜씨 좋은 채찍질로 몰 수 있는 욕망이면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의미성의 농락(籠絡). 그렇게 우리는 표류하고 있고 노선은 뒤엉켜 있다. 갈 수 없는 고향***이기에 고향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인가?   
참고문헌
오진탁 편,『감산의 금강경 풀이』(서울 : 서광사 1992).
김우창, "문학과 철학 사이에서 : 데까르뜨적 양식에 대하여,"『철학과 현실』?호, p.287.
헤겔, 『역사철학강의』(서울 : 삼성 1993), 김종호 역.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 1972-1977, edit., tran. Colin Gordon(New York : Patheon Books 1980).
미셀 푸코, 『성의 역사』2권(나남 1991), 문경자 역.
정재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살림 1996).
주)
*비약하면 전통적인 서양철학, 특히 근대에 있어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이 주체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들춰낸 것 조차도 크게는 주체철학의 확대라고 볼 수도 있다. 왜    냐하면 이전에 의식의 너머에 묻혀 있던 무의식이 부분적이나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무의식을 걸러내는 의식철학의 그믈망이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論語 衛靈公 第十五.
***갈 수 없는 고향   
    저  멀리 저 산 마루에  해 가 걸 리면
    쓸   쓸 한 내 맘에도  노 을이 지네

    물  결 따라 출 렁이는 그 리운 얼굴
    어   두 운 강 내음이 내 맘을 적 시네
 
    갈 수  없 는 그리운  그리운  내고 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 가  갈수 가 없네

199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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