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 핑크와 아도르노

영화 Film 2009. 5. 19. 09: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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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니 핑크>는 아마도 90년대 중반에 본 걸로 기억하는데, EBS에서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외양은 예전 청계천의 쓰러질듯한 아파트처럼 생긴 아파트의 옥상에서 무당으로 나오는 세입자가 추는 춤이다.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춘 곳에서 원시적인 무희가 전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낌을 일으킨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연은 이성이다'라는 결론적 명제를 <계몽의 변증법>에서 내렸다. 이때의 이성은 자연의 폭력을 이성이 전유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이다. 이성은 맹목적인 자연의 질서를 비켜가는 계략으로 자연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자연을 이성은 다시 재현시킨다. 잠자리의 모양과 비행방식을 모사해 전투헬기를 만드는 것은 이런 경우다. 이성은 모사를 통해 탁월하게 자연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지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타락한 자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성(Vernunft)을 협의의 이성, 곧 오성(Verstand)에 축소시켰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감성에서 받아들인 현상의 다양을 범주화시키는 것은 오성의 몫이다. 이성의 기능은, 이러한 범주화를 위한 선험적 법칙을 만드는 것인데, 이 법칙은 결코 자연 혹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도 이성이 만든 법칙을 자연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능은 바로 통제적 사용이다. 이성은 법칙을 창안하지만, 이 법칙은 무한한 자연 앞에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칙은 언제나 그 변경이 개방되어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은 세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미학, 윤리의 경로다. 주술은 미학에 가깝다. 물론 이 세 경로는 혼용이 될 수 있지만 혼동이 되서는 곤란하다. 애인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의 유전자가 잘못되어 있다'는 판단은, 아무리 의학적 관찰에 기반했더라도 잘못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은 사물을 대하듯 인간을 대하는 풍조가 있는듯 하다. 이성의 통제적 사용보다는 이성의 통압적 사용이 사회를 질식시키는 듯한 질서를 부여한다. 이런 곳에서 주술의 힘은 바로 인간의 시원적 본성을 선명하게 부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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