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변증법

헤겔 Hegel 2007. 6. 29. 14: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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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대논리학>과 <엔치클로페디>에 가기 전까지, 즉 <정신현상학>이 처음 출판된 1807년의 청년 헤겔에게 변증법은 우선 정신이 역사로 외화되어 가는 운동의  형태로 제시된다. 변증법(dialectic)이란 용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도 이미 보이지만, 아리스토렐레스가 마련한 일반논리학에 선험적 변증론을 도입시킴으로써, 논리학을 현상과 조응해 생동하는 학으로 만든 것은, 비단 김나지움의 교장시절 15세 미만 학생들의 논리 교육을 위해 교재를 고안했던 헤겔 뿐만 아니라 칸트였다. 그러나 이런 단계적 교양의 발전(페달로그)을 위해 논리학을 재정비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는 의식의 발생과 운동을 설명하는 현상학적 설명과 이 의식이 발현된 장인 역사에서 변증법적 운동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드러난다. 비유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이 변증법은 싸움의 양상을 띤다. 원래 있는 상태로의 의식(an sich)은 아직은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 für sich)시킬 수 없는 상태이지만, 고양된 정신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잠재해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결코 저절로 실현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의식에 스스로 대적함으로써만 그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겨루는 힘겨운 싸움은 소모적이다. 이것이 계속 싸움으로만 지속된다면, 그것은 정신의 본래 궤도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이제는 의식과 자기 의식의 대립을 화해시켜 주는 매개의 기능이 필요하며, 이 기능에 의해 비로서 이성의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그런데 청년 헤겔에게 이 자기 인식의 도달은 완결된 것이 아니었다. 의식의 변증법에서 종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의식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다. 정신의 모든 과정을 섭렵해 가는 사유의 여정은 무한하지만, 그렇다고 무한에 정신을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 삶에 대한 유의미한 설명, 제한적 의미가 없다면 회의주의의 심연에 빠지고 말 것이다. 즉, 1차원인 선분을 구성하는 점들과 2차원인 평면을 구성하는 점들이 무한히 일대일 대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선분과 평면의 구분이 사라진다는 역설에 도달한 칸토어처럼 나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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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설치다 꿈을 꾸었는데, 몇 개의 간판이 걸린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나머지 간판은 기억이 나지 않고, 한 가지는 뚜렷하다. "칸트와 헤겔 없는 세상 살만하다!" 뭐 이런 정도다. 아직까지 헤겔은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고,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헤메고 있다 보니 이런 꿈도 산출하나 보다.    

이 꿈을 해몽한다기 보다는, 이 꿈에 관해 생각해 본다. 칸트와 헤겔은 무엇 때문에 읽으려고 하는가? 단순히 교양으로 읽는다고 하기엔, 이들 노작의 전집 규모는 무시무시해 보인다. 분명히 교양서적류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유체계를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인가? 즉 그들의 사유체계에 동화하려는 것인가?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단지 참고서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즉 그들 텍스트의 험난한 지절들에 빠져 들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동화될려고 공부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사유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나의 뇌에 다운로드되어 실행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생각이 물질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사유체계는 현실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표가 아닐까? 그들의 사유에 격류를 쏟아 부은 현실이 여전히 오늘에도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공유되면서도 이제는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서 있는 지점들은 무엇인가? 관점에 따라 이에 대한 판단도 상이하겠지만, 나에겐 아직도 유효한 지점들이 산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기독교의 문제가 그렇다. 헤겔의 실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한국 기독교에 적용 가능하다. 명제의 명료한 해석과 비판을 위해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과 변증론은 아직도 분석철학에서 동원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는 철학을 배우기 보다는, 철학하기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하기란 비판적 언어 활동이다. 이성은 사태를 엄정히 판단하도록 사유의 법정을 주관하는 재판관이다. 헤겔은 칸트의 이성이 매우 협소하다고 보면서, 그것을 주관에 한정된 의식의 활동이라고 규정하지만, 의식을 초월해 전개해 나가는 이성의 자기 활동으로서의 정신은 그 기원과 추진동인을 칸트에게서 빌려 왔다. 즉 칸트가 이성을 존재론까지 전개시켜 나가지 못한 작업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 즉 독일 관념론의 극점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예나시절 헤겔에게 이 작업을 위한 매개는 피히테와 셸링이 마련해 주었다).  

분명 칸트와 헤겔을 모르더라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헤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그냥 있는데로(감성적 확신의 단계인 직접성Unmittelbarkeit의 단계) 가는 生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런 난해한 서구의 철학자를 들먹일 게 아니라, 우리의 것에서 사상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지구적인 환경문제, 민주주의의 원칙을 집어 삼키는 자본의 운동, 여성 및 장애인,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생태적 각성과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며 동학을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칸트는 실천적 이성의 역할에 혁명적 기대를 걸었다. 그는 이론 이성에 분명한 한계를 규정하면서도 실천 이성에 경험 너머의 가능성을 명시했다.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와 같이 이론 이성이 다룰 수 없는 선험적 명제와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의 대상도 선험적인 것이다. 즉 실천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경험적 제한도 없다. 이렇듯 선구적인 실천적 지식인의 실천은 이미 설명되 있는 것이다.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행력이다. 튀빙겐과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청년 헤겔 또한 이 실행의 문제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맑스처럼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칸트 보다는 현실 문제에 더 개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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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범위에 제한된 컴퓨터 설계

책들 Bücher 2007. 6. 21. 11: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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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컴퓨터 구조 원리, Miles J. Murdocca ; Vincent P. Heuring [공저], 김성천 ...[공]역(서울 :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 , 2001)

이 책만큼 컴퓨터의 본질에 관해 명확하게 설명한 책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언어에 관해 비슷한 방식의 책은 많이 들여다 봤어도, 컴퓨터의 근본원리를 저수준의 데이터형에서 차근차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사례와 예제를 제시하는 이 책은 , 전공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흔히 컴퓨터의 설계와 구조(혹은 구성)란 말을 쓸 때, 설계는 소프트웨어적 설계를 의미하며 구조는 하드웨적 부품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설계가 중요한 것은, 아무리 능력이 증대된 컴퓨터라 하더라도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 세계에서 실수의 범위는 무한한 반면, 어떠한 고집적 반도체를 사용한다 해도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는 무한할 수 없다. 이건 정수나 자연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무한에 관한 문제는 이렇게 쉽게 얘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해 글을 작성해 보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수의 크기가 컴퓨터 설계에 중요하게 다뤄지느냐는 의문이 들 것이지만,  이건 간단하다.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문자, 영상, 음성 등 모든 매체는 궁극적으로 전류의 흐름과 차단을 제어하는 저수준 언어의 표상인 0과 1이라는 이진수에 의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가 증대되는 것은 그만큼 표현능력이 증대된다는 것이고, 이건 컴퓨터의 능력(메모리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얼마전 전자신문의 특집란에서 네트웍의 트래픽 저하 문제도 프로그램적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기사를 봤다. 프로그램으로 트래픽을 제어한다는 것은 프로그램 상에서 유한한 수의 범위, 정밀도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 기사는 아래에 있다).

1991년 이라크를 상대로 한 미국의 이른바 '폭풍의 사막 작전'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어체제는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패트리어트 방어 시스템이란게 결국 레이다와 미사일을 결합한 미사일 이동기지에 다름아니다. 패트리어트의 레이다 빔이 발사되어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방어망에 걸려들면, 패트리어트에서 요격 미사일을 발사해 스커드 미사일을 격추시키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컴퓨터 설계의 문제가 발생했다. 시스템 상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속도는 실수 범위에 들어가 있었지만, 패트리어트 시스템의 내부 시간의 클록은 정수범위라서 오버플로우*가 발생해 스커드 미사일을 잡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 관한 설명이 짧게 나와서 제대로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프로그래머가 예제 프로그램을 컴파일러로 돌려 볼때, 오버플로우가 발생하면 아주 웃긴 결과과 발생하는 것을 봤을 때, 어느 정도 납득이 갈만한 이야기다.

*오버플로우 : 실제 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를 넘어선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유효한 산술의 결합법칙인 (a+b)-c=a+(b-c)과 같은 경우가 컴퓨터에선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컴터가 다룰 수 있는 수의 범위가 -7~9라고 한다면, (8+1)-9=0 의 경우는 컴터가 다룰 수 있지만 8+(1-9)=0에서 오버플로우가 발생해 오류가 된다. (1-9)= -8이 되므로 한정된 수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 기사 "웹트래픽 정체 확 뚫린다"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개념을 활용해 웹 트래픽의 정체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됐다. 미국 렌슬러 폴리테크닉 연구소의 크리스 카로더스 교수는 최근 미 국립과학재단(NSF) 수상논문에서 ‘리버스 컴퓨테이션(Reverse Computation)’을 적용, 웹을 지금보다 6배 이상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란 기존의 프로그램을 거꾸로 분석해 설계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추출, 기술향상 등을 추구하는 프로그램 행위다. 카로더스 교수의 리버스 컴퓨테이션 역시 네트워크 시뮬레이션과 모델링을 역으로 적용하는 등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말그대로 컴퓨테이션 과정을 거꾸로 적용해봤다”고 밝혔다. 코드를 데이터로 바꿔 본 것이다. 그는 이런 실험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카로더스 교수는 리버스 컴퓨테이션이 인터넷 등 네트워크 트래픽 정체에 대해 현재의 접근방식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이 기술은 사물을 ‘느슨하게’ 해주며 모든 프로세서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시뮬레이션해 소요되는 메모리의 크기를 미리 줄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웹트래픽 역시 6분의 1로 줄어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리버스 컴퓨테이션을 이용하면 정체를 빚어내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체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고 밝혔다.
 카로더스 교수는 “리버스 기술을 사용하면 현재의 네트워크 설계 및 경험의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갖고 있는 추론 이상의 추론이 가능하다”고 이 기술의 강점을 강조했다. 그는 다만 이 기술을 사용해도 네트워크 정체가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정체의 원인을 찾기가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 신문게재일자 : 2002/02/16

***2002년 초에 작성된 것을 일부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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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위의 궁전

책들 Bücher 2007. 6. 14. 15: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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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솔로몬의 노래』, 김선형 옮김

이 책은 노벨 문학상을 탄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라는 빛바랜 찬사에 부족함이 없는 서사적 감동을 제시하는 면에서 오에 겐자부로를 연상시킨다. 짧지만은 않은 긴 호흡을 요구하는 분량의 소설이지만 감각적인 문장들이 정신을 번쩍들게 하는 묘한 마력도 있다. 그러나 시적 감수성과 감각적 표현력의 배후에서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흔적들이 역사가 되어 모리슨의 작품에 장중히 흘러오고 있다. 그것은 고통의 기억을 떠안은 흑인들의 삶을 끌어안으면서 이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절규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밀크맨은 솔로몬의 증손이다. 솔로몬의 아들인 메이컨 데드1세는 해방노예로서  땅을 임대해서 놀랄만한 노력과 재능으로 자기 땅을 사고 농지를 확장해 갔지만 백인들에게 린치를 당해 죽는다. 그들 앞에서 흑인 주제에 제 농장을 경영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이 살인에 대한 재판이란 것도 없었고 시체는 강물로 그대로 유기된다. 그의 아들인 메이컨 데드 2세와 산고의 고통으로 죽어버린 어머니의 자궁을 헤치고 나온 여동생 파일러트는 백인들의 폭력을 피해 떠나 버린다. 세월이 흘러 메이컨 데드는 부동산 임대업자로 자수성가하고 파일러트는 미 전역을 떠돌다가 당시로선 금지된 사설 밀주업을 하며 오빠와 같은 버지니아의 한 동네에서 정착하게 되지만 원수처럼 서로 적대시한다. 이들이 사는 도시의 낫닥터 스트리트란 곳에서 유일한 흑인의사의 딸로 태어나 메이컨 데드와 결혼한 루스는 아이 둘을 낳은 이후  남편과 쌓인 오해로 오랜 세월동안 독수공방하다가 파일러트의 계략으로 밀크맨을 임신하게 된다. 이렇게 뭔가 정상적일 수 없는, 그러면서도 흑인으로서는 부족할 바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밀크맨은 이와같이 비틀린 성난 격정에 휩싸인 현재의 가족을 있게 한 과거로 추적해 들어간다. 그곳에는 가족이 뿌리채 뽑혀질 정도로 재난을 당한 가족사가 있으며 그 너머에는 이미 신대륙에서 벌어진 원초적 살육에 희생된 인디언의 전설이 있었다. 밀크맨이 할아버지가 살던 땅을 밟아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본 가을빛 풍경들은 핏빛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건,,북아메리카의 지명뒤에는 수많은 인디언 전사들의 죽음이 묻혀 있는 것이다.

글자를 모르는 증조부에게 연방군의 술주정이 양키가 생각없이 끄적거린 메이컨 데드란 황당한 이름을 데드(dead) 일가가 지키며 그들의 삶을 개척해 가는 모습은 핍박받는 비탄의 삶을 기이하면서도 숭고하게 승화시키는 의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이들의 고통은 노래되면서 망각의 안온함을 조용히 흔들어 깨울 것이다.

200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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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책들 Bücher 2007. 6. 12. 10: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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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정창 옮김

이소설은 놀라운 흡입력으로 짧은 시간에 독자를 끌어 들여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읽기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게 아쉬워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종반부를 며칠 동안 보지 않고 내버려 두게 한다. 암삵쾡이와의 사활을 걸고 벌이는 대결은 마치『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킨다. 괴범한 크기의 참치를 놓고 상어떼와 일전을 벌이는 노인에게 이 물고기들은 잔뼈굵은 바다 사람인 노인의 빈곤한 상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광막한 바다라는 또다른 생존조건에서 건져올린 먹이를 지켜내기 위한 노인의 처절한 의지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저 바다 노인 보다는 섬세하게 동물을 본다. 인간 못지 않게 영리하면서도 영묘하다는 투사를 동물에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연애소설을 많이 읽은 탓인가 보다.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서도 원시사회를 상이하게 보는 시각 하나가 있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연원하는 원시인에 대한 주도적 시각은 원시사회가 결핍사회라는 것이다. 결핍의 내용은  문명사회의 근간으로 이해되는 생산 잉여와 국가기구이다. 이 지점을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마치 원시인들이 생산 잉여를 내기위한 축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로인해 권력이 생길 수 없으며, 권력 자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을 넘어서는 비균등 생산활동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과연 원시인들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 그중에서도 서구인에게로 전유된 사유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클라스트르는 원시인에게 과도한 투사를 덧씌운 것인가?

세풀베다가 그려내는 노인은 적어도 근거없어 동물에게 인간의 감정을 덧씌운 것으로 읽혀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이 이름만 한 30자가 넘는  그의 아내를 잃어 버리고 아마존 밀림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수아족과 함께 사는 동안 느낀 것은, 사람은 밀림이라는 이 먹이구조에서 제일 정상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다. 개미에게 아직 살아있는 살덩어리를 내어던지며 죽음을 맞이 하는 독특한 의식은 이 자각의 한 실례일 뿐이다.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공생할 줄 아는 아마존 원주민과 헤어지고 마을로 내려운 노인이 나머지 여생의 은밀하면서도 진중한 위안거리로 삼은 것이 바로 연애소설 읽기이다. 직업의 굴레에 묶여 웬종일 노동하며 지내는 생활을 조롱하면서 자원을 모으진 않아도 자연과 더불어 풍족하게 살아갈 줄 아는 원주민에게 배운 생활습관대로 노인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따로 틀에 박힌 일은 필요없다. 징그러울 정도로 비가 그치지 않는 우기에도 물이 세지 않도록 지은 오두막에 기거하면서 배가 고프면 강에 나가 새우를 잡아와 튀기거나 삶아 먹고, 필요한 소금이나 술은 밀림에서 잡은 원숭이나 앵무새로 맞교환하면 된다. 밀림은 생계의 터전이자 극도로 여유로운 게으름의 근원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연애소설을 읽는 '특권'(?)이 생긴다. 그러나 문제는 일어난다. 노인도 그런 경우였지만, 밀림을 개간해 농지로 전환하도록 촉구하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밀려오는 이주민과 함께 밀림의 희귀물을 긁어 모으려고 오는 노다지꾼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도록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밀림을 갉아 먹으면서 노인의 연애소설 읽기는 곤경에 처한다.

참고 문헌 : 장 프랑수와 스키립차크,『오늘을 위한 프랑스 사상가들』, 이상률 옮김


200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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