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an Melville, The Piazza(1)

번역 Übersetzung 2010. 3. 14. 20: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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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꼿들을,
여름이 지속되고 내가 여기 사는 동안, 피델리에게"

내가 이 동네로 이사왔을 때, 오래된 양식의 농가에 살게 됐는데, 여기엔 베란다가 없었다. 이것은 더욱 유감스러운 결핍이었는데, 왜냐하면 내부의 쾌적함과 외부의 자유과 결합된 공간인 베란다를 내가 좋아하고, 이곳에 놓아 둔 온도계로 눈금을 보는 일이 즐거운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동네가 펼쳐 보였던 그림같은 풍경 때문이었다. 열매가 익는 시기에 어떤 아이도 도처에 세워진 이젤에 다가오지 않고서는 언덕에 오르거나 골짜기를 건널 수 없었을 정도로, 태양에 그을린 화가들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화가들의 천국이었다.  산들의 원형(circle)은 별들의 원형을 자른다. 어쨌든, 집에서는 이렇게 보이지만,  일단 산에 올라서 보면 이것들의 아무런 원형도 볼 수 없다. 이 지역이 5로드(약 125평방미터)로 걸러진다면, 이 매혹적인 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Had the site been chosen five rods off, this charmed ring would not have been.

집은 낡았다. 70년간 노변 채석구릉(the Hearth Stone Hills)의 중심에서 그들은 카바(Kaaba), 또는 성석(聖石)을 떠냈는데, 이곳에는 추수감사절 때마다 단체 순례객들이 방문하곤 했다. 그렇게도 오래 전에, 바닥을 파헤치다가 인부들은 지하 부분에 있는 혈거족-이제는, 나의 양귀비 화단에서부터 미끄러지며 길게 펼쳐진 잠자는 목초지의 경사면에 진을 치고 있는 강인한 나무들의 강인한 뿌리들-과 싸우려고 삽과 도끼를 사용했다. 그렇게 얽혀진 나무들 가운데서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종일관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외로이 우뚝 서 있는 느릅나무였다.      

누가 이 집을 지었더라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지었을 것이다. 아니면 하늘 꼭대기에 있는 오리온좌가 자신에게 겨눠진 데모클레스의 칼을 별 밝은 밤에 번쩍이며 "저기에 지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창조자의 정신에 잠입해서 그러한 화려한 계획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나? For how, otherwise, being made, such a purple prospect would be his? - nothing less than Greylock, with all his hills about him, like Charlemagne among his peers.
 

텍스트 : The Complete Shorter Fiction(Everyman's Library, 1997)

*애매한 해석 부분은 원문을 병행시켰습니다. 번역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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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없는 불행』외

책들 Bücher 2010. 3. 12. 06: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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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 전. 아침 7시인줄 알고 일어나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알았다. 6시 였다. 그래서 잠깐의 시간이 나서 어제 마져 읽은 한트케의 책에 대해 짧은 서평, 아니 단상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에 따르면 한트케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 한트케는 고전주의 작가처럼 마치 신이나 점쟁이라도 된듯이 작중인물의 영혼을 관통해 가며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대상화시킨다. 단,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은 예외다. 이 부분은 아마도 작가가 어머니와 오랜 세월 나눌 수 밖에 없었던 대화에 기반한 것으로서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 실린 <아이 이야기>의 경우는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다 보는 시선과 느낌이 보인다. 도대체 아이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세심함이 남자에게 가능할까?  

이 책의 페이지를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내게 어떤 일이 있었다. 그 다음날 하루종일 책이 눈에 안들오다가 퇴근 전철길에서 겨우 책을 들었다. 많은 눈들이 우글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딪칠 수 있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불안과 기대가 교차됐다. 이 책의 제목처럼, 소망은 아름답지만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불행이 있다. 하지만 소망마져 없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이다. 욕망의 끊임없는 생산을 위한 전략적 서술은 『천 개의 고원』을 이룬다. 다종다양한 고원, 상이한 능력들, 이질적인 세포체들을 단일한 조직, 유일신적인 중심축(pivot)으로 재단하는 획일화의 욕구에 대항하는 기점이 준비된다. 이런 점에서, 김예슬의 행동은 존경스럽다.      

페터 한트케,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Kindergeschichte  윤용호 역(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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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아이들

단상 Vorstelltung 2010. 3. 7. 14:4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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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품앗이 육아를 하는 이웃집 아이들과 함께 서종면에 다녀왔다. 운전하는 차에서 아이들이 지르는 괴성에 괜히 나왔다 싶었는데, 추운 날씨 속에서도 텅빈 운동장에서 맘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기쁨을 느꼈다.  요즘 보고 있는 한트케의 책은 한편의 진중한 육아일기다. 육아는 마치 들뤼즈가 말하는 리좀처럼, 관계망을 넓혀 가면서 전혀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오래된 나무의 맨끝 생장점에서 뿌리까지 연결된 개체라기 보다는, 이 생장점에서 전혀 새로운 개체로 건너뛸 준비를 하고 있는, 그래서 초인의 비유로 나타나는 종족이 아닐까?



"아이는 놀고 그 남자는 작업을 하면서도 전처럼 힘닿는 대로 자리를 함께해 서로의 대화상대가 될 것인가? 그러면서도 <아이>는 아이답게 굴고 <어른>은 수준을 낮추지 않아도 될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이란 우선 같은 또래들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옳고, 그래야만 고통과 부당함을 겪으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종족이었던가? 그래야만 비로서 그 <동족들>은 나름대로 동아리를 형성하고 어른은 잘해 봐야 단순한 보호자가 되는게 아니었을까?...한때는 자신도 단체 생활에 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개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자기 같은 사람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자의에 의해, 작으나마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페터 한트케, <아이 이야기>Kindergeschichte in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p.126.

"혼자 있거나 우연히 두어 명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정해진, 보다 큰 집단 속에 있는 아이를 보게 되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아이들이 많은 집단에 속하게 되자 아이는 즉각 조용한 아이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공포에 떠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엾은 아이로 변해갔다...ㅣ 게다가 많은 아이들이, 가장 어린 꼬마까지도 서로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한 아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다 <순진무구한 건> 아니었다"

상동, 129-130.

"아이는 혼자 있었던 때보다 눈에 띄게 생기를 얻었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몸의 관절과 머리칼을 움직였고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책임자인 그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원래대로 내버려두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이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위해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함께 있을 때 그들 모두를 끌어모으는 힘으로서, 이상적으로 투입된 에너지로서 효과를 냈다."

상동,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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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벌판으로 달리는 회전목마

문학 Literatur 2010. 3. 5. 08: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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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육아서의 첫장 제목은 '육아는 과학이다'로 되어있다. 침대광고를 패러디한 이 건조한 제목은 인간이 과학의 전형적인 연구대상임을 드러낸다. 인간이 신경망을 갖춘 복잡한 기계로 환원될 수 있다면, 이 동물의 미시적 체내 어딘가에 의식의 생성소가 있을까? 전철에서 잠시 눈을 붙이며 생각이 난다. 의식이 물질이라면, 신체의 죽음은 마치 컴퓨터의 전원이 나가는 것처럼 의식을 오프시키는가? 이 물음에 재래적으로 매달려 온 것이 종교이며, 그 극단은 불교이다. 

"그애는 다른 사람들과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피붙이였고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리지만 고요한 눈에서 순간적으로 나오는 영원한 우정의 시선을 맞아들인다...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아이는 혼자 회전 목마 위에 앉ㅣ 아 있었다. 그 목마의 가장자리에는 모래톱에서처럼 하얀 거품이 일었다. 이제 막 비가 그쳤다. 한번 밀자 회전 목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남자와 멀리 떨어지자 잠시 그를 올려다보고는 목마가 돌자 곧 잊어버리고 다른 것에 더 이상 눈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나중에 그 순간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의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을 회상했다. 그때 그는 좁은 방에 어머니와 함께 있기는 했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마치 하늘에까지 닿도록 소리지르고픈 먼 거리감을 느꼈었다. 그곳에 있던 어머니가 바로 이곳에 있는 나와 같지 않겠는가? 열중해서 돌고 있는 아이를 태운 회전 목마를 보고 있는 시선은 그때와는 정반대의 시선인 것이다. 그의 어린 딸이 처음으로 거기 서 있는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존재로 보인 것이다. 또한 그런 자유를 누리며 강해져야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는 왠지 득의양양함 같은 것이 빛났다...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페터 한트케, <아이 이야기>Kindergeschichte in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p.105-106.

*이 인용과 유사한 분위기의 시가 황지우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있다. 여기서 시인은 다섯살 난 딸아이에게 허접한 회전목마를 태워주며 간도까지 달리는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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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달그림자

문학 Literatur 2010. 3. 3. 04: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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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이 이틀 지났지만 그 위력의 자취는 여전한가 보다. Peter Handke(1942~)의 문장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긴 해도, 서늘한 서술에 감싸인 자귀에 희미하게 번뜩이는 섬광도 있다.  

뒤늦은 독서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이제 그녀는 독서하고 토론하는 데 열중했다가 돌연 새로운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책을 읽고 대화도 하니까 난 다시 젊어지는 것 같구나.>ㅣ
물론 그녀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과거의 이야기로 읽었을 뿐이었고 결코 미래를 향한 꿈으로 읽지는 않았다. 그녀는 책 속에서 자기가 놓아버렸고 이제는 결코 만회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찌감치 미래에 대한 어떤 생각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2의 청춘이란 자기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학은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터 한트케,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p.57-58.

"매일 죽도록 해봐야 자기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지쳐 그는 병들고 쇠약해졌다. 조는 듯하다가도 깨어나서 정말로 외로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부재중일 때에만 그 외로움에 답할 수 있었다."

상동, 60.

정치가의 본질
"정치가들은 다른 세계에 살았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해도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할 뿐이었다. <아무튼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치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다른 것은 혼자 힘으로 해결하거나 신(神)에게 맡겨야 했다. 어떤 정치가가 정말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면 그 사람은 이내 움츠러들 것이다. 그건 아첨에 지나지 않는 것일 테니까."

상동,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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