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책들 Bücher 2010. 1. 24. 13: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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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박영근 역, 민음사 2007, 419페이지). 오랜만에 읽어보는 지루한 고전이다. 무섭게 다작을 했던 작가에게 이 작품은 그의 관심대상인 사회처럼 거대한 톱니바퀴인 그의 작품전체(91편)의 한 부품일 뿐이다. 즉 이 고리오 영감이라는 <인간희극>의 단일 배역으로 나오는 이 장편은 발자크가 시도한 당대의 총체적 사회연구의 결과물인 대작 <인간희극>의 조연 배우 정도일 뿐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라스티냐크와 보르탱, 뉘싱겐 남작 등은 <인간희극>의 작품들에 재등장하는 다수 출연자이다.  

소설의 내용은 『리어왕』을 연상시킨다. 고리오 영감의 둘째 딸인 뉘싱겐 부인의 정부로 나오는 야심찬 법과 대학생 라스티냐크가 리어왕의 막내딸 역할을 한다. 수다스러운 인물묘사는 도스트예프스키를 연상시킨다. 아놀드 하우저의 지적대로 플롯은 엉성하지만, 거칠고 왕성한 집필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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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失格』을 어제 오늘에 걸쳐 읽었다. 책 뒤의 역자 해설이 뭔가 어설프지만, 수험생에게는 도움이 되나 보다. 분위기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연상시키지만, 호밀밭의  주인공만큼 당당하기는 커녕, 주늑들어 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익살로 분장한다.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세상과 결별한 다자이는 전후 일본 문학의 존경받는 작가로 평가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서 오는, 무사도적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외경도 한 몫을 한다. 이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直訴』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기독교에, 그 중에서도 공관복음에 심취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면모를 살짝  보여준다. 예수가 더 망가지기 전에 예수를 처단하도록 유다가 고발했다는 창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도 보이는 모티브다. 다자이가 일말의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젊은 시절 역시 퇴폐적 문학으로 이름을 날린 김승옥처럼 열렬 신자는 되지 않았더라도, 자살은 접지 않았을까. 다음 책을 봐야겠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한테는 그 얘기가 빤한 얘기로 느껴졌습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보다 더 끔직한 것이 있다. 욕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허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색(色)과 욕(慾), 이렇게 두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 보아도 부족한 그 무엇. 저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닌 묘한 괴담 비슷한 것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괴담에 잔뜩 겁먹은 저는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긍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새싹을 보고 희망의 기쁨을 느끼거나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거의 초등 수학 비슷한 이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우스꽝서러워서 제 익살로 [공산주의 독서] 모임의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르크스로 맺어진 친근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험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人間失格』, 김춘미 역(민음사, 2008), 50-51.

호리키가 시즈코에게 빌붙어 사는 요조에게 찾아와 스승처럼 거들먹거리며 하는 말.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ㅣ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상동, 92-93.

"저는 교바시 근처에 있는 스탠드바 2층에서 또다시 정부같은 처지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경을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상동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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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Sanctuary, 1931)

책들 Bücher 2010. 1. 15. 09:1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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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읽었다(이진준 역, 민음사 2009, 436페이지). 월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라는 이름을 어디서 본 듯 하여 두터운 책을 선뜻 선택했는데 읽기가 쉽지 않다. 책 뒷날개의 줄거리를 미리 봤다면 읽기에 좀더 편했을 테지만 의도적으로 읽지 않았다. 다 읽고 봤더니 완전 스포일러다. 포크너가 1950년대까지 생계를 위해 할리우드에 들락거리며 대본과 각색의 작업을 했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이 소설은 마치 시나리오같은 느낌이 든다. 인물과 배경에 대한 세부 묘사의 면에서 카메라에 정밀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이 카메라는 마치 술이나 약물을 복용한 것처럼 뭔가 뒤틀리고 혼탁하다. 모더니즘의 문체를 파괴한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게 읽힌다는 뜻이다.

1920년대 가공의 미국 남부 촌락인 잭슨과 멤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오늘날로 보면 신문의 사회면에 짤막하게 실릴 사회병리의 하나 정도라는 충격을 준다. 당시엔 사디즘 문학으로 평가되었다고 하지만, 포크너는 전반부에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후반부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사실 묘사 보다는 인물들의 행위에서 유추한 심리묘사에 집중한 것이다. 인칭에 대한 표현도 뒤죽박죽이라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는건지 의심스러울 정도고 어떤 사실인지(예를 들어 레드와 포파이가 미스 레바의 사창굴에서 했던 일)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뭔가 정형화되고 분명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의미보다는 굴절되고 마비되고 뒤엉킨 남부의 현실을 반영한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비교하면, 시종일관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다. 

역자는 포크너 소설의 중심무대인 잭슨시가 가공의 도시라고 했는데, 미시시피에는 실제로 잭슨시가 있다. . 1950년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삶을 개척해 가는 흑인들이 그려지지만, 『성역』에서는 도착적인 백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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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벌의 트러스트

단상 Vorstelltung 2010. 1. 11. 17: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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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건희가 라스베가스에서 한국민에게 "각 분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마피아 두목이 만찬회에서 몽둥이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 같다. 국민경제를 좌우하는 거대기업의 수장으로서 이 정도 만용도 못부릴 것은 없다는 투다. 물려 받은 가업, 정권의 보호 아래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족벌 트러스트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하는 말에는 어떤 섬뜩한 기분이 든다. 블러드크러시를 중심으로 플루토크러시와 테크노크러시의 삼자동맹에서 저런 황당한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삼성이 방구뀌면 너희들 어떻게 되는줄 알아? 라는 협박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건희의 저 발언은 한국, 아니 한반도를 규정하는 주류집단의 심급은 족벌 트러스트임을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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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을 읽고

문학 Literatur 2010. 1. 10. 18:2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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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 이후 체크한 구절을 옮긴다.
 
"우리 생애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가망도 없고. 우린 죽은 몸이야. 우리의 진정한 삶은 미래에 있어. 우린 그때 한줌의 먼지와 몇 개의 뼈다귀로 변해 있겠지. 그러나 그 미래가 얼마 후일까는 알 수 없어. 몇 천 년이 걸릴는지. 현재로서는 조금씩조금씩 올바른 정신을 넓혀 가는 것뿐이야. 집단행위를 할 수 없어. 우린 우리의 지식을 개인에서 개인으로,ㅣ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줄 수 있을 뿐이야."

『1984년』, 184-5.

한 순간에 오세아니와의 교전국이 유라시아에서 이스트아시로 바뀌는 텔레스크린의 낭보를 들으며 윈스턴이 하는 말.
"대상이 바뀐 것 외에는 '증오'는 전과 똑같이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동, 190.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가 내부당원인 오브라이언에거서 받은 골드스타인의 "과두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 중

"일률적인 부의 증가는 계급사회를 파괴할 위험(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가 파괴다)을 초래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먹고 목욕탕과 냉장고가 있는 집에서 살며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갖는 세상에서는 불평등이라는 가장 명박하고 중요한 사회구조가 붕괴한다. 부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 소유와 사치라는 의미에서 부가 공평히 분배되는 한편 권력은 소수 특권계급이 장악하는 사회를 물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회는 장기간 안정적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안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향유된다면 빈곤으로 우매해야 정상적일 대중들이 점점 깨이고 혼자 사색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고 보면 조만간, 소수의 특권층은 특권적이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아 계급사회[상중하의 3계급]는 가난과 무지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 20세기 초의 몇 사상가들이 꿈꾸듯 과거의 농업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제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거의 전세계를 통해 준본능이 되ㅣ 다시피 한 기계화 경향과 맞지 않을 뿐더러 공업에서의 후진국가는 군사적으로 무력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선진국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상동, 197-8)

"문제는 세계의 부를 실제적으로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재화는 생산되야 하지만 분배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 계속적인 전쟁이다."(상동, 198)

"전쟁은 잉여 소비재를 소모시키고 계급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형성한다...우리 시대에는 결코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지배집단의 그 백성에 대한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반항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있다."(상동, 205)

오브라이언이 줄리엣과 함께 체포되어 개조를 당하는 스미스에게 설명하는 권력의 본질

"옛날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마저 비열하고 위선적이지.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이 그 방법에서는 우리와 극히 비슷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자인할 용기가 없었어. 그들은 마지못해, 그리고 잠시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머지 않아 인간이 자유스럽고 평등한 천국이 오리라고 그들은 가식, 아니 믿고 있었지. 우리는 그렇지 않아. 누구든 권력을 장악할 때는 그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야. 권력은 수단이 아니야. 목적 그 자체지.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 독재를 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 혁명을 하는 법이야. 박해의 목적은 박해야.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그처럼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상동,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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