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로 트랙백이 안된다. 다음 글을 읽고 쓴 글이다. http://blog.naver.com/piaomh/2010338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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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änomenologie des Geistes
Hegel Gesammelte Werke9(Felix Meiner, 1980)
Einleitung
*여기에 올리는 번역은 저의 원전 해석을 바탕으로 일어역본(樫山欽四郞, 2009)과 한글역본(임석진, 1995)을 참조해 올린 것입니다. 한글 번역문으로 이해하기에는 임석진의 2005년 개역본이 아무래도 신뢰할 만하다고 봅니다. 저의 번역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학습의 도구일 뿐이며, 이 번역의 신뢰도는 원문과 번역문의 대조를 통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가다가 혹시 멈출지라도, 일단 대장정의 첫발을 놓습니다.
Es ist eine nätürlich Vorstellung, daß eh in der Philosophie an die Sache selbst, nemlich an das wirkliche Erkennen dessen, was in Wahrheit ist, gegangen wird, es nothwendig sey, vorher über das Erkennen sich zu verständigen, das als das Werkzeug, wodurch man des Absoluten sich bemächtige, oder das Mittel, durch welches hindurch man es erblicke, betrachet wird.
철학에서 문제로 삼는 것, 즉 참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실재적 인식에 착수하기 전에, 절대자를 자기 것으로 하는 도구 혹은 절대자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관한 인식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당연히 생각되고 있다.
Die Besorgniß scheint gerecht, theils daß es verschiedene Arten der Erkenntniß geben, und darunter eine geschickter als eine andere zur Erreichung dieses Endzwecks seyn möchte, hiemit durch falsche Wahl unter ihnen,-theils auch daß, indem das Erkennen ein Vermögen von bestimmter Art und Umfange ist, ohne die genauere Bestimmung seiner Natur und Gräntze, Wolken des Irrthums statt des Himmels der Wahrheit erfaßt werden.
한편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인식이 있고, 그 최종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다양한 인식 중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적당하지 않을까, 그래서 거기엔 잘못된 선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또 한편으로는 인식이 일정한 종류와 범위를 갖춘 능력인데, 인식의 본성과 범위를 정확히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진리의 천상 대신에 오류의 먹구름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정당해 보인다.
『달과 6펜스』, p.27.
"문명인이란 참으로 이상한 관습을 생각해 내어 짧은 인생을 이런 따분한 일에 낭비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파티를 보고 있자니, 여주인이 왜 굳이 힘들여 손님을 청하며, 손님들은 왜 굳이 힘들여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두 열 멸이었다. 다들 무심하게 만나서 안도감을 느끼며 헤어진다. 이것은 물론 순전히 사교적인 모임이었다. 스트릭랜드 부부는 별 관심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녁 식사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초대했으며, 그들은 초대를 수락했던 것이다. 왜? 부부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 따분하니까."
상동, p.32.
"수많은 부부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산다[안온한 부모가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고 늙어서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생의 보람을 누리는 삶].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 무렵에도 강했던 내 타고난 기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나도 그런 삶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잘 정돈된 행복이 있었다. 하지만 내 혈기는 좀더 거친 삶의 방식을 원했다. 그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무엇인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는 더 모험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험한 암초와 무서운 여울도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상동, p.36.
"토요일 오후, 횡성과 둔내의 국도를 거쳐 영동고속도로에 진입해 동해에 갔다. 둔내로 넘어가는 횡재를 어두운 밤에 넘고 싶지 않았는데, 횡재를 올라갈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산속에서 선명하게 잡히는 배철수를 듣고 있었는데, 서머셋 모옴은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여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서, 배철수 자신은 그런 사람이 못되 여행을 해야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밤길이 여행을 가는 길은 아니지만, 은근히 자랑으로 들렸다."
오늘, 모옴의 『달과 6펜스』를 읽기 시작했는데, 독창적인 소설형식이면서도 진중하면서도 매끄러운 서술이 돋보인다. 그의 작가론은 성공보다는 유희를 지향한다.
"어떤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봐야 한철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 책을 산 독자에게 그저 몇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또는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애를 썼으며,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하였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구상에 고심한 책도 많다. 심지어는 평생의 노고를 바친 책들도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ㅣ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송무 역(민음사, 2008, 1판 31쇄), p.16-17.
이어지는 문장에서 모옴은 그 이유를 서술한다. 독창성이란게 얼마나 기만적인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소란을 떨면서, 이제 문을 노크하는 일 따위는 걷어치우고 함부로 들어와 우리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사방이 그들의 고함소리로 시끄럽다. 나이든 사람 가운데에는 젊은이들의 괴이한 짓을 흉내내면서 자기네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애써 믿으려는 이들이 있다...그들은 가버린 청춘의 꿈을 되살릴 수 있을까 하여 눈썹도 그려보고, 분도 발라보고, 화장도 덕지덕지 해보고, 흥겹게 떠들며 놀아보는 가련한 바람둥이 여자같다. 지혜로운 이들은 점잖게 자기들의 길을 간다. 그들의 그윽한 미소에는 너그러우면서도 차거운 비웃음이 깃들여 있다. 그들은 자기들 역시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소란스럽게, 그들처럼 경멸감을 가지고 안일에 빠져 있던 구세대를 짓밟아왔던 일을 기억한다. 또한 지금 용감하게 횃불을 들고 앞장선 이들도 결국은 자기들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말하는 당사자에게는 잘못 새롭게 여겨지는 용감한 말도 알고 보면 그 이전에 똑같은 어조로 ㅣ 백 번도 더 되풀이되었던 말이다. 추는 항상 좌우로 흔들리고,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상동, p.17-18.
그러므로 모옴에게 경탄할 만한 젊은 시인들(키츠, 워즈워스)의 열정도 따분하게 여겨진다.
"『롤리타』속에는 어떤 도덕적 이끌림이란 게 없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예술(호기심, 부드러움, 친절, 황홀함)이 기준이 되는 다른 상태들과 어떻게든, 어디서든 연결된다. 그런 책들은 흔치 않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일회적 쓰레기거나 소위 사상을 담은 문학이다. 그런 것은 거대한 회반죽으로 나오는 화제성 쓰레기들로 누군가가 망치를 들고 ㅣ 나타나 발자크나 고리키, 토마스 만에 금을 낼 때까지 조심스례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롤리타』, p.428-429.
"어느 나라나, 사회 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상동, p.431.
『롤리타』는 외설시비로 1955년 파리에서 먼저 출판됐고, 미국에서는 1958년 뉴욕에서 출판됐다. 이 소설의 화자는 험버트이면서 나보코프이며, 험버트가 사살한 험버트의 동행범이자 극작가인 퀼티이기도 하다. 이런 영감은 스탠리 큐브릭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This, I said to myself, was the end of the ingenious play staged for me by Quilty"
상동, p.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