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서평

책들 Bücher 2010. 2. 10. 12:3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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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를 접으면서, 여기로 옮기지 못한 글이 많다. 모두 옮길 생각은 없고, 차근 차근 생각나는데로 옮긴다.  
 
휴머니즘의 다른 얼굴 :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커다란 폭력?

2006년 1월 14일~1월 28일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 Regeln für den
Menschenpark
(대중의 경멸 Verachtung der Massen,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 Über die Verbesserung der guten Nachricht), 이진우·박미애 옮김(2004, 한길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짜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중에서


휴머니즘과 이념형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15~16세기 발흥한 문예사조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서 휴머니즘을 볼 때, 근대 역사는 물론 현대의 일상적 어휘 속에 산재한 휴머니즘을 베버식의 이념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왜냐하면 이념형(Ideal Type)은 결과로서 주어진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인데, 이 개념에 휴머니즘을 적용하기에는 이 주의가 지시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교도 정신이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한 경험주의적 문화과학의 첫 결실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전제된 이념형이 금욕주의였던 것처럼, 하나의 이념형은 단지 경제 질서라는 하부구조 위에 놓인 정신적 구조물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된 구체적 사회를 이해해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적 실마리, 방법론적 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어떠한가? 기독교를 필두로 한 금욕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민주주의, 동학, 유교,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양의 탈로 장식된 자본주의마저도 인본주의적 성격, 인간주의적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모든 주의들이  최소한 휴머니즘의 변종(變種)이라도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주의라는 표어가 두드러지게 부각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시민 보다 높아지려는 사람들의 목을 치는 단두대 처형이 만연하기 전, 천부인권을 근거로 자유·평등·박애를 외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와 같이−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인간주의는 너무도 포괄적이어서, 소박하게 좋은 뜻으로  사용해 쉽게 주어에 연결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술어에 가깝다. 마치 골고루(전 역사를 통틀어) 퍼져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 1부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은 원래 슬로터다이크가 1997년 여름 바젤-엘마에서 연속적으로 행한 강연문인데, 이 강연의 후폭풍이 2년 후 독일의 공론영역을 뒤흔들 정도로 논란을 일으킨 글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전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까지 이 논쟁에 가세해 대결할 정도로 ‘악명’을 높이고 현재 독일 학계에서 각광받는 '철학자'로 자리잡은 슬로터다이크는 이 휴머니즘이란 오랜 표어를 놓고 전면전을 펼친다. 그에게 이렇게도 낡고 공허한 인간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싸울 만한 주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공격은 피아가 불분명한 전선의 연막 속에서 무작위적으로 행하는 발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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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을 읽으려 한다. 텍스트는 펠릭스 마이너 판 원서를 기반으로 하면서 일어 번역본을 병행한다. 두 언어에 정통하지 않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한글 번역본으로 『정신현상학』을 공부하는 것 보다는 여러모로 흥미를 돋군다. 일단 알라딘에서 『정신현상학』의 일어 번역본을 검색해 보니  樫山欽四郞 역, 平凡社ライブラリー(200)가 눈에 띈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독해를  원전과 한글 번역본을 오고가며 읽는데, 직장인이란 핑계로 3년이나 걸렸다. 원전을 다른 언어를 참조해 완독을 하려 한다면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외부를 통해 내부의 의미가 드러나듯, 다른 언어를 관통해 내 언어에 침전할 수 있다.  

일단 독해는 일어 역서가 도착하는 다음주부터 가능하겠다. 혼자 읽어 나가지만, 중간 중간에 그 과정을 이 블로그에 공유해 나갈 생각이다.   

Ich versuch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zu lesen. Der Text basiert auf der Anwendung von Felix Minor mit einer japanischen Übersetzung. Ich bin mit diesen beiden Sprachen nicht vertraut, aber ich interessiere mich in vielerlei Hinsicht, anstatt Phänomenologie des Geistes mit einer nicht hilfreichen koreanischen Übersetzung zu stud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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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의 수도원』1권을 읽고

책들 Bücher 2010. 2. 4. 09:0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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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부 도서관에 반납하고 난 후 2권째를 빌리려 했는데 대출이 안된단다. 열흘 전에 1,2권을 모두 빌렸다가 아무래도 2주내에 1,2권을 읽기에는 속도가  더뎌 2권은 지난 주말에 미리 반납했다가 어제 대출하려던 것이었는데, 반납한 책은 1주일이 경과해야 대출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무슨 사금융도 아니고..

『파르마의 수도원』1권의 전반부는 우쭐대는 귀족 청년 파브리스가 자신의 우상인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워털루 전투에 나서는 내용이다. 책 뒷날개에서는 마치 우리의 주인공이 이 대회전의 중심부에 있는 듯한 홍보성 문구를 늘어놓지만, 고작 이 싸움의 주변부에서 돈키호테처럼 허세를 부리는 우스꽝스러운 참전기일 뿐이다. 마치 임권택의 『취화선』에서 조선말기의 평민 화가 장승업이 일제의 침략이나 동학농민전쟁 등 시대의 대사건을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듯 파브리스는 워털루 전투의 주변부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와 비교해, 스탕달(1783~1842)과 동시대인으로서 워털루 전투를 그 중심에서 다룬 작가는 빅토르 위고(1797~1885)다.  스탕달과 달리 위고는 나폴레옹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레 미제라블』에서 백과사전적 지식과 서사시적 표현으로 이 대회전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스탕달은 호평받는 고전 작가로 자리매김해 있는듯 하나, 내가 보기엔 당시엔 통속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 귀족사회의 로맨스와 정쟁으로 얽히고 뒤섞인 이야기는 오늘날의 통속 사극가 뭐가 다를까. 재미는 있지만 『레 미제라블』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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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둔함 대 상상력

문학 Literatur 2010. 2. 1. 08: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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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 베네치아 공국의 그리앙타를 빠져나와 숲속에서 모르는 하인에게 말을 빼앗으면서 위험하게 행동한 파브리스를 꾸짓으며 모스카 백작이 하는 말 :

"악마에게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악마를 죽이는 편이 낫다"

스탕달, 원윤수/임미경 역『파르마의 수도원』1(민음사, 2008), 257. 

"다소 우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주의깊게, 늘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자들을 이겨내는 쾌감을 흔히 맛볼 수 있는 법이지. 나폴레옹이 아메리카로 달아나는 ㅣ 대신 신중한 존 불[전형적인 영국인, 즉 웰링턴 장군]에게 항복했던 것은 그의 풍부한 상상력이 낳은 오류였어. 존 불은 계산대에 앉아 테미스토클레스를 인용한 나폴레옹의 편지를 보고 몹시 웃었지. 어느 시대나 결국 비천한 산초 판사가 숭고한 돈키호테를 이기는 법일세."

상동, 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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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을 처음 듣던 날

단상 Vorstelltung 2010. 1. 30. 01:4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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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반에 춘천의 자취방에서 LP를 돌렸다. 군대를 다녀오고 짬내도 벗어난 시기였다. 그때는 한창 춘천의 명동에 있는 음반가게에서 주인의 조언을 들으며 LP를 모으는 시기였는데 주로 클래식을 수집했다. 그때는 인터넷이란게 태생기였으므로, 도서관에 가지 않는 한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클래식에 관한 조언을 음반가게 주인에게 듣는게 나름 요령이었다. 클래식이란 말이 나오니 하는 말인데, 음악에도 클래식이 있듯이 글에도 클래식이 있다. 그런데 마태 수난곡을 만난 날은, 이 주인과 동떨어져서는 뭔가 안되는듯 하다.. 

중세에 그려진 듯한, 음울한 구세주의 수난사를 그린 그림으로 장식된 LP음반을 들고 주인에게 갔더니 이 양반이 감탄을 한다. 그런데 그 음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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