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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때문이든 다른 여러가지 핑계로든 지난 연말 이후 어떤 식의 글도 치지 못했다. 일기가 됐든 서평이 됐든 인상이 됐든 자주 기록을 남기는다는 것은 뒷날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지만, 쓴다는 것은 다른 의미도 있다. 토요일인 어제 저녁 공영방송에서 흥미로운 강연을 봤다. 실리콘밸리의 투자 귀재로 불리는 피터 틸이라는 기업가의 강연인데, 아무런 대본없이 저렇게 유창하게 혁신전인 경영철학을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쓰기이다. 아무래도 밑에 깔리는 한글 자막의 영향이겠지만, 소리와 글을 동시에 접하는 것은 의미를 더욱 강고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One to N 이 아니라 Zero to One은 남들과 똑같이 모방하지 말고 남들과 다르게 독점(창조)하라는 캐치프레이저인데 창조경제를 표방한 이 정권이 활용하기에 좋은 것이다. 하지만 관료, 정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적이다. 왜? 권력은 권력을 목적으로 한다는 오웰의 지적을 따른다면 경제를 살리자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수단인 셈이니까.

 

몇 시간 후 EBS에서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웨스턴 무비의 고전 배우 당사자가 이 장르를 활용해 자신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영화로 보인다. 이런 영화야말로 One to N이 아니라 One to Two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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