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중

책들 Bücher 2010. 10. 4. 13:4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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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으로 처음 조지 오웰을 읽었다가,  작가의 저술 연대를 거슬러 『동물농장』을 거쳐 이 책을  보고 있다. 여기서 1936년 당시 프랑코의 반란에 따른 반파시스트의 응전으로 치닫는 스페인 내전과  코민테르의 개입에 따라 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갈등을 겪는 무정부주의자 중심의 혁명파와 소련과 연계된 공산주의자 중심의 전쟁파의 대립을, 지리멸렬한 아라곤 전선과 격렬한 바르셀로나 시가전의 현장과 함께 오웰은 생생히 보고 하고 있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출간한 후 저술한 『동물농장』의 출판에 오웰은 애를 먹었는데, 2차 대전 기간 동안 소련과 동맹을 맺은 영국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 『카탈로니아 찬가』에 드러난 점을 볼 때, 영국 정보부에서 고의적으로 『동물농장』의 출간을 저지했던 정황이 분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영국은 『동물농장』에서 돼지들[볼세비키]과 결탁한 인간 농장주 필링턴으로 비유된다. 읽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다큐의 진수를 이 책은 보여준다.    

                                 스페인의 북동부 위치한  자치 공화국 카탈로니아

"훈련과 무기 부족으로 인한 결함이 마치 평등주의적 체계의 결과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했다. 새로 모병한 의용군 병사들이 군기가 안 잡힌 무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교들이 사병들을 <동지>라고 불러서가 아니라, 신병 부대라는 것이 원래 규율이 잡히지 않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규율은 예상했던 것보다 믿을 만했다.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노동자들의 군대에서 ㅣ 규율은 자발적인 것이다. 이들의 규율은 계급에 대한 충성에 기초한다. 반면 브로조아 징집병 부대의 규율은 궁극적으로 공포에 기초를 둔다(의용군을 대체한 인민군은 두 유형의 중간쯤이었다). 의용군에서는 일반 군대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기합이나 학대가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군사적 징계는 있었다. 그러나 매우 심각한 죄목에만 한정되었다. 어떤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는 않았다. 우선 동지애의 이름으로 호소를 했다. 사람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는 냉소적인 사람들은 금방 이런 방식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방법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다. 최악의 상태에 처한 의용군 신병들이라 해도 그 규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나아졌다."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정영목 역(민음사, 2008, 1판 18쇄), 41-42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원칙이 다소 모호하기는 했지만 특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정말로 순수했다는 점에서 대다수의 이른바 혁명가들과 대립되었다. 철학적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양극단이다. 실제적으로, 즉 목표로 하는 사회의 형태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주로 강조점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절대로 화해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자는 늘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무정 ㅣ 부주의는 스페인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사라지만 아마 공산주의 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전쟁의 처음 두 달 동안 상황에 잘 대처해 나간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상동, 84-85.

"처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곳에 계급 구분이나 빈부의 격차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나는 이것이 희망과  위장이 혼합된 모습임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노동 계급은 시작은 되었으되 결코 견고하게 자라잡지 못했던 혁명을 믿었다. 부르조아지는 겁에 질려 잠시 노동자로 위장했다. 혁명 초기 몇 달 동안은 아마 살기 위한 방편으로 일부러 작업복을 입고 혁명적 ㅣ 구호를 외치며 다녔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몇달간 전선에 있다 온 후] 모든 것이 평상시로 돌아가고 있었다.고급식당과 호텔은 값비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부자들로 가득했다. 식료품비는 급등한 반면 노동 계급의 임금 상승은 그에 훨씬 못 미쳤다."

상동, 150-151.

"정당 내부의 논쟁에 너무 자세하게 파고드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오물 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능한 한 진실을 확립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지저분한 싸움이 보기보다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동,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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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의 영도를 받으며 존즈의 메이너 농장을 접수한 동물들은 동물농장을 세운다. 그러나 혁명은 화석화되고 동물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생긴다. 소비에트에 대한 풍자이면서도 우화로서의 알레고리인 이 소설의 대미는, 적의 주요 기능으로 규정했던 직립보행을 돼지들이 낑낑대며 흉내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어울려 춤추며, 예전에 인근의 적대자였던 폭스우드 농장의 주인 필킹턴이 동물농장의 돼지들에게 초대되어 행하는 다음의 연설이다.

"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p.21) 이렇게 말하면서 필킹턴은 동물농장이 이룩한 노동의 효율화-식량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은 연장시킨 것-을 극찬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되려고 한다'는 베블렌의 지적처럼, 봉기로 탈취한 생산물의 단물을 독점한 지배세력이 된 돼지들은 더이상 혁명이 필요없다고 다른 동물들을 세뇌시킨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권력의 본질을 권력 자체의 목적성으로 제시한 것처럼, 지배자에게 필요한 건 권력을 지키는 일, 권력의 누수를 사전에 예리하게 차단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사는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이를 빼앗으려는 세력의 끊임없는 대결이 펼쳐지는 무대이다. 자연의 한계로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교체되어 가도 그들의 의상과 연기는 변함이 없다. 지배를 국가에 위임했다는 근대 계약설을 준용해, 지배를 어떤 몰인격체에게 위임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전복시킬 수 있을까? 이 우화의 앞부분에서 노장의 선동 돼지인 메이저의 선언은 이런 전복의 아이러니를 은연중 폭로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입니다."(p.13) 메이저가 행한 이 연설의 이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적이거나 동지이다." 홉스 이래 인간은 인간에 대한 적이었으나 맑스 이래 노동하는 인간은 인간에게 동지이기도 했다. 동지와 적 사이에는 무관심한 이웃이 있을 것이다. 지배하려는 자는 이 중간을 가능한 배제하고 동지를 늘려가면서 적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취해야 할 것이다. 동지가 적이 되고, 적이 동지가 되는 지배의 변증법에 무관심한 태도는 결국 지배의 용인이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친절하게도 풀어준 이 등장동물들의 일대일 대응관계 일부를 소개한다.
존즈 : 니콜라스 2세, 메이저 : 맑스,  나폴레옹 : 스탈린, 스노볼 : 트로츠키, 돼지들 : 볼세비키, 복서 : 프롤레타리아트,  스퀼러 : 프라우다, 개들 : 비밀경찰, 필링턴 : 영국, 프레드릭 : 독일....

다시 왕년의 대권에 침을 흘리는 러시아의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떼 출신이다. 그도 나폴레옹을 꿈꾸는지 모른다.

텍스트 : 조지 오웰, 도정일 역 『동물농장』(민음사, 2009, 1판 68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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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을 읽고

문학 Literatur 2010. 1. 10. 18:2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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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 이후 체크한 구절을 옮긴다.
 
"우리 생애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가망도 없고. 우린 죽은 몸이야. 우리의 진정한 삶은 미래에 있어. 우린 그때 한줌의 먼지와 몇 개의 뼈다귀로 변해 있겠지. 그러나 그 미래가 얼마 후일까는 알 수 없어. 몇 천 년이 걸릴는지. 현재로서는 조금씩조금씩 올바른 정신을 넓혀 가는 것뿐이야. 집단행위를 할 수 없어. 우린 우리의 지식을 개인에서 개인으로,ㅣ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줄 수 있을 뿐이야."

『1984년』, 184-5.

한 순간에 오세아니와의 교전국이 유라시아에서 이스트아시로 바뀌는 텔레스크린의 낭보를 들으며 윈스턴이 하는 말.
"대상이 바뀐 것 외에는 '증오'는 전과 똑같이 계속하는 것이었다."

상동, 190.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가 내부당원인 오브라이언에거서 받은 골드스타인의 "과두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 중

"일률적인 부의 증가는 계급사회를 파괴할 위험(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가 파괴다)을 초래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먹고 목욕탕과 냉장고가 있는 집에서 살며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갖는 세상에서는 불평등이라는 가장 명박하고 중요한 사회구조가 붕괴한다. 부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 소유와 사치라는 의미에서 부가 공평히 분배되는 한편 권력은 소수 특권계급이 장악하는 사회를 물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회는 장기간 안정적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안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향유된다면 빈곤으로 우매해야 정상적일 대중들이 점점 깨이고 혼자 사색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고 보면 조만간, 소수의 특권층은 특권적이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아 계급사회[상중하의 3계급]는 가난과 무지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 20세기 초의 몇 사상가들이 꿈꾸듯 과거의 농업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제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거의 전세계를 통해 준본능이 되ㅣ 다시피 한 기계화 경향과 맞지 않을 뿐더러 공업에서의 후진국가는 군사적으로 무력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선진국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상동, 197-8)

"문제는 세계의 부를 실제적으로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재화는 생산되야 하지만 분배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 계속적인 전쟁이다."(상동, 198)

"전쟁은 잉여 소비재를 소모시키고 계급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형성한다...우리 시대에는 결코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지배집단의 그 백성에 대한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반항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있다."(상동, 205)

오브라이언이 줄리엣과 함께 체포되어 개조를 당하는 스미스에게 설명하는 권력의 본질

"옛날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마저 비열하고 위선적이지.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이 그 방법에서는 우리와 극히 비슷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자인할 용기가 없었어. 그들은 마지못해, 그리고 잠시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머지 않아 인간이 자유스럽고 평등한 천국이 오리라고 그들은 가식, 아니 믿고 있었지. 우리는 그렇지 않아. 누구든 권력을 장악할 때는 그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야. 권력은 수단이 아니야. 목적 그 자체지.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 독재를 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 혁명을 하는 법이야. 박해의 목적은 박해야.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그처럼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상동,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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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 두 권

서술 Beschreibung 2010. 1. 7. 09:1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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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부터 현재까지 좀처럼 글을 쓸말한 여유가 없지만,그래도 출퇴근 전철과 깊은 밤에 잠깐식 소설책은 본다. 다시 펼쳐든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중 1편 야곱의 이야기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1984년』은 중반에 줄리엣의 고백으로 다소 상투적이긴 하더라도 예상못한 반전이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흥미진진해 진다. 야곱의 이야기는 몇 줄 안되는 구약의 구절을 현실감있게 복원시키는 토마스 만의 주도면밀한 상상력에 빨려 든다. 실제로 토마스 만이 근동을 답사하고 취재를 하고 난 후 고 소설을 쓴 점은, 마치 범죄 영화를 만들기 위해 30년간 형무소로 쓰인 알카트라즈 섬을 답사하고 수감자들을 취재했던 마이클 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취재는 오늘날 창작의 기본이다. 책상머리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나, 이제 작가는 도서관과 인터넷을 물론, 현장의 답사를 통해서 상상력에 현실의 갑옷을 입힌다. 창작의 고통은 단지 머리 속의 고통이 아니라 전신의 노동에서 비롯되는 고생이다. 고통없이 산출이 있던가.    

창세기편 중 에사오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문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라반에게서 종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히 처리된 7년이라는 수를 놓고 만은 7년이란 수의 막막함과 덧없음을 상술한다. 하루 하루가 지나 7일의 한주가 되고, 한주가 모여 한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 1년이 되듯, 되돌아 보면 7년은 마치 하루의 7일인 한 주 처럼 흘러간다. 여기에 바로 만의 맹점이 있다. 창세기의 짧은 구절에 놓인 시간의 공백을 면밀히 채워 나가는 전형을 만은 탁월하게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당에 날리는 일침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어떤 점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공적 사건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침해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상적이다. 마치 한 알의 곡식이 소화되지 않고 새 몸뚱이를 거쳐 탈없이 그대로 나오듯.."(『1984년』,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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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에 대한 한가지 방안

주장 Behauptung 2009. 12. 21. 17: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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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기되는 번역에 대한 볼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린다. 오역을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옮겨주는 자의 수고없이 원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만 그 부실을 최소화하려는 열의와 결백을 바랄 뿐이다. 

어제부터 김병익이 번역한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보고 있는데 억지스러운 한자어 번역이 눈에 띈다. Big Brother를 대형(大兄)으로, INGSOC(Englnad Socialism)을 영사(영국 사회주의)로 옮기는 번역엔 창의성은 없지만 사기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한국말을 창안할 수 없다면 이런 불편한 번역이 오히려 안전한 것이다. 더욱 안전을 기하려고 한다면, 대역문고처럼 역문과 원문을 일일히 대조한 책을 출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어느 정도 해당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바로 일일히 대조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제멋대로 의역하거나 적당히 무지를 감추는 행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번역이라는 상상이 활개를 치면서도 비약하지 않는 적정선을 지키는 것, 그것은 원문대조 방식의 출판에서 기대할 수 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자북이 보편화된다면 더욱 손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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