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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복수의 책을 병행해서 읽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중간에 읽다가 그만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생처럼 학습이 주된 일상사가 아닌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집에 묵혀 둔 밀의 『자유론』은 그런 식으로 읽다가 책의 1/3 정도의 지점에서 책을 덮은 것이 2003년이었다. 당시 잠깐 다녔던 일본어 학원의 수강증을 책갈피로 써서 시기를 알 수 있었는데, 그 때 줄쳤던 부분은 지금 봐도 공감이 간다. 『자유론』은 강남좌파로 지목된 조국의 인터넷 강좌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저서라 내 생각에는 고등학교에 철학과목이 개설된다면 한 학기 동안 『자유론』을 교과서로 써도 좋다고 본다. 공리주의자로서 개별적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때의 자유는 다수의 폭압에 억눌러진 자유로, 이렇게 개별자가 침묵을 강요당하면 사회적 발전도 퇴보할 수 없다고 밀은 본다. 여기서 다수는 정부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는데, 정부는 제도를 통해 소수를 통제할 수 있고, 사회는 여론을 통해 소수를 제압할 수 있다. 특정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이 의사를 제도와 여론으로 사장시키는 것은 다수의 맹목적 폭력이다. 다수가 자신의 의견을 소수의 의견을 묵살한 채  관철시켜가는 것은 스스로 정당성과 유용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다수의 의견은 소수의 의견을 통해 검증받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통해 오류로 판정될 가능성을 놓칠 수 있거나 소수의 의견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진리로 확인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제제도 없이 유유히 라인을 타고 흘러가는 강은 늪지와 모래밭과 같은 여과장치를 파괴하며, 그 결과는 점진적인 사회의 균열과 와해로 나타난다.
 
그나 저나 오랜만에 철학책을 접해서인지 건조한 감이 들어 도서관에서 안톤 체호프의 단편선을 대출했다. 오 헨리의 단편을 고를까 했는데 내가 즐겨가는 서가에 없어서, 역시 앞부분을 읽다가 만 체호프의 작품을 골랐다. 토마스 만의 경우처럼 단편은 중장편이나 대하서사와 비교해 소품이나 대작을 위한 디딤돌로 볼 수 있는데, 체호프에게는 단편이 더 알려져 있다. 체호프도 서머셋 몸처럼 젊은 시절 의사직을 던지고 집필에 몰두했다면 대작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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