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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선교금지라는 정부결정에 대해 대책회의를 주도한 세계선교협의회 강승삼 사무총장의 주장.  “지금까지 이슬람권 선교 활동으로 인해 한 번도 위기 상황이 발생한 적이 없다. 선교사들은 납치당하면 자기가 책임을 지고 죽게 되면 죽는다는 서명을 하고 나가기 때문에 국가에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교계에서는 정부도움이 필요없는 위기관리팀을 구성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서약을 받아 놓고 선교사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기독교는 미친게 아닌가? 순진무구한 인질들이 어렵게 풀려난  상황에서 이런 발언을 내놓는 것을 보면, 아직 교계 지도자란 인간들은 정신을 못차린 것이다. 그렇게 위험지역에 가고 싶으면, 전두환과 함께 너희들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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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제가 디워 논란에 대해 밝힌 짧은 인상에 덧붙여 첨언합니다.

제가 보기에 진중권이 디워에 사용한 분석틀은, 묵직한 소갈비를 토막내는데 회칼을 사용한 경우라고 봅니다. 마치 망가진 전화기를 하나 고치는데 전자공학의 전문지식을 나열해 놓는다고 할까요. 진중권을 보면, 학식도 있고 명망도 있는 사람이 어디인들 나서고 싶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진중권이 토론에서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을 끄집어내며 알찬 지식을 전달해준 기여는 있겠지만, 그가 아둔하게 바라보는 대중처럼 그도 철저히 아둔해 보입니다. 아직 저는 그 토론을 보진 못했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결국 MBC를 비롯한 미디어와 함께 진중권도 철저히 디워의 노이즈 마케팅에 농락당한게 아닐까 합니다. 토론에서 보이는 진중권의 진중하지 못한 발언들을 안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전문가를 무시한다고 대중을 편박주는 진중권에게서 오히려 황우석과 그를 추종한 송호근의 칼럼이 연상됩니다. 이들은 과학자의 세계를 탐사해 들어오는 PD수첩의 취재를 과학전문가집단에 대한 영역침범으로 보았습니다.  

그 옛날 어둑한 별빛을 받으며 읽던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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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의 야만

주장 Behauptung 2007. 8. 21. 10: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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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學閥)이란 말에서 ‘閥’은 문벌이나 가족, 공훈, 공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학벌의 한자 뜻을 그대로 따라 정의해 본다면 학력으로 이룩한 공적이다. 그런데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학벌의 의미는 좀더 현실적이다. 1.학문을 닦아서 얻게 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 또는 출신 학교의 사회적 지위나 등급. 2.출신 학교나 학파에 따라 이루어지는 파벌을 의미. 뭔가 엉성한 정의인데, 좀더 자세히 살펴 보자. 1번에서 ‘학문을 닦아서 얻게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학문을 닦아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연 학문을 닦아서 사회적 지위나 특정 신분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학문을 닦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뿐더러, 학문을 닦는다고 어떤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획득한다는 것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학위를 따서 좋은 직장을 잡아 연봉을 올리거나 교수자리를 잡는다는 식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얻는다고 하면 더 적절할 것이다. 둘째로, ‘출신 학교의 사회적 지위나 등급’이란 말은 아주 훌륭한 현실의 반영처럼 보이지만 이상한 말이다. 출신학교가 서열화되어 있다는 것인데, 매년 중앙일보에서 부문별 대학평가를 하는 사업에 적중하는 정의다. 그렇다면 중앙일보는 대학의 서열화로 학벌을 조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2번의 정의는 더욱 현실적이다. ‘출신학교나 학파에 따라 이루어지는 파벌’이란 괴상한 정의는 괴상한 현실의 반영이다. 그런데 학파에 따라 의견의 대립이 분명해, 파벌을 형성할 정도라고 한다면, 이것이 꼭 바람직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이런 ‘학파’에 따른 파벌보다는 ‘출신학교’에 따른 파벌이 월등히 강하므로 이 정의도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정의의 애매함과 불명료함에도 불구하고 학벌이란 말에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며 교류하는 일이 학벌을 형성한다는 것은 분명 학문의 목적에 어긋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특정시기에 측정된 학습성취도로 잡은 학위가 신분의 상승과 지위의 독점을 향한 대로를 보장하는 방법이라면,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을 소통하고 축적하며 발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특정 지위나 신분 보장을 위한 사관학교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대학들이, 학위가 없이도 성공해서 학벌사회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명망가들에게 명예박사학위라도 뿌리는게 학교의 재정과 명예를 튼실히 해주는 방안일 것이고, 이것은 대학이 학문이 아닌 판촉으로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방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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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시절, 연병장 사열대 옆에 키작은 돌덩이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軍命如山"."군대의 명령은 산과 같다"는 이 글귀는 언뜻보면 멋지게 보이나 무서운 말이다. 군대에서의 명령은 산이 내려 앉은 것과 같아서 한번 발동되면 거부할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산과 같다는 말이다. 군대에서 명령을 그토록 강조하고, 아니 명령 자체가 군대의 본질인 점은 인간사회의 가장 사악한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즉 위협과 승전 때문이다. 이 목적은 물론 이보다 더 큰 목적, 즉 그 사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겠지만, 이런 목적론의 계열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저 무서운 말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시적 상황뿐이다. 한순간에 생존이 뒤바뀔 수 있는 비정상적인 폭력적 상황에서 군대라는 체계는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되는 전쟁기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말들은 공허한 단어들일 뿐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즉 전시와, 전시에 버금가는 작전상황에서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군대는 그야말로 거대한 블래호크의 다운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도 거리가 멀지만, 종종 우리는 이러한 군대적 문화가 암암리에 통용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왜? 당장 세계 저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엄연히 한국군이 파병되어 가 있듯, 세계에는 국지적 전쟁의 화염이 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팽배해질 정도로, 경제대국의 군비가 증강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세계정세를 벗어나 이 사회의 현실을 보더라도, 인간의 생명활동이 생존경쟁 내지 생존투쟁이라는 이름의 격전장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회가 그런 전시적 분위기의 면모를 띤다면, 분명 군대에서 통용되는 명령체제가 그대로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위험이 산재해 있다. 연세의료원의 파업, 이랜드 사건 등은 그러한 위험사회의 흐름에 제동을 거는 지엽적 사례의 일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런 사회 현실의 장력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순전히 가상적인 상태에서 왜 군대가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할 수 있는지 논해 보겠다. 그리고 인간이 과연 자율적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존재자인지는 확신하기 보다는 일단,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전시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한 전범이나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전직 경찰, 혹은 대형비리에 연루된 회사간부가 법정의 추궁에 냉랭히 대답하는 이런 답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이 답변에는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오직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므로, 오히려 상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울분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런 울분은 정당한 것인가? 이 울분은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자율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뿐더라, 이런 자율성을 행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분이 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그는 타율적으로 자신에게 명령한 상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처벌을 하려면 명령을 한 주체에게서 해야지 왜 자신을 닥달하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당신은 그런 명령이 옳다고 보았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 명령을 수행한 건가요?" 이에 대해서 여전히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즉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존재자로 인간을 정의한다면, 그는 이런 정의에서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자, 즉 인간이 아닌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계처럼 일할 수 있다. 군대가 인간에게 끼치는 해악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을 생각없는 기계로 양산하는 군대, 군대적 문화의 타파는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아 가는 하나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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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단상 Vorstelltung 2007. 7. 9. 13: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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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텔레비젼을 방구석에 몰아 넣고 나니 의례적으로 TV 보던 습관이 줄어들었다. 이제 TV 프로그램(공중파든 케이블이든)은 인터넷에 떠다니는 다중매체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 드나, 현실세계에서 방송국은 돈과 인력과 장비가 집중되어 있는 기반시설로 자리잡혀 있다. 파도처럼 다중 매체가 현실세계에서 이 보잘것 없는 프로그램만 양산하는 방송국들을 쓸어버릴 날들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를 들어 마포에서 성미산 살리기 운동을 펼쳤던 주민들은 문화사업의 하나로 인터넷 방송국을 열었다고 한다. 이런 방송국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시설과 인력으로 돌아가겠지만, 방송의 앞날을 누가 장담하겠는가.

UCC를 더욱 확장해 프로그램은 방송국에서 모두 외주를 주고, 방송국은 오직 중계소 역할만 하는 구조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영화 '라디오 스타'에는 이런 전환이 극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제작비도 이 외주업체(?)에게 지원하는 형태여야 할테고. KBS에서 이런 사업을 공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직은 내용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걸 시민참여방송사업이라 할 텐데, 지원의 규모와 의지에 따라 프로그램의 범주를 매우 다양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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