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환승구역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1. 10:2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몇개월 전에 나는 출퇴근으로 이용하는 환승 지하철역에서 벽에 칼라 타일을 바르고, 의자도 디자인감각이 발휘된 것으로 바꾸는 내부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봤다. 이 환승역을 이용한지가 6년은 되가나 환승구간의 계단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켈레이터가 없다는 것이 내게 별 불편이 없었지만, 노약자에겐 큰 불편이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미관을 꾸미는 내부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났다. 이런 돈이 있으면 엘리베이터 공사를 할 것이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내부미관공사에 쓰냐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나는 서울시와 도시철도공사, 그리고 한겨례에 메일로 제보했다. 그러자 서울시에서 답신 메일 왔다. 서울시에서는 이 일의 담당부서를 찾아 제보를 맡기는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그러고 나자 철도공사에서 메일이 왔다. 그런 내부미관공사는 서울시와 서울 메트로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며, 환승구간의 승강기 공사는 철도공사에서 해야 하지만 비용의 문제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답변이 궁색해 답장메일을 보냈지만, 수신처는 불명이었다. 다른 채널로 다시 답변을 요구해 보려 했으나, 다른 일들에 밀려 나의 소극적인 이메일 투쟁은 종식됐다.

그러면서도 나는 매일 이 환승역을 이용한다. 그런데 아침마다 목발을 잡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는 남성을 보면서 웬지 책임질 수 없는 미안함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목발이라도 쥘 수 있는데 바쁜 아침에 공익을 불러 장애인용 리프트를 이용하기도 구차한 일이다.

대규모 개발과 관련된  공공사업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경우가 많다. 오래전부터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서울 전역의 재개발사업을 보면, 어느 정도 자산의 여력이 있는 40~50대 중장년들은 신중한 자세로 이 사업의 타당성을 가계와 직결시켜 계산한다. 그러나 월세나 낮은 보증금의 전세로 살아가는 노년층에게 이 사업은 퇴거명령과 마찬가지다. 재개발사업이 확장될 수록, 사회적 약자들은 재개발의 사각지대로 집중해 간다.

전투기 사업에 쓰일 수조원의 돈이면 이런 문제들은 해결된다. 누구를 위한 국방인가?    

*환승역은 옥수역입니다.
반응형

함석헌

헤겔 Hegel 2007. 10. 23. 09:13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오늘 오전, 누군가에게 책 추천을 부탁받고 이리 저리 뒤적이다 함석헌의 책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어떻게 해서 함석헌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구내서점에서 '들사람 얼'을 사서 도서관에서 즐겨 읽었었다.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정신이 번뜩이는 말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이는 함석헌이 한국에 전무했던 계몽주의를 발흥시킨  인물로 보았지만, 계몽주의가 한국에 전무했다는 말은 지나치다. 분명 함석헌은 재조명이 필요한 한국의 계몽가이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후 혼란, 독재정권의 창궐이 진보를 향한 흐름을 막은 것이지 이런 흐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칸트가 말한 공적인 이성의 사용을, 죽음을 무릎쓰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유생에게서 볼 수 없겠는가? 현재로선 유교는 폐기처분할 유산이지만,  왜란과 호란을 겪기 전까지 조선에서 유교는 샤머니즘과 불교의 초현실적 세계관에 대척하면서 이상적 정치 질서를 만들기 위한 현실의 이념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남명과 퇴계의 학문이 실학, 나아가 동학과 만나지 못한 것이 조선의 불운이자 자생적 한계다. 이런 한계는 어떤 것에서 유래된 것일까?

예나시기 정신철학에서 청년 헤겔은 개별성을 극복한 단계로서 민족(Volk)을 말한다. 공동생활의 단계로서 민족, 국가는 개별성으로 축소될 수 없는 상태다. 개별자로 끊임없이 분리되는 곳에서 어떻게 공동의 이익이 나올 수 있는가?  따라서 국가 이전의 상태는 야만이다. 그런데,  국가가 성립해 있지만, 그 국가의 운영자들이 개별자로서의 자기 이해에 파묻혀 간다면 그런 국가도 야만적이다. 한국이 세계 10위의 군사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미래의 성장동력을 무기사업에서 찾는다는 비전으로, 새로 개발한  전차를 터키에 수출하기 위한 상담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의 무기상은, 터키가 이라크내 쿠르드족과 싸우면서 유가가 급등하는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유가 급등은 근본적으로 석유라는 한정된 자원과 이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근본적 원인이 있지만, 이런 야만적 세계질서 속에서 국가라는 체제가 개별성의 이해로부터 얼마나 침탈되는지 정도가  그 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버마의 정치 체제는 야만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겉으로 드러내 놓는 처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내부에선 이런 야만이 꿈틀대고 있는게 현실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정권의 변동기에 더욱 더.

반응형

FTA는 광우병이다

주장 Behauptung 2007. 10. 6. 21:19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미국이란 나라는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오래된 조작에 어울릴 정도로 의아스럽다. 조승휘 사건에서 다시 불거졌던 총기사용 문제도 그렇거니와, 소를 수출하는 선결 조건으로 한국과 FTA를 체결한 미국에서, 1억마리에 해당하는 도축용 소중 수출용은 10%이고 나머지 소 90%는 내수로 소비된다는 상황도 의아하다. TV에서 방영되었다시피, 미국에서 열악한 사육현장에 갇힌 소들이,  자신들의 육골분 사료를 먹고 자란 닭과 돼지의 육골분 사료를 되새겨 먹고 배출한 똥더미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사육환경은  광우병(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 소해면상뇌증)  인자로 알려진 단백질계 프리온을 양산하는 혐의를 받기 충분하다. 유시민은 미국민도 즐겨 먹는 소를 우리가 왜 먹지 못하겠냐며 입을 벌려 웃지만, 이런 위험한 소를 주식으로 소비하는 미국민 대다수가 잠재적 광우병 보균자일 수 있다는 위험성이 이 가식적 미소 뒤에 숨어 있다. 이런 논리는, 온실가스가 당장의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규제를 거부하는 부시 행정부가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치매환자의 13%가 광우병 환자로 의심되는 상황, 그리고 노령화에 따라 치매환자가 늘어나는 상황은 비위생적 사육환경에서 자란 동물을 식용으로 대량 소비하는 육식의 식생활에 대한 엄중한 경고일 수 있다.  또한 환경오염은 필연적으로 그런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 음식물의 오염을 함축한다. 환경재해가 산업사회가 가져온 폐해라는 점에서 단지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해인 점과 마찬가지로, 농작물과 가공품, 축산 유제품을 망라한 음식물의 오염도 사회적 재해다.  장기적 잠복기를 거쳐 광우병을 초래할 것으로 의심되는 미국산 소에서 한미간 위험물질로 합의된 뼈가 계속 발각되는 현상황은 이제 일상의 한낱 먹는 문제를 놓고 생활전반에서 총체적으로 전개할 새로운 양상의 인정 투쟁을 예시한다.  


*광우병의 위험에 대해서는 다음 단체의 자료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vetnews.or.kr

반응형

공릉동 납골당 사태

주장 Behauptung 2007. 9. 23. 11:55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제가 사는 동네는 아닌 인근지역이지만(노원구), 소통과정에서 어떤 무리가 있었음을, 이런 결과가 보여준다고 봅니다. 납골장례문화가 현대사회에서, 더군다나 남한에서 새롭게 받아들일 만한 문화임에 분명하나, 그에 대한 지역민과의 충분한 대화없이 은밀히 추진된 사안이 이 은밀하고 무모한 진압의 양상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좀더 여러 자료를 토대로 이 사태를 면밀히 파악해 의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납골문화는 현실적으로 수용할 만한 대안 장례양식이지만, 종교적 의지 내지 종교적 거래로 강제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북구의 녹야원에서 벌어졌던 일과 비교해 봅니다. 그 추진과정의 내막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역시 주민의 반발이 거셌던 공통성이 있습니다. 다만 입지적 요인으로 비교해 보면, 녹야원의 납골당이 비교적 한적한 산길에 자리잡은 반면, 태릉 성당의 납골당은 초등학교와 맞붙은 주요 길목에 자리잡았습니다. 납골당이 슈퍼마켓처럼 일상생활의 부대시설로 자리잡는다는 신선한 시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초등학생들과   주민들이 오고가는 길 한편에 납골당 시설을 지을려면, 천주교측에서 주민에게 충분한 설득을 먼저 하는 절차를 밟았어야 하는게 순서라고 봅니다. 아파트값 운운은 사실적이지만 전혀 이 사태의 대항논거로 동원될 수 없는 천박한 상술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측에서 주민을 설득할 수 없다면, 전경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것이 아니라, 납골당의 구조변경 내지 시설이전을 검토하는게 민주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이성적인 주민의 합의기구와 태릉 성당 간의 대화를 기대합니다.

이상은 아래 블로그 참고 : 

반응형

야수들의 밤

책들 Bücher 2007. 9. 7. 13:14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인간 본성에 관한 악의적 해석 

텍스트 : 오시이 마모루, 『야수들의 밤』, 황상훈 옮김

1.배경과 줄거리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극단에 치닫던 냉전 구도를 뒤흔들며 당장이라도 관성화된 지배 질서를 전복시킬 듯한 낭만적 환상으로 불타올랐던 1969년이다. 베트공의 전투환경인 정글 자체를 초토화하기 위해 고엽제까지 살포하는 무자비한 물리력으로 월남을 공략하는 미국의 넘치는 야욕은 반전운동과 함께 전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점을 겨냥한 반미운동을 일으켰으며, 전세계 사회주의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아온 소련 사회주의의 본질은 일당독재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는 비밀경찰과 붉은 군대일 뿐이라는 냉소가 터져 나왔고, 산업문명의 과도한 성장이 자연환경에 치명적 부하를 일으킴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불거져 나오자 자연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태적 각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국 직전의 위기감이 감도는 이러한 상황을 일소해 버리려는 이상주의적 열정은 결과적으로 폐허만을 남겨두고 말았지만, 견고한 벽에 대치한 채 변혁에 대한 꿈으로 부풀었던 당시 투쟁의 거리는 잠시나마 해방구였다. 바로 여기서 소설은 시작된다.    


  반전공동투쟁의 밤, 고대 로마의 백인대 보병단과 유사한 사각 밀집 대형으로 전투대형을 형성해 가두투쟁에 나선 대열에 섞인 무당파 소속 고교생 레이는 진압경찰에 쫓기다가 대로변 이면의 구석진 골목길에서 밤의 어둠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괴이한 사건을 목격한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하며 이 사건과 연루된 레이에게 접근해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준 고토다와 레이, 레이가 소속된 학내 무당파계열 민주화투쟁 위원회 멤버들 간에 동맹관계가 형성된다. 형사와 과격 운동파 사이의 동맹관계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이 결성된 이유는 이 사건이 에스에르(Social Revolution)파에 소속된 고교생만을 겨냥한 연쇄살인이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학내에선 레이와 같은 무당파 위원회 소속이면서도 학외에선 에스에르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친구 아오키에게도 살인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살해된 에스에르파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만을 골라 전학을 했는데, 사건이 끝나면 다른 에스에르파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하는 행보를 해왔고 이번에는 레이의 도립 K고교로 전학을 했으므로 아오키가 살해될 차례가 된 셈이었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야수같은 눈빛으로 레이를 노려보는 이 사야라는 소녀를 둘러싸고 거대한 음모들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상의 스토리 라인 위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가볍지만은 않게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두 부분이다. 하나는 시체처리의 사회사라 할만한 담론이 펼쳐지는 고토다와 레이 일행의 싸구려 숯불 고기집 회식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야라는 정체불명의 고교생을 보호하며 또 다른 정체불명의 영장류를 찾아 전세계를 배회하는 유태계 일족의 노인과 고토다, 레이간의 대화 부분으로, 여기서 장구한 인류의 진화사에서 얽혀져 나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두번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다뤄본다. 


2.문명의 근간 : 폭력

 

서구문명의 토대를 성적 욕망의 압박과 이를 제지하려는 통제의 이원체제로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프로이트의 문명관은 긴장과 갈등의 장이다. 갈등의 양상을 성적 욕망의 우세 위에 두었던 그의 초기 저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성적 욕망은 강력히 등장하는 통제의 벽에 가두어 지지만 불안한 대립구도는 깨지지 않는다. 이런 대립 양상에 기름을 붓는 또 하나의 불안한 해석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이 소설에서 인간의 본질을 살육으로 보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견자로 알려진 레이몬드 다트의 ‘수렵가설’이다. 긴 팔로 밀림의 나무줄기를 헤쳐 가며 날아다니다시피 활공하는 유인원으로부터 쫓겨나 땅바닥에 두발로 서게 된 인류의 조상이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무기력한 팔을 연장해 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잡식성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족간에 살육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문명의 필요조건이 구비되었다는 것이 대략적인 수렵가설의 내용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장면에서 유인원이 흉기로 사용한 뼈다귀를 하늘로 집어 던지자 이것이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이 수렵가설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이 영화는 68년에 나왔으며 다트의 수렵가설은 53년에 발표되었다). 큐브릭을 포함해 이러한 다트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하나인 로버트 아드레이의 『아프리카의 창세기 African Genesis』에서는 수렵에의 적응이 인간을 유인원으부터 이탈시켜 비로서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좀더 과격한 주장이 나온다(P214). 이러한 해석은 그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함께 사회생물학자들이 즐겨 사용할 만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온갖 종류의 범죄나 전쟁, 부당한 폭력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과연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는가?


  사실상 인간이 자연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방향에서 분기되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살육의지에서 나왔다는 도구의 개량과 과학의 발전 또한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사회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은 대량살상과 자연파괴의 도구로 사용되어온 과학이 역으로 인간사회와 자연을 재구성하는 긍정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보는데(M. Bookchin, The Ecology of Freedom :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이러한 생각의 이면엔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서구철학의 지적전통인 합리적 이성주의가 아직 건재해 있다. 바다의 요정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다가 급류에 휩쓸려 물살에 빨려 죽어가는 부하들이 속출하지 않도록 전원에게 귀마개를 꽂을 것을 명령하면서도 자신의 귀는 그대로 유혹에 노출시킨 채  자신을 마스트에 동여 맨 오디세우스의 신화는 자연의 폭력을 지략(이성)으로 이겨내는 인간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공저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이성의 역할을 회의적으로 보지만 대안설정에 있어 이론구성의 역할자로서 합리적 이성주의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자연을 폭력의 근원으로 돌리는 이성주의가 지배의지의 폭력성에 다름없다는 주장은 이제는 더 이상 획기적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함축을 갖고 있다.


  돌려서 생각해 본다. 살육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시도는 사실의 추구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선험적 가정이 아닌가? 이것은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의 양식인 귀납의 방식이 아니라 전제된 가정을 보증하는 발견을 찾아내 기계적으로 가정에 발견사실들을 집어넣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유인원 내지 원시인, 원시적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원주민을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성적 욕망 내지 폭력의 이론틀에 이용해 먹는 프로이트와 다트 류의 음산한 시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원시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연원하는 원시인에 대한 주도적 시각은 원시사회가 결핍사회라는 것이다. 결핍의 내용은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별짓는 것으로 이해되는 생산 잉여와 국가기구이다. 이 지점을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마치 원시인들이 생산 잉여를 내기위한 축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권력이 생길 수 없으며, 권력 자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을 넘어서는 비균등 생산활동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한편 원시사회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이 아니었다. 즉 권력의 최종 결제수단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정도로 과도한 힘이 집중된 권력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그중에서도 서구인에게로 전유된 사유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클라스트르가 원시인에게 과도한 투사를 덧씌운 면이 있지만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되어 악용되어온  원시인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면에서도 충분히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장 프랑스와 스크립차크, 『오늘을 위한 프랑스 사상가들』).

 

  인간기원에 대해서 어떤 가정을 세울것인가? 희소 자원과 인간의 폭력성으로 물든 디스토피아로? 넘치지는 않더라도 풍만한 유토피아로? 이것은 비단 인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배질서가 몰아가는 이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3.이외의 주제들


  이 책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수렵가설을 불변의 진리 따위로 보려는 우매함을 범하진 않는다. 이것을 둘러싼 여러 반론을 충실히 전하면서도 그것이 지지받는 이유를 그는 말한다. 그것은 ‘살육하는 유인원’이란 신화가 지배 문화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 사상적 도구로 즐겨 이용되기 때문이다(P219-220). 이라크에선 침략전쟁이 일어나고 피시방에선 흐물거리는 이뮬레이터를 살육하는 게임이 판치는 세상에서 블러드 프로젝트라는 복합 엔터테이먼트의 기획하에 나온 이 책은 지배 가치관에 정신없이 휘둘리는 시장질서에 봉헌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값싼 유흥거리나 의미없는 잡설만 늘어놓는 현학으로 무장된 것으로  치부될 만한 것은 아니다. 재미와 교양을 갖추면서도 간헐적으로 보이는 오시이 마모루의 짧은 상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다. 특히 노인과의 대화 부분에는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사상적이고 사회사적인 주제들이 산재해 있다. 정신을 물질로 환원시켜 나가는 근대 지성사의 흐름이라든지, 육식의 논리적 근거를 쫓는 대목, 카톨릭의 야만적 살육행위,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오래된 대치관계, 현대 금융자본의 계보 등은 오래되었지만 되새겨 볼만한 주제들이다.


2004.8.10. 프로메테우스 기고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