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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몇년 전인가, 춘천의 한림대에 강연을 온 적이 있다. 보슬보슬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많은 학생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당시 대학 총장이었던 이상주는 김대중 정권 말기에 교육부 장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대권 포기선언을 했지만 유력한 대선 후보로 끊임없이 주목을 받던 인물에게 옷깃이라도 스쳐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움집했다. 당시 강연의 주제는 김대중 정권의 모토가 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관한 시론으로 기억한다. 고대 그리스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다소 투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김대중은 강연문을 낭독했다. 정작 강연회 보다는 강연회 이후 질문의 시간이 재밌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쪽지로 적어 질문을 날렸는데, 운좋게도 내가 아는 사람의 질문이 뽑혔다. 질문은 '강준만의 책 <김대중 죽이기>를 어떻게 생각하는냐'는 것. 아마 그때 '무서워서 못 봤다'라는 식으로 응답했던 것 같고, 폭소가 터져 나왔다. 강연회와 질문이 끝나고, 정치인들의 일상적 의례인 지역 인사와의 기념촬영을 끝낸 뒤 손한번 잡아 보려는 학생들의 요청에 친절히 응대한 후 김대중은 지팡이를 짚은 채 비오는 잔디밭을 남궁진의 듬직한 우산을 받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웬지 그 뒷모습이 가을비에 겹쳐 애처롭게 보였다. 그에 대한 추도를 이 글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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