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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면서, 멋모르고 노동현장을 기웃거렸던 20대가 떠오른다. 회사 사무원의 감액전표할인이나 웃개에 대한 십장과 감독조의 착복처럼, 순진하게 노가다 일당의 2할을 소개인에게 입회비로 내준적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착복의 위계를 바다를 메우는 한 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체험문학이다.
 
이윤이 생길리 없는 서해 남도의  매립공사를, 다른 큰 관급 공사를 수주하는 조건으로 시행하는 건설사는 비용을 최소화시키면서 공사를 진행한다. 일용노무자의 노무관리를 주먹패에게 맡기면서 회사는 감독조와 십장을 통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데, 이들의 비용은 결과적으로 이 일용 노동자들이 지불한다. 이 감독조는 함바에 속한 노무자에게 각각 부여되는 일련번호와 마찬가지로 일인당 몇개의 유령 일련 번호를 부여받아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해 맘보를 받는가 하면, 웃개에서 실제로 웃개조가 한 작업량을 깍아내려 그 차이만큼을 착복한다. 이런 작은 도둑질은 공사의 수주에도 걸쳐 있다. 형편없는 낙찰가로 매립건을 입찰받는 대신, 큰 건의 공사를 수주하고, 검은 돈이 계약 당사자간에 오고간다. 결국 이 잘못된 구조의 온갖 비리로 그 피해의 하중을 가장 극심하게 받는 이들은 객지에 몰려온 일당 노동자들이다.
 
황석영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경험한 객지 노동의 현장은 지금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일용노동자한테 노임을 보름 후에 지급하면서(간죠), 그 사이에 노동자들이 함바 숙식비나 식대, 주류 및 기호품의 소비를 위해 맘보(하루 노동이 끝나고 받는)를 전표로 감액할인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악질적인 교환방식은 이제 음지에서나 휭행할 일로 보이나, 현금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는 이런 식의 변칙적 결제 방식이 잔재해 있다. 영세한 출판계에서 이루어지는 어음결제가 이와 근사할 것이다. 이런식의 악질적 착취구조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첫장에 나오는 임금가치설에 비춰 본다. 헨리 조지는 이른바 진보된 사회라는 선진 문명국에서 빈곤이 증대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지대의 국가 국세화라는 처방을 제시한다. 이런 결론을 위해 우선 그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그가 애덤 스미스로부터 당대의 모든 정치 경제학들이 왜곡했다고 본 임금과 자본의 관계를 재규명한다. 임금에 대한 통례적 정치 경제학의 정의는 임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를 헨리 조지는 임금은 노동으로 부터 나오는 것으로 규정하며, 자본은 산업의 형태를 제약할 수는 있지만 산업을 제약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은 생산도구나 원료 제공, 교통수단의 확보, 분업 등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부를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지 산업을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산업은 사회마다 그 발전의 경과가 다른데, 자본은 산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적합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자본의 효용은 떨어진다. 이에 대한 예로 헨리 조지는 영국에서 초대받은 호주의 식인족 추장이 영국민들에게서 우호적 선물들을 받지만, 귀국해 시드니에서 이 선물들을 무기와 교환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를 든다. 부정이 횡행하고 무질서한 사회에 투입된 자본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모범적 자본주의의 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헨리 조지의 논의에 따른다면, 이 소설에서 바다의 간척이라는 사회 간접 자본 시설의 구축을 위해 투입된 자본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도 부패한 자본이 판치는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실천 정신이 돋보인다.       
 
*용어 설명
 
감액전표할인 : 일용 노무자의 일당을 현금으로 당일 현금지급하지 않고, 보름 후 지급하기 위해 내어준 전표를 회사의 사무원이 노무자의 융통을 위해 당일 일정액을 제하고(이 사무원의 몫으로)  현금으로 교환해 주는 것.
 
웃개 : 공사 일정이 촉박한 상황에서 시공사가 정한 할당량을 인부들이 목표달성하면 일당보다 센 노임을 지급하는 작업    
 
맘보 : 하루 일이 끝나면 받게되는 전표교환증
 
함바 : 객지에서 온 일용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임시로 머무는 숙박소로 시설이 형편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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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큰삼촌에 대한 작가 어머니의 구술에 바탕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게 이런 기억들은 한반도의 보편적 가족사라 할 정도로,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퍼져 있다. 혼란의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주변강국에 의한 짧은 해방기,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으로 그어진 삼팔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를 겪은 세대와 이 세대의 품에서 자란 세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가족사에 각인해야 했다. 나의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소설상 이런 가족사를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떠오른다. 최인훈은 김일성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전쟁전 북한의 생활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었으며, 이문열은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회한에 묻힌 필적을 남겼다. 특히 '광장'의 '이명준'은 '한씨연대기'의  '한영덕'을 연상시킨다. 그어진 삼팔선 양편에 성립한 광기어린 체제는 평범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살려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북은 강력한 수령 지도체제가 마을단위까지 확장된 집단 정치의 장으로 장악되었고, 남은 북에 대한 반공과 일제의 잔재로 뭉친 지배층과 인민의 갈등이 속출하는 사회적 혼란과 부패의 장이었다. 2차대전 후 약소국들이 겪는 혼란의 전형을 한반도가 보여준 것이고, 이런 혼란은 지금도 이라크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에서 진행중이다.
 
미국과 소련(이제는 중국) 사이의 힘의 완충을 위해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삼팔선으로 인해 갈등은 고조되었고 전쟁으로까지 치달었다. 강대국의 몇몇 정책 브레인에게서 나온 생각들이 '한민족'이라 불리는 인민의 가족사를 갈갈히 찢어 놓았다. 이러한 상실과 이산의 아픔을 눌러앉은 채 한쪽에서는 형식상 민주적 지배체제가 형성되었고, 다른 한쪽엔 기형적 지배체제가 지속하고 있다. 한쪽은 아예 공화국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왕정이라고 이해하는게 합당하다. 이 왕정이 일당지배체제를 버리는 정치실험을 하는 날이 온다면, 입헌 민주정이 될 것이다. 변화가 어떻게 되든, 통일에 대한 생각은 잊혀져 가는 가족사를 들출 때마다 되새겨지는 주제다.    
 
*MB정권에서 아무래도 한반도 대운하를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움직임이다. 팔당상수원을 없애고(땅값 오르겠다), 낙동강의 지하수로 서울의 상수원을 삼겠단다(대운하의 물은 물류선박의 운행으로 상수원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초등생도 웃을 대학교수의 계획이다). 그런 몰상식적인 토목공사를 그렇게도 하고 싶다면, 차라리 통일한국의 미래를 위해 북한에 인프라를 닦는 사업을 하는게 타당하다.
 
*소설에 대한 간략한 요약
 
한영덕은 일제시기 평양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주변머리가 없어 기술이 없이는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의전과 교토의대를 나와 대학병원의 의사가 된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선동집회에 불참하는 등, 체제 선전에 비타협적 자세로 일관하자 당으로부터 불온분자로 몰려 전쟁중 군의관으로 전선에 나가는 명단에서 제외되 평양의 인민병원에서 전란의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돌본다. 전쟁초기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평양에서 어렵게 환자를 돌보던 한영덕은, 미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평양을 벗어나자는 친구의 권유를 물리치고 꿋꿋히 환자를 보았지만, 후퇴를 결정한 당이 부적격 사상범으로 한영덕을 비롯한 불순분자들을 집단 처형시킨다. 기적적으로 처형장에서 살아남은 한영덕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북에게 유리해 지자,  대동강변에서 모친과 아내, 딸아이를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월남한다. 남에서 동생을 만난 한영덕은 시간의사를 전전하며 어렵게 지내다 평양출신 치과의사의 소개로 무면허 의료사업을 하는 두 사업자를 만나 병원을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이들과의 만남으로 한영덕은 부당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절한 고문까지 받는 불운한 시절을 보낸다. 소설은  남한에서 체제가 안겨준 고초를 겪고 난 후, 남한에서 새롭게 이룬 가정을 등지고 배회하다 말년의 안식을 위해 적산 가옥의 다락방에서 한 노인이 살림을 풀어 헤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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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풍경

주장 Behauptung 2007. 12. 27. 14: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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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지 않게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날씨라도 좀 추워야 연말 분위기가 나는데, 대선이라는 국가이벤트가 지나가자 기후도 싱겁게 돌아가는듯 하다. 이 국가 이벤트가 연말 분위기를 다 잡아 먹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예정된 참패를 겪은 후, 뉴스레터를 보내주는 한 신문은 여전히 하이에나의 근성을 못버리고 당선자의 흠집을 찾는데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기사도 상품과 마찬가지로 팔려야 한다는 '간절함'에서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민주주의를 상품화시키는데 이 신문이 기여한 바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도대체 민주의의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되어, 그 효력이 상실된,  폐장화폐에 불과한가?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던 김대중 정권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명분에 어울리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 상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말이 수평적 정권교체지, 넓게 보면 김대중 정권은, 자신이 비판했던 김영삼 정권과 마찬가지로 타협적 정권교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정권을 수여한 이 타협의 대상은 사실 전혀 자신의 힘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켰다. 즉, 역시 타협적 정권교체를 모색하다 드라마적으로 정권을 연장시킨 노무현 정권 뒤에서 이 정권을 조정한 것이다. 이제 미국중심의 불안정한 세계자본주의의 궤도에 개발독재로 이룩한 전시산업이라는 폭주기관차를 고속으로 운행시키는 시발역이 이명박 정권인 셈이다. 즉 양김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을 준비시킨 것이고, 다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흙먼지와 소음만 심해질 뿐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준비된 패배고 10년 정권의 몰락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본래 그렇게 흘러 가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에서 빗겨 가고 있다. 이 물음은 빗겨가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남한의 생활세계와 체제에 대한 모든 규정을 근거짓는 기초법의 제 1 원리, 제 1조항이기 때문이다. 저조한 득표율과 이에 따른 계파갈등을 겪는 민노당을 비롯, 허본좌라 불리는 대권과대망상증에 걸린 광대에게도 뒤지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한국사회당에서는 이런 근본적 물음을 들고 이번 대선을 치뤘다. 이런 물음을 내면화시키는 풍토가 선거기간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진다면, 적어도 10년~20년 후에는 지금과는 판이한 정치풍토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는 비단 한국사회당 만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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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외투다

단상 Vorstelltung 2007. 12. 27. 11: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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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외투다

겨울에 외투가 없으면 춥다

그래도 집에 오면 이 외투를 벗는다

이 외투를 위해서 살 필요는 없으나, 이 외투를 벗으려면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다.

벗어봤자 다른 외투를 입어야 한다면, 벗지 않는만 못하다.

물론, 좀더 비싸고 편안한 외투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한테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추위를 피할 동안은 이 외투를 꼭 껴입고,

봄날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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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 관람기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3:5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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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수사결과, 이명박이 김경준의 사기에 놀아난 것으로 실증되었다 해도, 이명박 자신이 설립했다고 자랑하고 다닌 투자회사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것은 뭐라고 할 것인가? 과연 금융기관이 김경준을 보고 투자했겠는가? 설령 얼굴마담 노릇만 한 것이라고 해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이 책임을 검찰은 아직도 도덕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만, 금융사기의 피의자로 몰릴 수 있는 후보에게 도덕이라는 말은 쟁점을 흐트러뜨리는 연막이다)  지금으로서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후보를 사퇴하고 차기를 노리는 것이다. 대선을 며칠 안남긴 시점에서 특감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로 치닫던 이 야만적 대선구도에서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는 것은 앞으로 고단스러운 일정을 예고한다. 거대 야당에게 압도적 지지가 몰린다고 해서, 강한 의혹의 중심에 놓인 후보로 정권을 탈환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수인지 알겠지만, 그들이 이런 수를 고수하는 근거는 그 여론조사 지지율 외에는 없다. 이명박 지지율에 이상이 생기면 손을 내밀 쪽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불확실한 지지율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17대 대선은 정치 후진국의 면모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로또행사, 대박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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