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보면서, 멋모르고 노동현장을 기웃거렸던 20대가 떠오른다. 회사 사무원의 감액전표할인이나 웃개에 대한 십장과 감독조의 착복처럼, 순진하게 노가다 일당의 2할을 소개인에게 입회비로 내준적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착복의 위계를 바다를 메우는 한 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체험문학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멋모르고 노동현장을 기웃거렸던 20대가 떠오른다. 회사 사무원의 감액전표할인이나 웃개에 대한 십장과 감독조의 착복처럼, 순진하게 노가다 일당의 2할을 소개인에게 입회비로 내준적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착복의 위계를 바다를 메우는 한 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체험문학이다.
1972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큰삼촌에 대한 작가 어머니의 구술에 바탕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게 이런 기억들은 한반도의 보편적 가족사라 할 정도로,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퍼져 있다. 혼란의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주변강국에 의한 짧은 해방기,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으로 그어진 삼팔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를 겪은 세대와 이 세대의 품에서 자란 세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가족사에 각인해야 했다. 나의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소설상 이런 가족사를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떠오른다. 최인훈은 김일성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전쟁전 북한의 생활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었으며, 이문열은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회한에 묻힌 필적을 남겼다. 특히 '광장'의 '이명준'은 '한씨연대기'의 '한영덕'을 연상시킨다. 그어진 삼팔선 양편에 성립한 광기어린 체제는 평범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살려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북은 강력한 수령 지도체제가 마을단위까지 확장된 집단 정치의 장으로 장악되었고, 남은 북에 대한 반공과 일제의 잔재로 뭉친 지배층과 인민의 갈등이 속출하는 사회적 혼란과 부패의 장이었다. 2차대전 후 약소국들이 겪는 혼란의 전형을 한반도가 보여준 것이고, 이런 혼란은 지금도 이라크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에서 진행중이다.
겨울답지 않게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날씨라도 좀 추워야 연말 분위기가 나는데, 대선이라는 국가이벤트가 지나가자 기후도 싱겁게 돌아가는듯 하다. 이 국가 이벤트가 연말 분위기를 다 잡아 먹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예정된 참패를 겪은 후, 뉴스레터를 보내주는 한 신문은 여전히 하이에나의 근성을 못버리고 당선자의 흠집을 찾는데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기사도 상품과 마찬가지로 팔려야 한다는 '간절함'에서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민주주의를 상품화시키는데 이 신문이 기여한 바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도대체 민주의의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되어, 그 효력이 상실된, 폐장화폐에 불과한가?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던 김대중 정권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명분에 어울리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 상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말이 수평적 정권교체지, 넓게 보면 김대중 정권은, 자신이 비판했던 김영삼 정권과 마찬가지로 타협적 정권교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정권을 수여한 이 타협의 대상은 사실 전혀 자신의 힘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켰다. 즉, 역시 타협적 정권교체를 모색하다 드라마적으로 정권을 연장시킨 노무현 정권 뒤에서 이 정권을 조정한 것이다. 이제 미국중심의 불안정한 세계자본주의의 궤도에 개발독재로 이룩한 전시산업이라는 폭주기관차를 고속으로 운행시키는 시발역이 이명박 정권인 셈이다. 즉 양김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을 준비시킨 것이고, 다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흙먼지와 소음만 심해질 뿐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준비된 패배고 10년 정권의 몰락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본래 그렇게 흘러 가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에서 빗겨 가고 있다. 이 물음은 빗겨가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남한의 생활세계와 체제에 대한 모든 규정을 근거짓는 기초법의 제 1 원리, 제 1조항이기 때문이다. 저조한 득표율과 이에 따른 계파갈등을 겪는 민노당을 비롯, 허본좌라 불리는 대권과대망상증에 걸린 광대에게도 뒤지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한국사회당에서는 이런 근본적 물음을 들고 이번 대선을 치뤘다. 이런 물음을 내면화시키는 풍토가 선거기간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진다면, 적어도 10년~20년 후에는 지금과는 판이한 정치풍토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는 비단 한국사회당 만의 것이 아니다.
일은 외투다
겨울에 외투가 없으면 춥다
그래도 집에 오면 이 외투를 벗는다
이 외투를 위해서 살 필요는 없으나, 이 외투를 벗으려면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다.
벗어봤자 다른 외투를 입어야 한다면, 벗지 않는만 못하다.
물론, 좀더 비싸고 편안한 외투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한테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추위를 피할 동안은 이 외투를 꼭 껴입고,
봄날을 기다려야지.
검찰의 수사결과, 이명박이 김경준의 사기에 놀아난 것으로 실증되었다 해도, 이명박 자신이 설립했다고 자랑하고 다닌 투자회사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것은 뭐라고 할 것인가? 과연 금융기관이 김경준을 보고 투자했겠는가? 설령 얼굴마담 노릇만 한 것이라고 해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이 책임을 검찰은 아직도 도덕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만, 금융사기의 피의자로 몰릴 수 있는 후보에게 도덕이라는 말은 쟁점을 흐트러뜨리는 연막이다) 지금으로서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후보를 사퇴하고 차기를 노리는 것이다. 대선을 며칠 안남긴 시점에서 특감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로 치닫던 이 야만적 대선구도에서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는 것은 앞으로 고단스러운 일정을 예고한다. 거대 야당에게 압도적 지지가 몰린다고 해서, 강한 의혹의 중심에 놓인 후보로 정권을 탈환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수인지 알겠지만, 그들이 이런 수를 고수하는 근거는 그 여론조사 지지율 외에는 없다. 이명박 지지율에 이상이 생기면 손을 내밀 쪽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불확실한 지지율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17대 대선은 정치 후진국의 면모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로또행사, 대박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