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누군가에게 책 추천을 부탁받고 이리 저리 뒤적이다 함석헌의 책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어떻게 해서 함석헌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구내서점에서 '들사람 얼'을 사서 도서관에서 즐겨 읽었었다.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정신이 번뜩이는 말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이는 함석헌이 한국에 전무했던 계몽주의를 발흥시킨 인물로 보았지만, 계몽주의가 한국에 전무했다는 말은 지나치다. 분명 함석헌은 재조명이 필요한 한국의 계몽가이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후 혼란, 독재정권의 창궐이 진보를 향한 흐름을 막은 것이지 이런 흐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칸트가 말한 공적인 이성의 사용을, 죽음을 무릎쓰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유생에게서 볼 수 없겠는가? 현재로선 유교는 폐기처분할 유산이지만, 왜란과 호란을 겪기 전까지 조선에서 유교는 샤머니즘과 불교의 초현실적 세계관에 대척하면서 이상적 정치 질서를 만들기 위한 현실의 이념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남명과 퇴계의 학문이 실학, 나아가 동학과 만나지 못한 것이 조선의 불운이자 자생적 한계다. 이런 한계는 어떤 것에서 유래된 것일까?
예나시기 정신철학에서 청년 헤겔은 개별성을 극복한 단계로서 민족(Volk)을 말한다. 공동생활의 단계로서 민족, 국가는 개별성으로 축소될 수 없는 상태다. 개별자로 끊임없이 분리되는 곳에서 어떻게 공동의 이익이 나올 수 있는가? 따라서 국가 이전의 상태는 야만이다. 그런데, 국가가 성립해 있지만, 그 국가의 운영자들이 개별자로서의 자기 이해에 파묻혀 간다면 그런 국가도 야만적이다. 한국이 세계 10위의 군사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미래의 성장동력을 무기사업에서 찾는다는 비전으로, 새로 개발한 전차를 터키에 수출하기 위한 상담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의 무기상은, 터키가 이라크내 쿠르드족과 싸우면서 유가가 급등하는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유가 급등은 근본적으로 석유라는 한정된 자원과 이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근본적 원인이 있지만, 이런 야만적 세계질서 속에서 국가라는 체제가 개별성의 이해로부터 얼마나 침탈되는지 정도가 그 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버마의 정치 체제는 야만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겉으로 드러내 놓는 처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내부에선 이런 야만이 꿈틀대고 있는게 현실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정권의 변동기에 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