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철학사에서 칸트의 의미

칸트 Kant 2009. 11. 20. 09: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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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의 의의

근대 철학사에서 칸트가 주력했던 기획은 이성의 세가지 기능에 대한 비판적 작업으로 완결된다. 이론이성이 작용하는 방식과 그 한계를 규정한 순수이성 비판,  표상된 도덕법칙을 보편화 가능성에 견주어 의욕하는 실천이성 비판,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에서 각각 매개역할을 하는 판단력 비판이 그것이다. 이상의 비판은 이성의 세가지 기능에 대한 총체적 비판으로서, 인간의 인식이라는 주관 내에서 인식의 근거와 한계, 그리고 그것의 확장 가능성을 검토하는 의식철학의 체계화이다. 의식의 확실성, 즉 인식의 발전단계에서 발견되는 사유하는 자아로 모든 회의를 극복하는 단초를 삼아, 의식을 보편화하는 시도에 그친 데카르트에 비해 칸트는 의식을 제 현상을 규정하는 내적 사유 체계로 확장시키지만, 이런 확장은 의식 내에로의 확장이지 결코 대상 너머의 물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여전히 의식 철학의 한계 내에 묶여 있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칸트의 선험적 입장이 물자체로서의 타자를 지향하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주1). 또한 칸트의 의식 철학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실체의 두 존재방식을 통합시키려고 했던 데카르트의 의식 철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는데, 이것은 칸트가 이성에서 심리주의를 철저히 배격시켰다는 것이다. 경험적 현상에 대한 반복된 습성의 축적으로 오성의 법칙을 경험화시키려는 시도를 비판하면서 칸트는 이성의 자족성과 자율성을 정립시키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이성을 경험에 종속된 심리적 기능으로 격하시키려는 흄의 회의주의에 대한 반격이 순수이성비판을 기획한 칸트의 주요 동기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칸트의 이성주의가 흄의 경험주의에 대한 한낱 반사적 대응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순수이성비판』 곳곳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가 흄으로서,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주적으로 간주하다시피 논박하는 철학자이지만, 칸트의 기획은 근대 철학사에서 인식론에 기반해 전개된 제 사유체계에 대한 종합으로서 근대 인식론의 완성이라는 포괄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예를 들어  이런 종합의 하나로서, 선험적 논리학의 전개를 볼 수 있다. 즉 일반논리학은 이미 주어진 경험을 바탕으로 오성의 형식을 다루는 학이지만, 선험적 논리학은 경험 밖에서 이런 경험의 기원을 묻는다. 즉 선험적 논리학은 인식의 기원과 범위, 그리고 그 객관적 타당성을 다루는 학이다(B82).(주2)       

철학사적 배경

칸트 이전의 근대철학의 주요 흐름은 영국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으로 양분된다. 비록 영국에서 홉스의 유물주의에 반대했던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이 구분을 무력화시키는 사유의 움직임이 있지만, 일반적 흐름은 이러한 구분을 중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주3).  르네상스의 인문 부흥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의 곳곳에서 다양한 사유를 펼치는 철학자들이 대두되는데, 당대에 주요한 작업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후대에도 그 작업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철학자들을 코플스톤의 논의에 따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경우 홉스와 로크, 버클리, 그리고 흄이며, 서유럽 대륙의 경우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가 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 이전에 교회 중심의 봉건체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혁명적 사회상을 제시한 계몽사가로 볼테르가 있으며, 그를 필두로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지침 역할을 한 루소와  백과사전적 지식의 학풍을 일으킨 디드로가 칸트의 동시대인으로서 등장한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발견적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며,  수학에 기반한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데카르트 철학의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지만, 데카르트는 제 1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도덕도 확고한 기초 위에 세우려고 했으므로,  비록 칸트와 문제설정은 다르더라도 문제의식은 공유하고 있다. 홉즈는 유물론에 기반한 근대 사회계약이론의 선구자이므로 칸트의 정치철학에 있어 원초적 계약이론의 전거를 제공한 철학자이며(주4), 로크 역시 계약이론의 계승자이자 칸트의 정교한 인식론에 대해 단초를 제공했다. 『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특히 감성론)의 근본적 틀은 뉴톤에 의존해 있으며, 전반적으로 칸트가 뉴톤적 체계를 순수오성이 작동하는 인과적 세계와 이성에 의한 도덕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틀거리로 원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흄은 모든 인식의 기원과 그 원리를  경험으로 끌어 내려  비판하는 가장 예리한 경험주의자로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촉발시킨 주요 동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너머 실체로서의 신 또는 자연 중심의 일원론을 내세운 철학자로,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통합하는 사유의 체계화로 칸트의 업적에 견줄만한 평가를 받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중심으로 한 일원론적 설명으로 스피노자와 유사하지만, 예정조화설로 근대 합리론을 극점으로 끌어 올렸으며,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제자이자 칸트의 스승으로서  칸트의 법철학에 가장 근접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의 계몽사가들은 칸트와의 연관보다는 헤겔과 관련지어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주지하다시피, 헤겔에 비해 칸트는, 비록 그가 인식의 주관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를 둘러싼 독일 제후국과 유럽의 정세라는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게 자신의 사유체계를 완성해 나가는데 주력했으므로, 사회변혁의 이상을 제시하던 계몽사가나 청년 헤겔에 비해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현실과의 거리가 아직도 칸트의 철학이 가라타니 고진을 비롯한 현대의 사상가들한테 각광을 받는 한 요인일 수 있다. 또한 칸트는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까지 철학자가 응당 다루어야 하는 과제로 인식된 과학과 도덕, 미의 문제에 관해, 그 분명한 구분을 제시함으로써 제학문의 분화를 촉진시키는데 기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각주

1)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역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한길사, 2006), p.93-96.

2)순수이성비판』의 텍스트는 최재희의 번역본(박영사, 1997)에 의존해 있으며, 부분적으로 Weischedel판 Kant Werke 중 Band 3,4 를 참고했다.

3)근대 철학사에 관해서는 F. 코플스톤, 김성호 역 『합리론』(서광사, 2004)을 참조했다.

4)원초적 계약은 정언명법의 형식을 빌린 보편적 정의의 법칙(“너의 선택 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 법칙에 따라서 모든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도록 외적으로 행위하라” 『도덕형이상학』Weischedel판 8권 중 S.338.)으로서, 국가에 의한 합법적 제한으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 이런 보장에 의해 국가의 성립이 정당화된다. 달리 말해, 원초적 계약의 이념에 따라 정당화되는 공동체는 외적 법률 하에 자유가 상호보장되는 시민적 정치체제이며, 여기서 정당화되는 국가의 책무는 공동체의 안정적 유지에만 한정된다. 맹주만, “원초적 계약과 정의의 원리” 『칸트와 정치철학』(철학과 현실사, 2002) p.88-89, 95,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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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서울의 노예가 된 시골사람

영화 Film 2009. 11. 16. 10:4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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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공주 (My Mother The Mermaid)

감독 박흥식
출연 전도연, 박해일, 고두심
제작 2004 대한민국, 110분
평점

황지우는 첫 시집에서 장례로 고향 섬마을에 모인 친지의 북적거림을 구멍 하나가 일가를 이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섬은 사람을 낳지만 사람을 키우진 못한다. 섬 뿐인가? 서울은 마치 블랙홀처럼 국토 곳곳의 자양분을 빨아 들인다. 섬에서 비록 풋풋하더라도 인어공주처럼 살았던 처자가 서울에서 때밀이로 사는 것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현상에 대한 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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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변호란 것이 원래 법률상으로는 허용되고 있지 않고 다만 묵인되고 있는데, 적어도 묵인으로 해당 법조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에조차 논쟁이 있는 형편이지요...제일 중요한 것은 변호사의 개인적인 연줄이며, 거기에 변호의 주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어떤 점에서 보면 그들은[재판소 사람들] 오히려 변호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밀 재판을 고집하고 있는 재판 조직의 단점이 드러나고 있는 거지요. 이들 관리들은 주민들과의 관계가 없어요. 보통의 중간급 소송에 대해선 그들은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 소송은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되며 가끔 한 번씩 떼밀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극히 간단한 사건에 대해서도 그들은 극히 힘든 사건에 처한 것만큼이나 당황합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계속 법에 얽매여 있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건엔 그런 인식이 꼭 필요한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변호사에게 오는데 그들 뒤에는 사환이 평소에는 어디까지나 비밀로 해두었던 서류를 들고 따라옵니다...재판사건이란 어디서 왔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 시야에 나타났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계속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소송 단계, 마지막 판결 그리고 그 판결 이유 등을 연구해서 알아낼 수 있는 교훈 따위는 이들 관리들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법으로 자기네에게 한정되어 있는 소송 부분만 취급할 뿐이고, 그 이상의 일, 그러니까 자기네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소송이 끝날 때까지 대개 피고와 연결되어 있는 변호사보다도 적게 알고 있습니다...아주 단순한 사람까지도 소송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개선책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다른 데다 쓰면 훨씬 낫게 쓸 수 있는 시간과 정력을 소송에 낭비해버리기가 일쑤입니다...비록 개별적인 일들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해도-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그런 것은 기껏해야 나중에 다른 피고인들에게 약간 도움은 될지언정 당사자는 항상 복수만 생각하고 있는 관리들의 특별한 주의를 끌게 되어 너무나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어느 정도는 항상 떠 있는 상태라는 것...한편 그 커다란 조직 자체는 그런 사소한 장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전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보완을 하고, 더 잘 결속되든가 더 사악하게 되는 일은 없다 하더라도 본래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변호사에게 일을 맡겨 두십시오. 

카프카, <소송>, 이주동 역(솔, 2006), 12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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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연속으로서의 동학

단상 Vorstelltung 2009. 11. 10. 10:3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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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삼의 <동학2: 해월의 고난 역정>(통나무, 2005)을 읽고 있다. 이필제가 주도한 변란에 연루되어 와해 위기에 놓인 동학 일당은 관군의 포위망을 피해 영서 일대의 산골짜기로 도망쳐 다니던 해월과 강수에 의해 재건된다. 이 재건의 구체적 방식은 각종 제례의 형식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유학의 제례를 준거로 하면서 이것의 의미와 형식을 개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각종 명목으로 제례를 치루면서 동학의 도인들은 자연스럽게 모이고 앞날을 모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즉 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제례는 정신적이자 물리적인 집결의 수단인 셈이다. 예배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신 안에 모셔진 한울님이란 거룩한 의식 전환이 너무도 거룩하게 집전이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지 만고에 편재해 있는 신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무속신앙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동학혁명의 정신적 이념으로서 인간존중의 선언이란 면에서 동학의 의의가 있지만, 제례와 결합된 무속화된 양식은 곤혹스럽다. 샤머니즘의 주체화 내지 내재화가 인류 보편의 시원적 문화에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동학은 원시 종교로 회귀하려는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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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과 예수의 닮은 꼴

단상 Vorstelltung 2009. 11. 4. 10:4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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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삼의 <동학1 : 수운의 삶과 생각>을 읽고 있다. 수운은 19세기 초반, 가세가 기울어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20대에는 장사꾼으로 삼남일대를 누비다가, 30대에 들어서 제철사업에 잠깐 뛰어들었다가 망하고, 본격적인 수행생활로 들어간다. 삼십대 후반 용담에서 득도를 하고 강론을 펼치면서 수많은 도인들이 수운에게 모여 들었다. 시기적으로는 이제 20세기를 문턱에 둔 시기이지만 조선 말기의 향촌, 더군다나 영남 일대는 여전히 유학을 숭배하는 사대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학도와 유학도의 관계는 마치 예수와 바리새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수운은 30대의 나이에 예수와 흡사한 창도의 과정을 겪고, 제자를 거느렸으며, 관의 탄압을 받고 순교했다. 수운에게 도통을 받은 해월은 어떻게 보면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동학은 농민전쟁과 결합되어 혁명으로 나갈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몇백년에 걸친 탄압을 견디고 로마의 국교로 수용된 기독교에 비해 동학의 고난기는 매우 짧다. 동학은 천도교라는 제도 종교로 수용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있어 신분에 귀천이 없다는 동학의 주장은 신분질서가 아직도 강하게 자리잡았던 조선 말기에는 너무도 혁명적이었지만, 이제는  이런 주장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종교적으로 세우려는 주변부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뿐이다. 굳이 동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이미 프랑스 혁명에서 선언되었으며, 근대법은 이런 혁명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종교적 코뮤니즘으로서 동학이 보여준 실천들은 귀감이 된다. 500년을 내려운 유교지배체제를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 사건이다. 

동학은 유학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유학의 내부에서 분출한 것이다. 유학이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고립의 길로 나갈 때,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은 동학이나 유학에게 위협의 사상으로 인식되어 졌다. 동학은 이 서학과 동학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운은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해서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근대적 주체 선언을 비로서 자생적으로 한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 체험의 형태로 시작된 점은 시대적 한계이지만, 몰락하는 조선이 스스로 변혁하지 못한 채 끌고가는 신분사회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인민이 들고 일어서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으로서 작용한 것이다.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동학은 이필제라는 모사꾼에 휘둘려 수운을 필두로 억울하게 숨진 동학교도의 복권을 위한 교조신원운동으로 변란에 가담한다. 병인양요는 강화도에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8,000명의 천주교도가 학살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가 강화도에 함대를 파견한 데서 시작된다. 이후 한강 하구를 점령한  소규모 프랑스 군대를 포수를 앞세운 관군이 몰아낸다.  작은 승리에 도취된 애국주의는 결국 망국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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