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야노동의 기억

단상 Vorstelltung 2023. 9. 22. 09: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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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여름 한 달, 약  반년 넘게 일한 평택현장의 한 전기팀에서 나와 잠깐 동일현장의 수장 숙식 철야조에서 일했다. 낮밤이 완전히 바뀐 생활이었는데, 기대했던 벌이에 비해 생체리듬의 붕괴와 팀내 우발사항으로 오래 일할 수 없었다.

일단 단가가 하루 8시간 2공수인 것이 미끼다. 숙소에서 오후 5시쯤 나와 저녁을 먹고 오후 8시부터 일한다. 중간  휴게시간 2시간을 빼고 오전 6시에 일이 끝난다. 시간만 놓고 보면 매력적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주간현장에 비해 야간 현장은 얼마나 한산한가. 평택삼성현장에서 주간에 2시간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점심을 먹는 일은 한바탕 전쟁이지만 야간은 이런 일이 없다. 이 시각에 현장 식당 자체가 운영이 안되고 주변에 즐비한 노점상도 잠들어 있기 때문에 뭔가 먹으려면 도보로 20~30분 거리의 편의점에 가야한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식사는 거르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곤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흐르고 아침 퇴근 후 지정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씻고 바로 누우면 간밤의 극심한 피로감에 금방 잠이 들지만 4시간 이상은 못자고 일어나곤 했다. 중간 중간 들락거리는 숙소 사람들 때문 이기도 하지만 낮에 깊히 잠들 수 없는 사정도 있다. 이렇게 몇주간 생활하다 갑자기 숙소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숙소배정에 관한 소통에 문제가 생겨  하루에 2번이나 숙소를 바꾸는 일이 생겼고, 결국 배정받은 숙소는 내가 일하는 팀이 주로 쓰는 숙소였다.

복층 다세대 주택은 신축이긴 했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되서 매우 지저분했다. 결국 생활리듬의 붕괴와 새 숙소배정에 반감이 생겨 다시 새로운 전기팀을 알아보고 그만뒀다. 장구류를 반납하기 위해 하청 회사 사무실을 방문해야 했는데 뜻밖에도 두 명의 직원이 나에게 친절하게 무슨 어려움이 있냐고 하면서 좀더 더 일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사실 수장일이 육체적으로 더 고된 점은 있으나 철야노동이 맞지 않아서 그만둔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잠시 함께 일한 60대에서 20대 사이의 동료들은 무난한 편이었고 팀장은 솔선수범형이었지만 뭔가 뒤틀린 일이 생기면 우악스러운 성깔을 터트리곤 했다. 그냥 견디고 계속 있었으면 사람들과도 그럭저럭 익숙해 질 수 있었을 것이지만, 더워지는 여름, 철야노동을 위한 한낮의 서늘한 휴식은 피곤함과 공허함이 먼지처럼 쌓여가는 시간이었다.

한주간의 철야작업이 끝나는 어느 토요일 아침, 식당에서 소주 일병을 하며 밥을 먹는 나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평택현장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20대 동료는 핀잔을 줬다. 아마도 철야노동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그에게 말했던것 같다. 건강생각하는 양반이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냐는 것이다. 친구여, 이 정도는 한주간의 고되 노동 이후에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이라네. 이런 맛도 없다면 이런 생활이 얼마나 갑갑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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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비평5 : 헌법 1조 1항

주장 Behauptung 2023. 7. 24. 05:4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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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국정농단으로 몰락하던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시위대의 전면에서 행진하던 방송차가 불빛 탄환으로 퍼부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과 2항을 선전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항을 탈취하고 전유함으로써 최고권력을 잡은 것은 능수능란한 정치적 사법기관이었다. 마치 4-19혁명의 성과를 정치적 군부가 가져갔듯이 말이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권력에 집중하는 근성에 철저했다. 권력을 향한 비상한 수와 열망은 정치를 업으로 삼는 집단에겐 필수불가결한 동력일지 모르나 권력의 목적, 그러니까 쟁취한 권력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 계획과 비전이 모호한 것은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의심받기 충분하다. 박정희 군부는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구호적 명분으로 모든 것을 억압할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되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따위의 민간에 대한 숱한 군사조치들은 말할것 없고 파독 광부와 월남파병에서부터 정적 제거와 납치, 나아가 종신 집권을 위한 헌법개정까지. 목적의 정당성이 그 수단의 부당성으로 무너지는데는 18년이 걸렸다. 사업이 잘 되기 위해 사업의 종사자들을 혹독히 착취하는 악덕 업주의 사업논리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고전적 사업 비법이기도 하다. 일인의  희생이 만인을 구원의 길에 올렸다는 복음서의 기조와 정반대로 만인의 희생 위에 국가와 기업의 번성을 위한 토대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압도적 지지율에서 보듯 기꺼이 억압을 수용하는 대중적 기세는 이른바 보수정권의 든든한 기반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의 저 기생적인 괴물정권이 태동한 토양이기도 하다.

나선형으로 인류사는 진보하다는 헤겔의 역사관은 방향성은 진보이지만 과거사의 누적과 과거로의 퇴보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하다. 이래서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가 등장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실 아무리 보수적인 지향을 지닌 사람이라도 변화와 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길 지언정 이를 뒤늦게라도 수용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박물관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변화의 속도에 대한 인정의 시점이다. 빠른 인정은 급진적이고 방어적 인정은 중도적이며 폐쇄적 인정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정권은 마치 캐비넷에서 자신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적시적절한 서류를 언제든 뽑아내는 검찰의 전능처럼, 권력의 창출을 위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줄타기에서 성공했다. 국정농단의 혜택을 본 이른 바 진보정권을 등에 업고 있다 가차없이 숙주를 베어버리고 보수로 갈아탔다. 하지만 권력의 유지를 위해 언제까지 보수에만 기댈 수 없다. 적절한 시점에서 숙주를 교체해야 한다. 즉 그들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헌법 1조 1항의 의미는 헌법 1조 2항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민주공화국이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국가라고. 주권이 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점에서 군주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지만, 천황의 지위는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는 일본헌법 1조도 주권제민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와 유사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정은 그렇다 치고, 일본헌법 1조는 권력의 이동방향을, 비록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더라도 천황에게로 명시한 점에서 보다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권력의 이동방향을 명시하지 않은 채 권력의 근원만을 밝히는 민주공화국은 어느 누구에게로 권력의 총의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카오스에 직면한다. 얼마든지 합법적이고 기술적으로 조작가능한 여론조사의 영향을 받는 투표율은 악마같은 집단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의회 무장침탈을 선동했어도 재선에 당당히 도전하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만 봐도 그렇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지만, 민주공화국의 의미가 아직 제대로 밝혀 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끊임없는 실천의 결과로도 헌법의 완성은 요원한 일이라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민주공화국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참고로 루만은 민주주의란 상위의 권력이 하위의 권력에 예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율배반적인 권력관으로 보이지만, 권력들 간의 견제를 암시한다. 그런데 국민에게 권력과 관련되어 투표권 외에 도대체 무슨 권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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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역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그린비 2013.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사위 놀이같은 신의 자의적 선택론(예정설)의 비유로 도공과 도자기의 예를 든다. 도자기는 도공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하등의 권리가 없는 것이, 만든 자의 판단과 선택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의식을 가진 것이라면, 더군다나 최근 식물에게서도 소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마당에 최소한 푸념으로라도 자신의 제작자에게 따져 물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나를 왜 이렇게,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만들었냐'고. 이런 물음 자체도 창조자가 거부한다면, 창조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심각한 결함이라도? 선택받지 않을 자는 도대체 왜 창조를 했던 것일까?

로마서에서 예정설의 전거를 마련한 바울은 혹시 이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로마서 7:19-20) 공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창조의 실수를 수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의 구원관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선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창조주의 의중을 자신을 위해 전용한 것으로, 임의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받음에도 한정된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다 단순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래야 선택된 민족 편협적인 구원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 죄와 속죄(대속),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완결구도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벤야민의 신학정치 단편, 니체와 프로이트의 반그리스도적 바울론을 통해 타우베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으로 판결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라는 파국과 창조의 덧없음에 관한 벤야민과 바울의 공감, 죄의식과 원한감정으로 바울을 몰고가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부정적 바울 해석에 대한 진중한 평가다.

나는 타우베스의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참조해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의 연약함에 따른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드러내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근거해 타우베스는 바울의 천재성을 발견한다(133-134쪽). 이것은 비단 구원에 대한 인간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바울이 율법을 죄와 동일시할 정도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 도자기와 도공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사도는 토기장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묻는다(로마서 9:20-21). 이 물음은 창조자가 의도적이자 일방적으로 피조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언이다. 그렇다면 창조에 실수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결정과 행위에 실수를 물을 수 없더라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감히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해도 요청, 설득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불완전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신체를 타고 난 인간이 저마다의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파국을 몰고 올 메시아의 재림이 계속 연기되듯이, 신에게 어떠한 조치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개별인간의 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후의 실천적 방안이다. 창조의 불완전함이 새로운 약속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 바, 그 교리적 매개는 신체를 타고 났지만 부활한(죽음을 이겨낸), 그래서 신이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열방은 구원의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사랑의 빚 외에 타인에게 질 빚이 없다면 법은 완성되는 것(로마서 13:8-9)일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한다(아감벤에 의하면 법의 작용정지katargeín).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법의 역설적 상태로 말이다. 법의 이러한 '마비상태'는 법의 문을 끈질긴 인내로 닫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카프카의 시골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현존질서의 현실적 근거인 법, 법의 작동은 그래서 또한 죽음의 법이다(고린도전서 15:56). 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끝, 나아가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할 수 없는 한 법의 문은 닫혀 있더라도 언제든 열려질 수 있는 상태다. 시간의 끝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고는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것을 사고할 때 빠지게 되는 이율배반처럼 그 사고 자체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소멸하면서도 썩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했다는 타우베스에 대한 역자의 해석(304쪽)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기 삶의 종점에 다다른 이 유대철학자는 혹시 자신의 유한성을 시공의 유한성으로 해석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한생성론을 주장하는 니체에게 인류의 역사란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순간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도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바울에서 마르치온과 벤야민, 그리고 타우베스로 이어지는 메시아주의는 경험 밖의 문제설정으로 경험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상적 실천의 전략일까? 이런 전략은 아도르노의 미학적 방법과 얼마나  다를까? 탈가치화로 종교가 쇠퇴하는 시점이라해도  메시아주의는 그래도 교회와 신도라는 기반이 있다. 비록 지지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학은 순수한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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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도시의 철학과 사람들

단상 Vorstelltung 2023. 6. 12. 00:5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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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의 전설적 선배, 개설된지 얼마 안된 과의 단년 대표까지 역임한 그는 당시로서는 알콜중독자로 보였지만, 그때의 그에 버금갈 정도로, 대개의 중장년이 그렇듯이 매일 알콜을 주식처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는 다만 조금 일찍 달린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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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벤야민은 예술이 기술에 종속되는 시대적 양상을 대중이 정치기술에 종속하는 양상과 병치시킨다. 회화가 선사했던 주의와 집중, 명상을 대체해 영화는 분산과 오락, 기분전환을 대중에게 유포하는데, 이러한 역할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레타리아가 정치의 전면에 수용되는 듯한 효과다. 그러나 영화가 삶에 어떤 기여를 하기 보다는 삶을 잠시 배제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정치도 결정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소유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지배자 숭배라는 쇼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복제에 대한 벤야민의 직관은 오늘의 시대에 별로 신선하지 않다. 선거때마다 트로트를 개작해 터트리는 이곳에서 문화는 상업을 넘어 정치선동에 자연스럽게 이용되는 풍토다. 오히려 유일성, 현존으로서의 예술은 부유층의 관심어린 투자 목록속에서 향락된다. 예술을 관람하는 분위기로서의 아우라는 여전히 전시장과 교회에서 작용하고 있고 외부인을 차단한 소굴화된 전시공간이 어딘가에서 횡행하고 있겠지만, 이제 예술가는 건축가처럼 작품의 사용성과 촉각성에 열려 있다. 더이상 시각의 대상으로서만  음미되는 예술은 이제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며 유아적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전은 시각의 정밀화를 가져왔다. 벤야민이 회화와 영화의 사이에, 그리고 마술과 외과술 사이에 놓은 간격은 날이 갈 수록 더 벌어질 뿐만 아니라 영화와 외과술의 결합으로 영상의학이라는 분과학도 나왔다.  카메라는 은하 너머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내장에도 시선을 투과한다. 예술은 극단화되는 과학의 발전 앞에서 더이상 은밀한 부분을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제의 기술은 단지 이미지의 이미지들을 대량 생산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제품의 기원을 더이상 원본에서 유출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려 놓는다. 또한 더이상 해당 분야의 전문가만이 글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글을 쓰는 기계도 충분히 가능한 세상이다. 따라서 예술의 종말은 작가의 종말도 포함한다. 집단창작이라는 방식은 이러한 기계적 창작의  원시적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한 편의 글에서  분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업은 기계적 방식의 원초적 형식이므로, 분업화된 글쓰기는 아직은 수공업적인 기계적 생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적 생산도 자동생산체제로 급변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니다. 프로그램화된 글쓰기 환경에서 작가는 주제와 핵심어, 연결어 몇개를 선택해서 컴퓨터가 알아서 글을 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라의 몰락, 회화의 종말, 작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우라는 횡행하며 회화는 생산되고 작가는 활동한다. 이들을 넘어서는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낙후한 창작들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기술의 장막에 가려질 뿐이다.  아니 오히려 기술의 장막에 침을 뱉으며 자신의 전통적 의례에 집전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기내에서 잠꼬대로 자신은 헤험을 쳐서 대륙을 횡단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작품의 생산과 향유의 조건을 날이 갈수록 변화시키는 기술복제와 기술진보의 시대는 마치 발을 담그자 마자 원래 서 있으려 했던 지점이 저 멀리 흘러가 버리는 거침없는 강물같다.

200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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