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비평5 : 헌법 1조 1항

주장 Behauptung 2023. 7. 24. 05:4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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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국정농단으로 몰락하던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시위대의 전면에서 행진하던 방송차가 불빛 탄환으로 퍼부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과 2항을 선전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항을 탈취하고 전유함으로써 최고권력을 잡은 것은 능수능란한 정치적 사법기관이었다. 마치 4-19혁명의 성과를 정치적 군부가 가져갔듯이 말이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권력에 집중하는 근성에 철저했다. 권력을 향한 비상한 수와 열망은 정치를 업으로 삼는 집단에겐 필수불가결한 동력일지 모르나 권력의 목적, 그러니까 쟁취한 권력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 계획과 비전이 모호한 것은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의심받기 충분하다. 박정희 군부는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구호적 명분으로 모든 것을 억압할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되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따위의 민간에 대한 숱한 군사조치들은 말할것 없고 파독 광부와 월남파병에서부터 정적 제거와 납치, 나아가 종신 집권을 위한 헌법개정까지. 목적의 정당성이 그 수단의 부당성으로 무너지는데는 18년이 걸렸다. 사업이 잘 되기 위해 사업의 종사자들을 혹독히 착취하는 악덕 업주의 사업논리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고전적 사업 비법이기도 하다. 일인의  희생이 만인을 구원의 길에 올렸다는 복음서의 기조와 정반대로 만인의 희생 위에 국가와 기업의 번성을 위한 토대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압도적 지지율에서 보듯 기꺼이 억압을 수용하는 대중적 기세는 이른바 보수정권의 든든한 기반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의 저 기생적인 괴물정권이 태동한 토양이기도 하다.

나선형으로 인류사는 진보하다는 헤겔의 역사관은 방향성은 진보이지만 과거사의 누적과 과거로의 퇴보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하다. 이래서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가 등장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실 아무리 보수적인 지향을 지닌 사람이라도 변화와 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길 지언정 이를 뒤늦게라도 수용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박물관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변화의 속도에 대한 인정의 시점이다. 빠른 인정은 급진적이고 방어적 인정은 중도적이며 폐쇄적 인정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정권은 마치 캐비넷에서 자신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적시적절한 서류를 언제든 뽑아내는 검찰의 전능처럼, 권력의 창출을 위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줄타기에서 성공했다. 국정농단의 혜택을 본 이른 바 진보정권을 등에 업고 있다 가차없이 숙주를 베어버리고 보수로 갈아탔다. 하지만 권력의 유지를 위해 언제까지 보수에만 기댈 수 없다. 적절한 시점에서 숙주를 교체해야 한다. 즉 그들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헌법 1조 1항의 의미는 헌법 1조 2항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민주공화국이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국가라고. 주권이 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점에서 군주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지만, 천황의 지위는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는 일본헌법 1조도 주권제민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와 유사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정은 그렇다 치고, 일본헌법 1조는 권력의 이동방향을, 비록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더라도 천황에게로 명시한 점에서 보다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권력의 이동방향을 명시하지 않은 채 권력의 근원만을 밝히는 민주공화국은 어느 누구에게로 권력의 총의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카오스에 직면한다. 얼마든지 합법적이고 기술적으로 조작가능한 여론조사의 영향을 받는 투표율은 악마같은 집단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의회 무장침탈을 선동했어도 재선에 당당히 도전하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만 봐도 그렇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지만, 민주공화국의 의미가 아직 제대로 밝혀 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끊임없는 실천의 결과로도 헌법의 완성은 요원한 일이라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민주공화국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참고로 루만은 민주주의란 상위의 권력이 하위의 권력에 예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율배반적인 권력관으로 보이지만, 권력들 간의 견제를 암시한다. 그런데 국민에게 권력과 관련되어 투표권 외에 도대체 무슨 권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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