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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역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그린비 2013.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사위 놀이같은 신의 자의적 선택론(예정설)의 비유로 도공과 도자기의 예를 든다. 도자기는 도공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하등의 권리가 없는 것이, 만든 자의 판단과 선택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의식을 가진 것이라면, 더군다나 최근 식물에게서도 소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마당에 최소한 푸념으로라도 자신의 제작자에게 따져 물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나를 왜 이렇게,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만들었냐'고. 이런 물음 자체도 창조자가 거부한다면, 창조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심각한 결함이라도? 선택받지 않을 자는 도대체 왜 창조를 했던 것일까?

로마서에서 예정설의 전거를 마련한 바울은 혹시 이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로마서 7:19-20) 공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창조의 실수를 수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의 구원관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선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창조주의 의중을 자신을 위해 전용한 것으로, 임의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받음에도 한정된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다 단순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래야 선택된 민족 편협적인 구원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 죄와 속죄(대속),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완결구도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벤야민의 신학정치 단편, 니체와 프로이트의 반그리스도적 바울론을 통해 타우베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으로 판결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라는 파국과 창조의 덧없음에 관한 벤야민과 바울의 공감, 죄의식과 원한감정으로 바울을 몰고가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부정적 바울 해석에 대한 진중한 평가다.

나는 타우베스의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참조해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의 연약함에 따른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드러내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근거해 타우베스는 바울의 천재성을 발견한다(133-134쪽). 이것은 비단 구원에 대한 인간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바울이 율법을 죄와 동일시할 정도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 도자기와 도공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사도는 토기장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묻는다(로마서 9:20-21). 이 물음은 창조자가 의도적이자 일방적으로 피조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언이다. 그렇다면 창조에 실수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결정과 행위에 실수를 물을 수 없더라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감히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해도 요청, 설득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불완전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신체를 타고 난 인간이 저마다의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파국을 몰고 올 메시아의 재림이 계속 연기되듯이, 신에게 어떠한 조치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개별인간의 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후의 실천적 방안이다. 창조의 불완전함이 새로운 약속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 바, 그 교리적 매개는 신체를 타고 났지만 부활한(죽음을 이겨낸), 그래서 신이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열방은 구원의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사랑의 빚 외에 타인에게 질 빚이 없다면 법은 완성되는 것(로마서 13:8-9)일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한다(아감벤에 의하면 법의 작용정지katargeín).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법의 역설적 상태로 말이다. 법의 이러한 '마비상태'는 법의 문을 끈질긴 인내로 닫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카프카의 시골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현존질서의 현실적 근거인 법, 법의 작동은 그래서 또한 죽음의 법이다(고린도전서 15:56). 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끝, 나아가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할 수 없는 한 법의 문은 닫혀 있더라도 언제든 열려질 수 있는 상태다. 시간의 끝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고는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것을 사고할 때 빠지게 되는 이율배반처럼 그 사고 자체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소멸하면서도 썩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했다는 타우베스에 대한 역자의 해석(304쪽)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기 삶의 종점에 다다른 이 유대철학자는 혹시 자신의 유한성을 시공의 유한성으로 해석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한생성론을 주장하는 니체에게 인류의 역사란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순간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도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바울에서 마르치온과 벤야민, 그리고 타우베스로 이어지는 메시아주의는 경험 밖의 문제설정으로 경험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상적 실천의 전략일까? 이런 전략은 아도르노의 미학적 방법과 얼마나  다를까? 탈가치화로 종교가 쇠퇴하는 시점이라해도  메시아주의는 그래도 교회와 신도라는 기반이 있다. 비록 지지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학은 순수한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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