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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벤야민은 예술이 기술에 종속되는 시대적 양상을 대중이 정치기술에 종속하는 양상과 병치시킨다. 회화가 선사했던 주의와 집중, 명상을 대체해 영화는 분산과 오락, 기분전환을 대중에게 유포하는데, 이러한 역할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레타리아가 정치의 전면에 수용되는 듯한 효과다. 그러나 영화가 삶에 어떤 기여를 하기 보다는 삶을 잠시 배제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정치도 결정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소유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지배자 숭배라는 쇼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복제에 대한 벤야민의 직관은 오늘의 시대에 별로 신선하지 않다. 선거때마다 트로트를 개작해 터트리는 이곳에서 문화는 상업을 넘어 정치선동에 자연스럽게 이용되는 풍토다. 오히려 유일성, 현존으로서의 예술은 부유층의 관심어린 투자 목록속에서 향락된다. 예술을 관람하는 분위기로서의 아우라는 여전히 전시장과 교회에서 작용하고 있고 외부인을 차단한 소굴화된 전시공간이 어딘가에서 횡행하고 있겠지만, 이제 예술가는 건축가처럼 작품의 사용성과 촉각성에 열려 있다. 더이상 시각의 대상으로서만  음미되는 예술은 이제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며 유아적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전은 시각의 정밀화를 가져왔다. 벤야민이 회화와 영화의 사이에, 그리고 마술과 외과술 사이에 놓은 간격은 날이 갈 수록 더 벌어질 뿐만 아니라 영화와 외과술의 결합으로 영상의학이라는 분과학도 나왔다.  카메라는 은하 너머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내장에도 시선을 투과한다. 예술은 극단화되는 과학의 발전 앞에서 더이상 은밀한 부분을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제의 기술은 단지 이미지의 이미지들을 대량 생산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제품의 기원을 더이상 원본에서 유출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려 놓는다. 또한 더이상 해당 분야의 전문가만이 글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글을 쓰는 기계도 충분히 가능한 세상이다. 따라서 예술의 종말은 작가의 종말도 포함한다. 집단창작이라는 방식은 이러한 기계적 창작의  원시적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한 편의 글에서  분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업은 기계적 방식의 원초적 형식이므로, 분업화된 글쓰기는 아직은 수공업적인 기계적 생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적 생산도 자동생산체제로 급변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니다. 프로그램화된 글쓰기 환경에서 작가는 주제와 핵심어, 연결어 몇개를 선택해서 컴퓨터가 알아서 글을 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라의 몰락, 회화의 종말, 작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우라는 횡행하며 회화는 생산되고 작가는 활동한다. 이들을 넘어서는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낙후한 창작들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기술의 장막에 가려질 뿐이다.  아니 오히려 기술의 장막에 침을 뱉으며 자신의 전통적 의례에 집전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기내에서 잠꼬대로 자신은 헤험을 쳐서 대륙을 횡단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작품의 생산과 향유의 조건을 날이 갈수록 변화시키는 기술복제와 기술진보의 시대는 마치 발을 담그자 마자 원래 서 있으려 했던 지점이 저 멀리 흘러가 버리는 거침없는 강물같다.

200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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