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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독해 : 바울과 모세, 새로운 신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다
1장 <로마서>의 수신자
1.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로서의 복음 : <로마서>1장 1~7절 독해
33쪽 공로 보다는 믿음, 그것의 내적 논리
35 바울의 귀향(유대교로의), 저자의 과업
41  율법에 대한 도발적 변주-믿음의 복종
44 서신의 전략-권력 중심부 타격
45 카이사르 숭배에 대한 공격
46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은 카이사르 숭배에 대한 항의

2.예루살렘과 세계선교의 정당성 : <로마서> 15장 30~33절 독해
51 13번째 사도로서의 정당화 요구-예루살렘 공동체로의 직접 헌금
보유 :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의 운명
58 이슬람 전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유대교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융화

2장 노모스 : 법과 정당화-<로마서>8~11장 독해
60 로마서에서 율법의 개념 : 정치신학 gegen 노모스 신격화
62 바울에게 율법의 의미-시대 보편성
63 그리스적 유대교적 헬레니즘적 선교신학의 타협안에 대한 바울의 거부

3장 선태과 파문-<로마서>8장 31절~9장 5절 및 <탈무드>b. 베라코트 32a절 독해
77 동족의 생존을 위한 파문의 각오-모세, 바울(정당화 작업)
81 토라의 주제-신의 분노로부터의 피신(속죄)
     바울의 이야기는 화해, 욤 키푸르(화해의 날)
92 바울과 모세의 공동문제 봉착-백성의 죄(욤 키푸르 전례와 바울의 문제)
93 이스라엘의 질투 유도 :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닌,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넘어간 자로서의 사명

4장 프네우마 : 구원사의 능가와 이 세계의 극복-<로마서>9장~13장 독해
97 예표론적 능가전략 : 모방의 구원사(신약)
      모세를 능가하려는 바울(고린도후서)
98 바울의 경쟁상대는 예수가 아닌 모세-공통의 과업, 새로운 민족을 세우는 일
99 정적주의의 깊이
102~106 헤겔과 상이한 바울의 정신Geist
107~109 문헌학적 성서/철학 비판(역사적 의미만 인정)-스피노자, 니체
113~114 화해의 날의 전례 : 신의 절멸의 맹세에 대한 철회요구 기도, 바울의 비슷한 시도(로마서 9~13장)
120 로마서 9장~11장 구약인용의 목적은 질투의 드라마 상연. 유대인의 죄->이방인의 구원->이방인 질투(로마서 11장11절)
124 칼 슈미트의 반유대주의의 근거 : 서기 70년 이후 교회가 망각한 변증법,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공적인 의를 위해 하나님의 적이 되었었던 것
128~130 바울의 세계사에 대한 묵시론적 태도 : 구원(재림)의 근접에 따른 hos mä(마치 아닌듯이), comme si

유투브 서평 영상 링크(아래)

https://youtu.be/c9MZOokZAtw?si=6jzwCUa_9uq6pu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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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티니 고진, 윤리21

칸트 Kant 2024. 3. 19. 07:2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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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윤리 : 영미 경제학을 넘어서

'인정투쟁'에서 악셀 호네트는 헤겔의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원자적 개인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기술한다. 원자적 개인인주의는 고립된 주체들로 이루어진 이론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므로, 실제적인 세계,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된 세계를 배경으로 할 수는 없다. 칸트 철학의 지적 계보를 놓고 보면, 칸트는 호네트를 포함한 독일의 비판 이론 계열에서 헤겔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미의 윤리학에서 칸트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물론 해외와 국내의 철학 석박사 학위 논문을 놓고 보면, 칸트 철학에서 주제를 잡은 논문들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지만, 칸트를 확장된 지평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독창적 작업을 보여준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앞서 말한 칸트 윤리학의 원자적 개인주의적 규정은 가라타니 고진에게 말도 안되는 기술로 격하될 것이다. 그는 칸트의 준칙의 보편화 가능성에서, 보편화를 특정 역사에서 배태된 공통감각에 묶여 있으면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특정 사회나 공동체에 예속된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을 위한 윤리라는 것이다. 그런 윤리가 과연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칸트의 실천이성에 쫓는다면, 그러한 윤리는 새롭게 창출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이나, 분석철학을 하는 이들에게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칸트 해석에는 심한 비약과 과장된 해석, 왜곡된 전용이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가라타니를 기만적 학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고전이 초월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이것이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 적합성을 갖고서 해석될 수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특정한 해석으로 칸트를, 마르크스를 가두려는 것은 교조주의의 발흥을 의심케 한다. 물론 이런 철학자들을 정밀하게 읽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칸트에게서 칸트를 넘어서는 관점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비판의 대상은 되겠지만 비아냥 거릴 만한 일은 아니다. 비판은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이중성으로 돌아가는 기계이지만, 비아냥은 결국 자신의 무지만을 폭로할 뿐인 불안한 심정이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관통하지 않고서 칸트에 관한 피상적 독서와 풍문으로 칸트를 규정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나,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은, 자기 확신에만 젖은 이해일 뿐이다. 칸트에 관한 글을 본지 꽤 오래되었지만, 정작 아직 세 비판서를 섭렵하지 못한 내가 '실천이성비판'과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도중 정리되지 않은채 파고드는 생각은(물론 나만의 생각은 아니지만) 칸트의 근본적 관심사는 윤리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윤리학은 종래의 윤리학이 아니다. 영미 경제학이 효용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를 바탕의 윤리학으로 깔고 있다는 점은, 이 새로운 윤리학을 암시한다. 비록 영미 경제학은 엄연히 분과된 경제학이지만, 분명 그 설명방식에 있어 기본으로 가정한 개인은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공리주의를 내포하는 것처럼, 이 새로운 윤리학은 이론적 인식과 보편적으로 추구할 만한 실천을 동시에 보려는 것이다. 즉 이 새로운 윤리는 경제학과 철학의 결합, 도무지 섞일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마르크스와 칸트의 결합이다.

이 결합의 단초로 가라타니가 짚는 대목은 '윤리형이상학 정초'에 있다. "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BA, 67/IV-429)  '네 자신의 인격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인간을 수단으로서 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한국에서 칸트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이는 이 유명한 구절을 '너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는 다분히 도덕주의적 훈계조로 해석하지만(백종현, "실천적 자유와 도덕법칙", 실천이성비판에서, 아카넷 2002, 481면) 가라타니는 이 구절에서 사용된 보조사를 세밀히 읽어내 정치경제학적 의미도 캐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관계가 임노동임을 하나의 자연사적 흐름으로 파악한 노년의 마르크스에게서 청년 마르크스의 윤리가 읽혀 진다. 그것은 이러한 임노동 관계가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라는,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명령이다. 이는 "인간이 굴욕당하고 압박당하며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청년 마르크스의 주장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정치경제학에 칸트를 도입함으로써 이론과 당위를 접목하려는 신선함도 보여준다. 호네트에 따르면 헤겔은 칸트 철학을 당위적 요청으로 일축시키지만, 칸트의 기획 전반을 놓고 보면, 자유인이 되라는 명령은 결코 인과율로 규정되는 세계, 이론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면, 칸트의 윤리학은 한낱 당위적 요청만을 하는 호소에 그치지 않는다.

윤리의 또다른 차원 : 국가를 넘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윤리의 또다른 차원의 규정은 세계시민적 윤리라는 점이다.  이 책의 1장에서 가라타니는 기다 미노루의 '미치광이 부락 주유 기행'이란 소설을 인용하면서 일본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편협한 인간관계를 지적한다. 자아정체성도 없이 농촌 '사회'라는 틀에 개인이 매몰된 곳에서 우정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공동체는 자기보존을 위한 터전일 뿐이므로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고, 인간관계도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도 '자기'는 없다"(29면)는 상태다. 이러한 상태는 농촌에 전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라는 정체불명의 괴력이 가족, 조직, 국가에 전방위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여러 부문들에서 전승된 정서로서의 공통감각이 생긴다. 가라타니는 일본의 가정과 조직이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더욱 편협할 정도로 공동체의 장력에 구속당해 있다고 보지만, 그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오히려 가족과 조직을 포함한 사회 보다 큰 범위인 국가를 향해 있다.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년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성숙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집단(국가)으로서는 항상 미성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나 노파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적 도덕에 비하면 훨씬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래 국가와 국가 사이란 겉치레말이 아무리 요란해도 德義心은 그다지 없습니다..ㅣ국가가 평온할 때에는 역시 덕의심이 높은 개인주의에 중점을 두는 편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윤리21, 82-83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소논문에서 칸트가 구분한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가라타니는 자신의 윤리에 맞게 고쳐 읽는다. 이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국가적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고, 국가를 넘어선 이성의 코스모폴리탄적 사용으로 보는 것이며, 오히려 조직과 국가의 틀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용에 따라 영리 조직이나 공공 조직인 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공적인 이성의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활용해 미학적 태도변경을 이성의 공적인 사용 영역에도 전용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태도변경을 통해 공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자의 자유에 달렸다. 그리고 이 자유는 자신에게는 명령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자유다.

여기서 칸트 철학의 핵심적 주제이면서도 논의의 과정상 곤혹스러운 부문은 자유가 어떻게 명령되어지냐는 문제다. 칸트는 자유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봄으로써 자유를 해명하려는 이성의 작업에 한계를 정한다(도덕법은 자유의 인식 근거이며, 자유는 도덕법의 존재근거). 신, 영혼의 불멸이 이성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도덕을 위해 요청되는 바처럼, 자유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당위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헤겔은 칸트의 자유가 당위에 불과하다고 하며, 공동체에 기반한 인륜을 제시하지만, 인륜을 비롯해 신과 영혼의 불멸로 도덕을 강제하는 것은 타율적 방식인데 비해, 실현되지 않은 미규정의 자유를 사용해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자율적이다. 여기서 물론 헤겔의 인륜과 종교(신/영혼의 불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헤겔의 인륜이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갈 만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종교에 관한 헤겔과 칸트와의 인식 차이를 짧게 지적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칸트에게도 윤리의 형이상학(자유)과 현실의 도덕법 사이에 국가와 종교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칸트의 입장은 헤겔보다 적극적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는 단지 도덕법의 집행을 위한 기구에 불과하며, 종교는 도덕법의 실천을 돕는 유용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이에 비해 헤겔은 국가에 적극적인 성격을 부여하며, 그가 제시한 사회관의 배후엔 신교가 자리잡고 있다. 칸트가 초월적인 방법, 즉 경험 밖에서 경험세계를 관찰하는 형이상적 방식을 택했다면, 헤겔은 역사 속에 구현된 세계를 정신이라는 메타포로 전환시키고, 이 정신을 현실에 다시 구체화시키는 현상학적 방식을 택했다고 대비될 수 있다. 단, 칸트도 말년에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그 모호한 자유의 확고한 기반을 위해,  법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작업을 한다. 이는 자신이 제시한 윤리의 형이상학을 현실의 도덕법으로 구체화시키려는 시도다.

가라타니가 윤리의 대상으로 삼는 타자는 시간적으로 미래세대를 포함하며 공간적으로 세계인을 아우른다. 칸트에게서 이성의 주체가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칸트 철학의 생태학적 지평 확장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세계인에 적용될 수 있는 윤리의 형이상학, 보편화 윤리라는 위상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내국민 관계에서 보다도 국가간 관계에서 야만성이 더욱 강고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야만성은 어느때고 분출될 수 있는 분쟁의 계기가 되고 있다. 가라타니는 전후 일본의 책임문제를 거론하면서, 인식과 책임이 혼재된 상태에서 1억 총참회를 외친 황족 출신의 수상을 수상하게 본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군부이고 이것을 승인한 것은 천황이며, 국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발성이 있더라도 전쟁에 동원된 것에 불과하므로, 책임의 과중은 군부와 천황에 무겁게 내려지고 국민에게 경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황은 일본내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미군정에 의해 전쟁책임으로부터 벗어났으며, A급 전범들은 내각과 신사로 모셔졌다.

가라티니가, 국가가 행하는 전쟁 범죄에 개인들이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는 일을 중단시키는 방안으로 제시하는 일은 사유재산의 폐지다. 여기서 사유재산이란 국가가 걷어내는 세금으로 축적된 재산을 의미한다.                

"엥겔스나 레닌과 달리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찾았다. '자본론'에서 그는 그것을 '개체적 소유의 재건'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협동조합에서는 각자가 자유로운 소유자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폐기라고 하면 곧 국유화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란 어떤 의미에서 국유재산이고, 그 증거로 우리는 그 소유에 대해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유재산의 폐기란 국유재산의 폐기, 즉 국가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윤리21, 188면)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를 폐기할 것인가? 그 실천적 출발점은 세계인이 되는데 있다. 세계인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칸트의 자유, 윤리가 충분히 음미될 주제임이 드러날 것이다.  

2007.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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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논술방식

칸트 Kant 2024. 3. 19. 07: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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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논술방식은 결코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적이며 논증적이다. 이성의 작용이 그러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반복적인 논의를 하면서도 어떤 확증을 주지 않는 것은 이 텍스트를 열린 논쟁의 무대에 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마찬가지로 회의의 방식을 택하긴 했지만, 어떤 드라마적 효과도 보이는 데카르트 <방법서설>에 비해서 재미는 물론 감동도 없다. 다만 비판서의 후반부에 가면 역사철학과 도덕론에 대한 암시적 예고편이 약간의 묵시론적 색체로 씌어져 있다. 한편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비판>과 연속선상에 있기는 하나 전혀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하지만 <순수이성비판> 자체 하나만으로도 그의 대표적인 다른 저술인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 그리고 역사철학 관련 논문집을 아우르는 작품들의 결집과 대척점을 이룰 위상에 놓여 있다. 거기에서 다뤄지는 인식론상의 문제만으로도 칸트는 끊임없이 논란의 원천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극히 직업적인 관점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확증적으로 관통되는 명제중 하나는 경험을 넘어서려는 이성의 본성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긍정과 부정의 양극에서 수없이 줄타기를 한다. 물론 그런 줄타기에는 미묘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렇듯 수세에 몰린 이성의 본성을 실천이성으로 구제한 것은 칸트의 또다른 혁명적 전회라고 평가할 수 있다(대상을 주관의 두 형식인 감성과 오성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칸트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했다). 근대 세계의 과학과 도덕을 근거지우려는 야심찬 기획을 칸트는 노령에 이르러서 펼친 것이다.  

2009.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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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 구르거나 그 밑에서

주장 Behauptung 2024. 3. 14. 05: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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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유트브에서 '구르는 수레바퀴'(2020)라는 영화에 관한 소개영상을 봤다. 다소 코믹하긴 하지만, 불교 승려들의 일상사에 관해 이런 정도로 리얼하게 그린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불교계에서 수도승들의 전승은 가히 변화무쌍한 역사와 무관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온 면모가 있다. 동아시아에 보편적이면서도 특유한 종교문화일 수 있지만, 일단 한국만 놓고 보면 군대적 질서와 사회주의적 생활구조, 달리말해 무위적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승려집단의 생활사는 거의 흐트러짐없이 천오백년 이상 이어져 온 것이다.

종교의 색채만 걷어서 오직 승려의 생활사, 삶 자체를 보면 여러가지 귀감이 있다. 어떤 미래적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의 고도화를 놓치 않으면서 현실의 욕망에 끌려 당하기 보다는 타고 넘어가는 기지는 인도인이 추구하던 명상과 유희의 삶에 근접하지 않을까?

노동의 일부는 기계에 맡기더라도 노동에의 참여가 보장되는 일터에서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는 전인의 삶에 '들어오라'라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유적 인간, 연대를 놓지 않는 인간의 몫이자 의무, 약속,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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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you cry

잡다 Vielerlei 2024. 2. 20. 05: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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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N roses

주요코드 : Am Dm G  F

Talk to me softly, there's something in your eyes
Don't hang your head in sorrow and please don't cry
I know how you feel inside, I've, I've been there before
Something is changing inside you and don't you know?

Don't you cry tonight, I still love you, baby
And don't you cry tonight
Don't you cry tonight, there's a heaven above you, baby
And don't you cry tonight

Give me a whisper and give me a sigh
Give me a kiss before you tell me goodbye
Don't you take it so hard now and please don't take it so bad
I'll still be thinking of you and the times we had, baby

And don't you cry tonight
Don't you cry tonight
Don't you cry tonight, there's a heaven above you, baby
And don't you cry tonight

[Guitar Solo]

And please remember that I never lied, oh
And please remember how I felt inside now, honey
You gotta make it your own way but you'll be alright now, sugar
You'll feel better tomorrow, come the morning light now, baby

And don't you cry tonight
Don't you cry tonight
Don't you cry tonight, there's a heaven above you, baby
And don't you cry
Don't you ever cry
Don't you cry tonight, baby, maybe someday
Don't you cry, don't you ever cry
Don't you cry to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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