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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서문에서, 도덕법칙의 연역이 불필요한 외적 조건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는 달리 당장의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A7)(주1)
. 여기서 이론이성과 구분되는 실천이성의 극명한 차이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데, 이것은 이론이성에서는 문제이었던 것이 실천이성에서는 확정된다는 것이다(A7). 즉, 칸트는 가상적인 그의 논적들에게 이론이성으로 신의 존재, 자유,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반어적 어법으로 자문하는데, 이러한 이념들은 도덕적 사용에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확정적 응답이다(A7).

칸트에게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각각 대상으로 삼는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는 구분되면서도 양립가능하다고 할 때, 이 ‘양립’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판단력비판』에서 동일한 상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 의미의 취미판단 논의와도 상관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에 의한 근본원인의 규정은 오직 도덕세계에서만 가능하지만, 이 도덕의 세계 내에서와 자연의 세계 내에서 공통적으로 추론의 인과계열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양립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고 존재를 가정하는 권리는 만물의 체계적 연관을 위해 인과성에서 유추한다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혔듯이(B728), 범주는 두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논리적 도구상자다. 이러한 추론의 인과성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 형식화의 절정은 『도덕형이상학』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이성비판』의 분석학 1장의 1절 “순수실천 이성원칙들의 연역” 절에서 칸트는 순수이성이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의지를 규정하는 실천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것도[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이성의 의지 규정], 우리에게 있어서 순수 이성이 실천적임을 입증하는 사실에 의거해서, 즉 의지를 행위로 규정하는 윤리성의 원칙 안에 있는 자율에 의거해서 말이다.-또 분석학이 동시에 제시하는 바는, 이 사실은 의지의 자유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아니 의지의 자유와 한가지이며, 그럼으로써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다른 작용하는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인과법칙에 종속함을 인식하되, 그럼에도 실천적인 일에 있어서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곧 존재자 그 자체로서는, 사물들의 예지적 질서에서 규정되는 그의 현존재를 의식하고,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특수한 직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과성을 감성세계에서 규정할 수 있는 역학적 법칙들에 의거해 그러하다는 것이다.”(A72,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주2)  

여기서 순수 예지계의 근본법칙인 순수한 실천이성의 자율은 비록 경험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그렇지 않다면 타율이 되므로), ‘감성세계의 법칙을 깨뜨림 없이, 실존해야 할 도덕법칙’으로 칸트는 규정한다(A74-75). 이 절에서 나아가 칸트는, 실천이성 최상의 원칙의 연역에 관해, 그 객관적 실재성과 관련해서는 그 확실성을 포기하지만, 능력의 연역 원리로 쓰인다고 말하면서, 도덕법칙이 사실상 ‘자유에 의한 인과법칙’임을 천명하며, 이 법칙에 의해 초감성적 자연이 가능함을 말한다(A82-83)(주3). 

같은 장의 제 2절 ‘실천적 사용에서 순수이성의 권한’에서 칸트는 감성세계 너머에 인과성의 법칙을 세우는 일이 어떻게 도덕의 원리에서 가능한지 묻는다(A95). 이 물음은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련해서만 연역할 수 있었던 인과성과 같은 개념의 실재성이 도덕적 사용의 대상인 예지체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그러한 사용이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말한다(A95). 왜냐하면 인과성의 개념은 대상과 대상을 규정하는 실체성의 범주가 아니라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성의 범주이므로 이미 감관의 대상에 적용되기 이전에(논리적 선행), 오성에 그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A95). 달리 말해 인과성의 개념은 경험적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나, 경험적 대상이 없더라도 가능한 오성의 순수한 선험적 능력이다. 그런데 왜 능력인가? 

이론적 인식에서 오성은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편, 순전한 실천적 사용과 관련해서 오성은 또한 욕구능력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욕구능력을 칸트는 의지라고 지칭하며, 이 의지의 개념에는 자연법칙에 의해서는 규정될 수 없는 원인성의 개념이, 자유의 개념과 함께 함유되어 있다고 말한다(A97). 이 원인성은 그 객관적 실재성을 경험적 직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사용에서 정당화된다. 즉 원인이라는 개념은 『순수이성비판』상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서 대상 일반과 관련하여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개념은 원래 순수 오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근원상 일체의 감성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순수예지 존재자로서의 사물들에’(auf Dinge als reine Verstandeswesen) 적용된다(A97). 칸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자의 개념을 ‘예지원인’(causa noumenon)이라고 하는데(A97), 이 개념은 이 개념의 실재성을 규정하는 도덕법칙과 관련해서만, 즉 실천적으로만 사용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A98). 여기서 객관적 실재성이란 비록 이 개념에 맞는 직관은 없더라도 우리 마음의 준칙에서 드러나는 바처럼, 현실적 적용을 할 수 있음을 말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개념이 예지체(Noumenen)(주4)와 관련해서 충분한 권리(Berechtigung)를 보유하는 점이 도출된다(A99). 즉 순수 오성의 개념(인과성 외에 다른 오성의 범주들도 포함해서)이 실천적인 것과 관련해 그 객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권한(Befugnis)으로 정당화된다. 칸트가 이 절의 마지막에 드는 바처럼, 신의 존재를 유추(Analogie)에 의해 이끌어내어 가정하는 권한은 오직 도덕적 사용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지, 그 이상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다.


각주

1)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텍스트는 백종현의 번역본(아카넷, 2002)에 의존했으며, 부분적으로 Weischedel판 Kant Werke Band 6 을 참고했다.

2)칸트, 백종현 역『실천이성비판』(아카넷, 2002), p.108-109.

3)자유에 의한 도덕 법칙의 인과성은 칸트의 법철학에서 더욱 분명히 제시된다. 도덕법칙의 직접적 적용을 받지 않더라도 법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에서, 의지와 사실행위 간에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행위자의 내적 마음의 동기와 상관없이 법개념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는 무력해 진다. 칸트는 한 발 더 나아가, 법의 대상인 권리관계의 규명에 있어 수학적 엄밀성까지 지향하는데, 이는 불분명한 권리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다(이충진, 『이성과 권리』2.법칙과 권리(철학과 현실사, 2000), p.60-61, 72참조).

4)Noumenen은 기존에는 가상체로 옮겨 왔다고 하나, ‘예지[오성]적으로 생각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백종현은 Noumenen을 예지체로 옮겼다.(칸트, 백종현 역, 『실천이성비판』, p.42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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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증거

책들 Bücher 2009. 12. 18. 09:0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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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 용경식 역(까치, 2009). 

5~6년 전에 이 시리즈의 상편과 하편만 보았었는데, 지난 주말 우연히 마을 도서관에서 중편을 발견해 읽었다. 그때 서점에서 중편은 절판되었다시피 자취를 감췄는데, 중편의 판쇄를 보니  10번 찍혔다. 상편에 비해 분위기가 무겁지만 하편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고, 담담하면서도 자극적인 표현과 잔혹스러움이 부곽된다. 하편은 이 시리즈와 무관하나 상편과 중편은 연결된 스토리로 봐도 좋겠지만, 별개로 보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듯 하다. 

전란의 참상이 사회적 기형을 초래하는 것을 루카스, 야스민, 마티아스, 클라라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제시된다. 이국의 누나집으로 간 빅토르의 편지는 또다른 비극적 소품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루카스는 사라지고 그의 유품은 그의 형제 클라우스에게 남겨진다. 형제의 유품, 특히 방대한 노트를 호텔에서 밤새 읽은 클라우스는 40여년간의 세월의 간격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한다. 빅토르는 살인죄로 사형판결이 처해지자, 왜 사회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가 책을 내어 사회에 기여하도록 기회를 주기 보다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자로 남겨지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죽은 자가 세월이 지나도 남기는 것은 뼈와 글이다. 그런데 글이라는 증거는 타인의 존재가 자체가 의심된다고 해도-호적부상 신원확인이 안된다 해도-  거짓말처럼 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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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유추에서 인과법칙

칸트 Kant 2009. 12. 9. 15: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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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은 우리의 모든 선천적 인식이란 순수한 오성자신의 능력, 곧 개념을 이용한 인식으로 이루어짐을 증명하려는 논의이며, 여기서 제시되는 오성의 4가지 원칙은 모든 자연법칙이 예외없이 종속하는 것이다(B198). 이때 원칙이란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을 말하는데, 이들 원칙은 12범주를 4가지 판단형식으로 묶은 것으로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을 지시한다. 이중 분량과 성질에 관한 논의는 각각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료’에서 다뤄지며, 관계에 관한 논의는 ‘경험의 유추’에서, 양상에 관한 논의는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에서 다뤄진다. 여기서 유추란 힘의 표출로부터 비롯되는 역학적 관계를 다루는 것을 의미하며(주1)
, 이중 제 2의 유추에서 다뤄지는 인과율에 관한 논의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면서도(주2), 많은 주석가들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촉발시키는 논란의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제 2 유추의 다양한 해석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고(주3), 원전에 기반해 제 2유추에서 논의되는 인과율의 의미에 관해 다루는 것으로 제한한다.

제 2 유추에서 칸트가 제시한 인과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초판의 ‘산출의 원칙’ : "발생하는(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에 따라 후속하는 것을 전제한다."(A189)

재판의 ‘인과의 법칙에 따른 시간적 후속의 법칙' :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결합법칙에 따라 발생한다."(B232)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초판과 재판의 원칙을 간단히 결합시킨다면, 발생하는 모든 것은 시간적 후속에 의한 인과의 법칙에 따른다고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 시간적 후속이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시간에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 곧 역학적 선후로 이해해야 한다(B248-249). 왜냐하면, 칸트가 예를 드는 바처럼, 실내의 온기가 따뜻해지는 것이 난로 때문이라고 해도, 원인으로 간주되는 난로의 등장과 결과로서 간주되는 실내의 온기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원인을 일으킨 실체로서의 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 즉 그 필연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순서의 규정, 곧 필연적 관계의 규정은 지각의 대상인 사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각하는 주관에 있는 것인가? 칸트에 따르면 시간의 순서가 사건에 있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감을 거쳐 수용된 현상으로서의 사건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관에 있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간의 후속에 대한 결정은 현상들의 개별 위치를 연속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오성의 선천적 조건에 기인한다(B210). 이러한 선천적 조건에 의해 비로서 타당한 경험적 판단이 가능하며, 여기서 타당성이라는 진리검증은 바로 인과관계의 규명에서 완료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성의 중차대한 능력은 바로 대상 일반의 표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상은 바로 시간순서의 부여에 의한 인과관계의 규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경험을 위해 또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오성은 필요한 것이다. 오성이 기여하는 첫째의 일은 그것이 대상의 표상을 판명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대상 일반이라는 표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여를 하는 것은, 오성이 현상에 또 그것의 현존에다 시간 순서를 줌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오성은 선행현상에 관계해서, 결과로서의 각 현상에 선천적으로 규정된 시간상의 위치를 승인하기 때문이다. 위치 없이는 현상은, 그것의 모든 부분들의 위치를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시간 자신과 합치하지 않을 것이다.”(B244-245)(주4)

인과법칙을 주관적 심리의 연상물로 축소시킨 흄의 회의론에 대해 칸트의 인과론은 타당한 반격인가? 인과를 규정하는 오성의 능력도 주관에 있음으로 해서, 역시 주관적 심리로 격하될 위험은 없는가? 그러나 칸트의 주관은 직관의 선천적 형식인 내감, 아직은 순수하지 않은 종합 일반인 구상력, 선험적 통각이라는 삼중의 과정을 거쳐 선험적 종합판단을 수행하는(B197) 논리적 기관이지 심리적 구성물이 아니다. 즉 인과율은 오성이 대상에 부여하는 선험적 능력이다.(주5)


각주
1)유추의 의미에 관해서는 박정하, “칸트의 인과 이론에 대한 연구 : 『순수이성비판』의 ‘제2유추의 원칙’을 중심으로”(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p.27-28참조. 참고로 이 논문은 제 2 유추의 해석과 관련해 칸트의 인과론이 개별인과법칙을 문제삼지 않고 보편인과법칙만을 문제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칸트의 인과이론을 세밀히 다루고 있다.

2)칸트에게서 합리론의 독단이라는 선잠을 깨워『순수이성비판』의 작업에 매진케 한 근본적 동인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과론을 부정한 흄의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1739)이었다. 이러한 인과론의 부정은 비단 합리론의 위기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으며, 이런 점에서 인과론을 제시하는 제 2 유추론의 위상이 드러난다.

3)제 2 유추론의 해석에 관한 선행연구는 박채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인과성과 자유”(전북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3장에서 다뤄진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제 2 유추의 해석에 관한 논쟁은 벡크, 유잉, 클레베, 브로드, 타카르트, 버드, 스트로슨에서부터, 셀라스, 퍼트남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4)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박영사, 1997), p203-204.

5)능력이라는 말은 오성의 타당한 작용과 아울러 오성의 정당한 권리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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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의 평등

문학 Literatur 2009. 12. 7. 08: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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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지능이 명사도 만드고 수학 기호도 만든다. 동일한 지능이 기호도 만들고 추론도 한다. 두 종류의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모든 유식한 스승처럼 소크라테스는 지도하기 위해 질문한다. 하지만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질문해ㅣ야지 식자의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안 되며, 지도받기 위해서 질문을 해야지, 지도하기 위해서 질문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학생보다 실제로 많이 알지 못하는 자, 결코 학생보다 앞서 여행을 하지 않은 자, 즉 무지한 스승만이 인간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지한 스승』, 61,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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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단상 Vorstelltung 2009. 12. 6. 19: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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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물기 전, 산책 겸 운동으로 강변을 나섰다가 마을 도서관 쪽으로 갔다. 월문천에 얼음이 반쯤 얼었는데 남자 아이들이 얼음이 푹푹 꺼지는데도 한 여름처럼 놀고 있다.  도서관의 개가 열람실에 올라가 맹자의 공손추 하편을 읽었다. 창가에 놓인 소파처럼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읽는 게 마치 어릴 때 다녔던 만화가게같다. 만화가게같은 도서관, 이게 요즘 지역 도서관의 콘셉같다.

공손추는 맹자의 제자다. 이 대화편은 공손추와 맹자의 대담이 중심이 아닌데도 공손추라는 편명을 갖추고 있다.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과 같은 맥락일까? 기억에 남는 문장을 몇개 옮겨 본다. 먼저 누구를 연상키는 이런 구절은 어느 시대에나 들어 맞을 것이다.

且古之君子 過則改之 今之君子 過則順之
또한 옛날의 군자는 과실이 있으면 이를 고치나 오늘의 군자는 과실이 있으면 이를 밀어붙인다. 

맹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할 때 노나라에 있는 모친이 돌아가시자 노나라에서 장례를 치루고 돌아왔다. 이때 관 만드는 일을 감독했던 제자 충우가 관이 너무 화사해서 예에 벗어나지 않는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는 이렇게 답한다.

君子不以天下儉其親
군자는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

장례를 정성껏 치루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것이다. 역시 유가의 적통다운 구절이다.

맹자가 학수고대했던 제나라 왕과의 알현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제나라를 떠날 때, 바로 뜨지 않고 제나라 서남쪽에 있는 한 읍에 사흘간 머물렀다. 이를 두고 괜히 밍기적거린다는 비난에 대해 맹자는 사흘간 기다라는 동안 왕이 마음을 바꿔 자신의 발길을 돌릴 기회를 주기 위해서 머물렀다고 응답한다. 그럴듯한 답변이지만, 뭔가 미련이 남아 있는 느낌이다. 기다려주는 의례적 의식이라고 할까? 세상사가 칼로 자르듯 냉혹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식의 어중간한 기대심리는 마치 불벼락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 본 롯의 아내, 즉 소금기둥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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