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고난의 행군

여행 Reise 2011. 3. 7. 12: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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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인근 동네에 사는 친구와 회기역에서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주말에 등산이나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제 건강도 챙겨야 하는 나이이다 보니, 뭔가를 해야겠다는 절박감도 든다. 친구와 간단히 1차만 하고 헤어진 뒤, 집에 왔는데 한 동네에 사는 선배의 호출이 있었다. 아직 입맛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닭갈비에 소주를 마셨다. 그 다음날 아침, 전날의 과음으로 몸 상태가 산에 오르기엔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전날 막걸리를 마셨던 친구가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집 아빠와 함께 예봉산에 가자는 연락을 했다. 팔당역 쪽 예봉산으로 가는 전철 시간을 맞추지 못해 나는 출발은 함께 못하고, 도곡리의 어룡에서 올라가는 코스로 가서 수종사에 이들을 만나려고 했다. 마을 버스를 타고 11시쯤 예봉산의 새재고개에 도착해 오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완만한 새재고개를 오르고 난 뒤 바로 운길산 쪽으로 길을 잡으려고 했는데 적갑산에서 보자는 그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가 아이폰으로 탐색해 보니 그 지점에서 만나는게 적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길을 돌아 예봉산 정상을 향해 가다가 1시쯤 적갑산에 못미쳐 친구 일행을 만났다. 친구 일행은 10시에, 나는 11시에 각기 예봉산의 다른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해 적갑산에 만난 후, 운길산까지 종주하는데 꼬박 6~7 시간 걸리는 산행이었는데, 우리는 점심도 준비하지 않고 올랐다. 점심 나절에 햇볕 따듯한 곳곳에서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펴고 식사를 하는 모습이 마치 빨치산의 평화로운 점심식사로 보였다. 예봉산에서 운길산으로 가는 산의 형세는 U자 형으로 능선길이라고 하기에는 높낮이가 꽤 되는 편이었다. 운길산으로 가는 능선 길은 그야말로 산너머 산이라고 할 만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 했다. 초코 파이와 귤 몇개를 먹고서는 아무래도 기운을 복둗우기에 불충분하다. 그래도 세 명이 함께 걸으니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지친 숨을 헐떡이며 운길산 정상에 도착해 멸치와 짱아찌에 막걸리 한 잔으로 목를 축이고 난 뒤, 수종사를 둘러보고 하산했다. 산자락에 있는 간이 음식점에서 생닭을 잡아 조리하는 데 1시간이나 걸리는 매콤한 도리탕을 점심겸 저녁으로 먹었다.  오랜만에 산행다운 산행을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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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타르타』 중

책들 Bücher 2011. 3. 4. 17:4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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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단식은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예컨대 싯타르타가 단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신[싯타르타에게 방생술을 전수할 카말라가 소개시켜 준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한테서,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오늘 당장 아무 일자리리건 얻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겁니다. 배가 고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싯타르타는 이렇게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으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곤궁해하지도 않으며, 설령 굶주림에 오래 시달릴지라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나으리, 단식이란 그런 데에 좋은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 『싯타르타』 박병덕 역(민음사, 2008, 신장판 22쇄), 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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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 신앙과 철학 1

창작 Produktion 2011. 3. 1. 00: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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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카페에 재미삼아 연재글을 올려 봤다. 과연 계속 이어질지..

이 곳은 주로 책을 소개하는 카페로 굳어진 느낌이 들지만, 다른 형식의 글을 올려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런 주제로 한번 글을 처볼려고 합니다.

'신앙'과 '철학'이란 용어는 서로 상극이라 할 만큼 상호 배제적인 면도 있지만 일종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주제라는 거죠. 하지만 신앙이란 적어도 대한반도에서는 현실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무시못할 신념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진행하면 너무 무거운 감이 듭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과 철학에 대해 어떤 몰개성적인 견지에서, 지구를 벗어난 외계인의 관찰자적 관점으로 이 주제를 추상화시켜 진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극히 사적이기는 하지만, 저의 경험을 비추어서 얘기를 진행하는게 저로서도 더 수월한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른바 성년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저는 인습적으로 받아들여온 신앙을 철학으로, 그것도 제도화된 학문의 형태로 된 '철학'으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 극복의 방법은 학문적인 수련이 아니라, 단지 교회를 더이상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은 하나의 빛좋은 명분인 셈이었죠. 오히려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좀 더 이른 고등학교 시절에 생겼습니다. 전농동의 한 독서관에서 늦은 밤에 친구와 종교토론을 하면서 저는 자신의 믿음에 철저한 이슬람과 역시 자신의 믿음에 철저한 크리스찬 중 누구의 신앙이 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항변했는데, 이 친구는 이런 관점을 단호히 거절했죠. 나중에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으면서 저의 이런 상대주의가 바로 종교적 신념의 통약불가능성과 상통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통약가능한 가치관, 그러니까 공통의 합의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치를 종교적 신념으로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상이한 종교적 신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없다는 것, 즉 종교적 상대주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일단 종교를 긍정한다고 했을 때 최소한의 전제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무종교주의자에게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종교라고 부르기엔 어색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다른 주요 종교 중에서도 가장 종교같지 않은 교의입니다. 제 생각에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수위들은 메타포이며, 불교의 최종 목적지는 일체의 업을 초월한 자아의 완전한 적멸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는 상태, 완전한 죽음의 상태, 너와 나도 없고, 당연히 의식과 무의식도 없는 완벽한 적막.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에게 이런게 과연 상상 가능할까요? 없음은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불교도 저 생기발악적인 기독교적처럼 기복주의로 흐르기는 합니다만, 그 본질은 철저한 생의 부정이면서 내세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반종교적인 면모가 있으며, 여기서 불교를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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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증상

단상 Vorstelltung 2011. 2. 28. 12:0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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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나타난 증상은 입맛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환절기라서 그럴 수 있겠지만, 몸살에 걸린 것도 아닌데, 입맛이 안느껴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 어제 일요일 밤엔, 아이가 오후 내내 조른 아이스크림을 사러 슈퍼에 갔다가 오랜만에 과자 한 개를 샀다. 가끔 구미를 당기는 과자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까 싶어서 먹었는데, 조금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때로는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칼비노의 『우주만화』를 건성으로 읽으며 하루종일 집에 있는 것 보다는,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사러 잠깐 밖에 나갔다 온게 오히려 잠깐의 기분전환이 됐다. 오랜만에 보는 비라서 그런지, 마치 다른 동네에 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구질구질한 날씨지만, 그런 날씨에 집안에만 있는게 더 구질구질할 수도 있다.

사무실에 김치찌게 냄새가 진동한다. 코는 자극하는데, 아직 맛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는 나름의 고문이다. 음식물로 배를 채울 수 있고 술로 취할 수 있지만 맛을 느낄 수 없는 증상은 금욕의 마비인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엔 두르치기에 소주 한잔을 하면 입맛이 돌아올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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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노의 무자비한 상상력

문학 Literatur 2011. 2. 23. 15: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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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을 보다가, 천천히 읽기 위해 잠시 멈췄었다. 그러다가  먼저 나온『우주만화』(1965)를 읽고 있다. 한마디로 지구과학을 소설화시킨 시도로 볼 수 있다. 아무리 과학적 이론에서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 상상이 다소 엉뚱해서 이 소설의 장르가 환타지가 아닐까 할 정도로 상상이 종횡무진이다. 한 줌의 과학 이론으로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고 할까. 이런 점 때문에 중간에 그만 읽을까 하다가, 일단 잡고 있는데, 달에 관한 부분에서 다시 감탄하고 말았다. 한 때 태양을 도는 행성이었지만, 지구와 가까워 지면서 지구의 위성으로 전락한 달의 신세를 비유하는 장은 한 편의 단편영화로 각색해도 좋을 정도로 그 이미지가 독특하고 선명하다.무미건조한 일상사 속에서 이런 글을 읽는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런 글을 쓴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텍스트 :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Le Cosmicomiche 김운찬 역(열린책들, 2006, 보급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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