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동물화

책들 Bücher 2011. 1. 30. 11: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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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와 이동주택을 세워 놓던 장소로 보이는 빈터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감탄과 격려의 소리가 들려 온다. 짝짓기 중인 것이다. 크레이커들의 짝짓기는 매우 드문 행사다. 크레이크는 그들의 수에 대해 연구한 뒤 짝짓기가 한 여자당 3년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네 남자와 발정기의 한 여자로 구성된 기본 집단이 있을 것이다. 밝은 푸른색으로 물든 엉덩이와 복부를 보고 모든 사람이 여자의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비원숭이에게서 도용한 색소 침착에다 문어에게서 빌린 확장 가능한 발색단을 결합시켜 이루어낸 기술이다. 크레이크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이든 적용 방법을 생각해 봐. 분명 어딘가에 있는 다른 동물이 그것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았을 거야.
  남자들은 오직 푸른 피부 조직과 그것에서 방출되는 페르몬만으로 자극을 받기 때문에 이제는 일방적인 사랑도, 억눌린 성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과 행위 사이에 어떤 그늘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애는 냄새가 조금씩 풍기기 시작할 때, 연한 하늘색이 비치기 시작할 때 남자들이 여자에게 꽃을 주면서 시작된다. 수컷 펭귄이 둥근 돌을 선물하는 것 혹은 수컷 은붕어가 정액 꾸러미를 선물하는 것처럼 말이지. 크레이크는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노래하는 새들처럼 돌발적으로 노래 부르기에 빠져 든다. 남자들의 성기가 여자의 복부와 잘 어울리도록 밝은 푸른색으로 변한다. 발기한 남자들이 똑같이 성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고 발을 놀리며 그에 맞 ㅣ 춰 노래를 하는, 일종의 푸른 성기 춤을 춘다. 그것은 크레이크가 게의 성적 수신호 동작을 보고 고안한 특징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바쳐진 꽃 중에서 네 송이를 선택한다. 탈락한 후보자의 성적 욕망은 즉각 사라져 버리고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지 않는다. 그런 후 여자의 복부의 푸른색이 가장 짙은 색으로 변했을 때 한 여자와 네 남자는 은밀한 장소를 찾아가 일에 착수해, 여자가 임신을 해서 푸른색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다.
  어쨌든 "싫어요"가 "그래요"라는 뜻이라는 말 따위는 사라졌군. 눈사람[지미]은 생각한다. 매춘 행위도, 아동 성 학대도, 가격 협상도, 포주도, 성적 노예도 더 이상 없다. 강간도 없다. 다섯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법석을 떨 것이다. 한 남자가 성행위를 하는 동안 다른 세 남자는 방어를 하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순서를 바꾸어 가며 계속된다. 크레이크는 여자들에게 최강의 외음부(특별한 피부, 특별한 근육)을 마련해 주어 여자들이 이 마라톤을 견딜 수 있게 했다.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산으로 물려 줄 재산도 없고 전쟁에 필요한 부자간의 충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스는 더 이상 반대 감정이 병존하는 태도 혹은 노골적인 혐오의 태도로 다뤄지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살과 살인을 야기하는 비밀스러운 의례도 아니다. 이제 그것은 운동선수들의 실연(實演), 자유로운 놀이와 비슷하다.
  어쩌면 크레이크가 옳았는지도 몰라. 눈사람은 생각한다. 옛날 같은 체제에서 성적 경쟁은 가혹하고 잔인했다. 모든 행복한 연인 뒤에는 낙담한 자, 소외된 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투명한 거품 모양 돔이었다. 두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ㅣ 것은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들어갈 수 없었다. 
  홀로 남겨진 남자가 창가에서 슬픈 탱고 가락에 맞추어 망각 상태에 이를 때까지 술을 마셔 대는 것, 그 정도는 비교적 온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폭력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극단적인 감정은 치명적일 수 있다.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이도 가져서는 안 돼 등등. 죽음이 들어설 수 있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인간 종말 리포트』1권 Orix and Crake 차은정 역(민음사, 2008, 초판1쇄), 246~2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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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목록(2009.11.~2011.1.)

책들 Bücher 2011. 1. 24. 11: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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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가을, 석사논문 제출이 보류되고 나서 읽기 시작한 도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 책들은 모두 이 블로그에서 1회 이상 인용/서평의 형식으로 소개된 것이다.

표영삼,『동학 1 : 수운의 삶과 생각』.
카프카,『소송』이주동 역(솔, 2006).
자크 랑시에르,『무지한 스승』 양창렬 역(궁리, 2008).
아고타 크리스토프,『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 용경식 역(까치, 2009).
조지 오웰,『1984년』김병익 역(문예, 1999).
월리엄 포크너,『성역』이진준 역( 민음사 2009).
다자이 오사무,『인간실격』김춘미 역(민음사, 2008).
오노레 드 발자크,『고리오 영감』박영근 역(민음사 2007).
스탕달,『파르마의 수도원』1,2권 원윤수/임미경 역(민음사, 2008).
토마스 핀천,『제49호 품목의 경매』김성곤 역(민음사, 2009).
요르단 욥코프,『발칸의 전설』.
페터 한트케,『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민승남 역(민음사, 2008).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권택영 역(민음사, 2008).
서머셋 모옴,『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송무 역(민음사, 2008).
서머셋 모옴,『인간의 굴레에서』Of Human Bondage 1,2권 송무 역(민음사, 2007).
켄 블랜차드 외,『1분 경영수업』.
노덕환,『경영학원론』(두남, 2009).
헤겔,『정신현상학』1권 임석진 역(한길사, 2007).
토마스 만,『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 : Verfall einer Familie 1,2권 홍성광 역(민음사, 2008).
가와구치 요시카즈,『신비한 밭에 서서』최성현 역(들녁 2004).
조셉 콘래드,『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  나영균 역(문예, 2006).
이우성,『참농부 : 더불어 사는 농부의 꿈』(흙살림연구소, 2004년).
쓰노 유킨도,『소농 :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성삼경 역(녹색평론사, 2004).
라이너 쿤체,『보리수의 밤』Lindennacht 전영애·박세인 역(열음사, 2007).
엔도 슈샤코,『깊은 강』유자숙 역(민음사, 2009).
가라타니 고진,『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역(도서출판 b, 2010).
구효서,『오남리 이야기』.
조지 오웰,『동물농장』도정일 역(민음사, 2009).
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정영목 역(민음사, 2008).
후안 롤포,『뻬드로 빠라모』Pedro Paramo 정창 역(민음사, 2010).
슈테판 헤름린,『저녁노을』Abendlicht   박소은 역(당대, 1995).
강춘진,『책 속에 갇힌 문학, 책 밖으로 나오다 : 작가와 함께 떠나는 현장탐방』(가교출판,2006).
창비 편, 20세기 한국 중단편 소설집(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21-최상규, 송상옥, 이병주, 이청준). 
나쓰메 소세키,『그 후』윤상인 역 (민음사, 2008).
『오규원 시전집』1권.
『김수영 전집』1,2권(민음사, 2008).
이청준,『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닥터 지바고』상,하권 박형규 역(열린책들: 2007).
레프 톨스토이,『크로이체르 소나타』이기주 역(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미겔 데 우나무노,『안개 Niebla』조민현 역(민음사, 2008).

막상 정리해 보니 꽤 많다. 한 달에 약 3권 읽은 셈이다. 대부분 소설이고, 별 감흥없는 독서도 있었다. 이중 『정신현상학』은 지난 주말,  다시 서문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독서목록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무엇보다도 조지 오웰과 김수영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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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무노의 『안개』(1914)

책들 Bücher 2011. 1. 23. 16:5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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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의 맹위가 한물 간 요즘에 우나무노의 이 소설의 발상은 진부하나 그 시대에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선구적이다. 우나무노는 스페인 내전기에 프랑코 일파를 비판했다가 죽는다. 철학 소설이라는 점에서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아우구스토의 혼잣말]"사람은 말을 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스스로에게 말할 때, 즉 생각하는 것이 의식되자마자 거짓말을 하게 된다. 진리라고는 생리적인 삶 밖에 없다. 언어라는 이 사회적 산물은 거짓말을 학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철학자가 진리란 언어와 같이 사회적 산물이며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고, 그렇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바 있다. 사회적 산물이란 거짓이다."

미겔 데 우나무노,  『안개Niebla 조민현 역(민음사, 2008, 1판 4쇄), 168면.

[빅토르의 말]"여성에 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심리적 실험은 결혼이야.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여성의 영혼을 심리적으로 경험할 수 없을 거야...독신자들의 심리학은 심리학이 아니야. 형이상학일 뿐이지."
상동, 239면.

[오르페오를 보며 아우구스토가 하는 말]"사람은 개, 고양이, 말, 소, 양과 같은 온갖 종류의 동물, 특히 가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일까? 인간은 자신의 동물적인 면을 대신해 줄 가축이 없었다면 인간성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만일 인간이 말을 가축으로 만 ㅣ 들지 않았다면 인간의 반은 등에 짐을 지고 다녀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 너희들 덕분에 인간의 문명이 존재하는 거야."

[아우구스토가 자신을 창조한 우나무노에게 하는 말]"선생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허구의 실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선생님이 완전히 죽게 될 때, 우리들은 당신의 영혼을 데려갈 것입니다."

상동, 309면.

[역자 해설중]"장르를 발명하는 것은 단지 새 이름을 붙이는 것"
"세르반테스의 붓을 움직였던 사람은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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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전염성 : 크로이체르 소나타

문학 Literatur 2011. 1. 16. 15:4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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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집의 수도관까지 얼려버린 냉혹한 한파의 주말 동안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다 읽었다. 교훈적 소설가답게, 이 책은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가정의 행복>에서 정신에 복속되는 것으로 화합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작품에서 타협불가능한 파국으로 몰리고 만다. 뒤의 세 편은 모두 톨스토이 만년의 작품이라고 하니, 결국 육체적 욕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해갈되지 않는 것이며, 그 완벽한 해소는 오직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사랑관을 톨스토이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마직막 작품인 <신부 세르게이>는 성욕 뿐만 아니라 명예욕과도 일전을 벌이고, 결국 방랑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다. 한 때 스테판 카사츠키라는 촉망받던 장교였다가 수도사가 된 후 명성을 날린 세르게이는 보잘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음착한 파센카를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일상의 소박한 삶에 충실한 농군과 같은 삶이 가치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도덕가로서 욕망을 바라보는 톨스토이의 몇 몇 구절.

"평생을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양초 하나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 포즈드니세프의 말, 183.

"아편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 또는 흡연자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듯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자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라 영원히 타락한 인간, 바로 호색한이 되는 겁니다."
상동, 193.

"그[예브게니]는 그녀[스테파니다]를 만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그녀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가까이에서 어둠 속에서라도 그녀와 마주치기만을 바랐다. 단지 사람들과 그녀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수치심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 가령 어둠 속이나 동물적인 욕정이 수치심을 압도해 버릴 수 있는 만남의 조건들을 자신이 찾고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악마>, 368.

매우 아름다운 베토벤의 소나타 9번 Kreutzer를 잔혹스러운 결말을 향한 치정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한 도덕심이다. 참고로 Kreutzer은 이 곡의 헌정을 받은 인물로 곡의 내용과 상관없지만, Kreuz는 독일어로 십자가, 교차점을 뜻한다. 평행하다가 어긋나듯 만나는 두 악기의 곡예가 포즈드니셰프에게는 간통으로 보였던 것이다. 

*소나타 9번은 다음 링크 참조 : http://blog.daum.net/okbon/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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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문학 Literatur 2011. 1. 14. 09: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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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도서관에 『닥터 지바고』를 반납하고 어떤 소설책을 볼까 서가를 두리번 거리다 러시아 소설에 눈이 갔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주요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20여년 전에 읽었지만, 전집으로 나온 책들을 보자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건너 뛴 후 고른 책이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아직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대작을 읽지 않았지만, 마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견줄만한 대작들을 당장 접하기엔 웬지 부담감이 들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 나온 작가 연보를 보다가, 톨스토이가 투르게네프와 체홉, 도스트예프스키, 고리끼가 동시대인들일 뿐만 아니라, 특히 투르게네프와 체홉, 고리끼와는 직접 만남을 가질 정도로 친교가 있었지만, 도스트예프스키에 대해선 그의 『죄와 벌』때문에 다소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걸 알게 됐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인생의 특정 시기에 형성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현재 초기작인 <가정의 행복>을 읽고 있는데, 중년 남성과 나이어린 신부 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질곡이 나이어린 신부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고 시골영지에서 보모와 동생, 하인들과 함께 사는 '나'는 아버지의  절친한 젊은 친구였던 세르게이 미하일리치를 후견인으로 맞아 들인다. 그가 집을 자주 방문함에 따라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틔우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지만, '나'의 요청에 따라 시골 생활의 안정과 고요를 벗어나 도시로 이사를 해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나'는 남편과 감정의 골이 깊이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오랫동안 교제한 남자라고는 미하일리치 밖에 없었던 '내'가  사교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맘껏 고무된 것을 보면서 남편은 절망한다.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면서 사교계를 주의하라고 한 남편의 경고는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사랑관의 변화를 『그 후』에서 『문』에 걸쳐 보여주듯이, 서로 다른 사랑의 감정을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보여준다.

텍스트 : 레프 톨스토이, 이기주 역『크로이체르 소나타』(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초판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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