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면도날』외

문학 Literatur 2011. 5. 2. 15: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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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와 『인간의 굴레에서』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앞의 두 소설과 함께 그의 삼부작의 완결판이라는 『면도날』을 읽었다. 책 두께는 면도날을 무색해 할 만큼 두텁지만 그 제목은 매우 예리하다. 면도날을 그냥 넘기 힘들듯이 구원의 길이 험난함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이미 소설가로서의 입지와 영예를 획득하여 여유로운 중년을 넘긴 서머셋 몸은 그의 삶의 중반기에 알게된 주변 인물들을 십여년의 세월을 함께 관통하며 소설화시켰다. 래리, 엘리엇, 이사벨, 그레이, 소피, 코스티 등등. 주제나 소재는 앞의 두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작가 스스로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변의 특정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서술하는 점에서 다르다. 소설은  작중 인물들을 관찰자 시점에서 다룬다 해도 주관적 관점을 탈피할 수 없으나, 이 작품에서 몸은 비교적 그가 다루는 주변인물들에 대해 애정과 냉정을 유지하면서 자아를 덜어내는 시도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공한 작가의 후일담으로 보일 만큼, 전작들에 비해 흥미와 긴장, 박력은 떨어진다. 시들어가는 작가의 굵직한 장편같다. 이 책과 함께 이청준의 『축제』를 빌렸었는데, 보다가 책을 덮고 싶어 졌다. 『눈길』만으로도 은유적으로 충만한 모정에 대한 형상화를 모친의 장례를 겪으면서 괜스레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늘려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임권택의 요청으로 동시진행형으로 영화화하기 위해 나온 독특한 태생의 작품이란 점에서, 설혹 이 요청이 작가에게는 덥석 물어재낄 미끼라고 할지라도, 그런 부연스러움이  작고한 저 시대의 명작가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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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

영화 Film 2011. 5. 1. 16: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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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우주개척 시대, 미지의 혹성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서 의식의 물질화가 일어난다. 의식의 산물이 단지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현현되는 것.  이런 소재는 소더버그의 리메이크와 스필버그의 <A.I.>에도 변주되지만, 타르코프스키 특유의 영상화법 속에서 원초적이고 신비스럽게 표출된다. 단지 SF 영화라고만 할 수 없는 종교적 깊이도 느껴진다. 태초에 신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듯이, 의식의 파장이 바다에 그 산물을 형태화시켜 내어 놓는다. 구약의 지구에 갇혀 있던 신이 우주로 확장된다면, 신, 영혼, 영원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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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단상 Vorstelltung 2011. 4. 24. 17:4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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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이다. 설교자는 부활과 영생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죽음 저편에 영원한 생이 없다면 삶은 무가치한 것일까. 현세의 인과응보를 위해 사후세계는 있어야 하는 것일까. 보봐르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라는 소설에서 영원히 사는 인간 휘스카의 고뇌를 통해 영생의 끔찍함을 고발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얼룩진 종교는 삶을 부정하면서 삶의 자양분을 빨아 들인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지만 죽음 앞에서 좀더 당당한 삶을 살 수 없을까. 보험사와 교회가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까. 죽음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소중히 가꿔 나가고, 작물의 생장과 죽음처럼 노년의 삶을 후손을 위한 거름으로 쓸 수는 없을까. 타인의 신앙을 다른 타인이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영생에 대한 바램에 숨겨진 생에 대한 가혹한 집착에서 살짝 벗어나는 게 보다 성숙한 종교가 아닐까. 천국에 보화를 쌓는 종교는 여전히 시대의 우상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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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 인습의 사슬을 끊는 순수

문학 Literatur 2011. 4. 22. 18: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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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후반부는 숨가뿐 속도감을 일으킨다. 옮긴이 말대로, 이 책은 단지 연정소설이 아니라 자연권과 인습의 문제, 종교적 열정의 문제 등 굵직한 주제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시간관계상, 급히 체크한 부분을 옮긴다.

"그날 밤 그가 얕잡아 비하하던 연인은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에인절 클레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자신의 한계점이 만든 것이었다. 편견에서 해방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십오 년 동안에 형성된 모범적이고 진보적이고 마음씨 착한 청년도, 놀라서 어린 날의 가르침으로 움츠러들면, 아직 습관과 인습의 노예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밟아 온 행적보다는 성향에 의하여 그녀의 도덕적 가치가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젊은 아내가 본질적으로 똑같이 악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는 다른 여인들네들만큼이나 르무엘 왕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어느 예언자도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며 스스로 그런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예언자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경우에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데, 그것은 보호막 없이 유감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기 때문이다. 반면 멀리 떨어져 있어 모습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존경되는 것은 거리가 결점을 예술적 덕목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테스를 그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면서 그는 그녀의 본질을 보지 못했으며, 흠 있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보다 훌륭할 수 있음을 잊고 있었다."

『테스』2, 75.

"조심스럽게 꿩들을 죽이는 동안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에게는 육체적 고통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데!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도 아니고, 피를 흘리는 것도 아니야.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데 쓸 두 손이 아직 멀쩡한데 말이야." 그녀는 자연 속에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사회의 인위적인 법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눌려 고통스러워했던 지난밤의 담담했던 마음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상동, 98.

개종자로서 알렉 더버빌의 재등장은 경악스럽다. 급작스러운 개종은 그래서 의심스러운 것인가. 한편으로 알렉의 재타락은 구제할 수 없는 열정이다.

"테스, 내 사랑,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나는 구원의 길을 걷고 있어소!" 그는 테스가 어린애인 것처럼 마구 흔들었다 ㅣ "왜 날 유혹했어요? 그 눈과 입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보다도 확고부동한 결심에 차 있었어요. 이브 이후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입은 세상에 없었던 것이 확실해요!"

상동, 174-175. 

"그는 약해진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이 사라지고 없었다. 개종 이후 그의 얼굴 주름에 숨어 있던, 전날의 발작적인 욕정의 잔해가 깨어나 부활한 것 같았다. 그는 어정쩡한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
  더버빌이 오늘 약속을 깬 것은[농민들에게 하기로 한 설교를 팽개치고 테스를 만나러 온 일] 한 교인의 단순한 타락이라고 했지만 에인절 클레어의 생각을 반복한 테스의 말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 곁을 떠난 다음에도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지켜 온 자신의 입장이 확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 때문에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말없이 걸었다. 그에게 있어서 갑작스러운 개종은 이성적 판단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잠시 충격을 받아 새로운 감각의 만족을 찾던 경솔한 남자의 단순한 변덕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상동, 176.

"'정의'가 행해지고 신들의 대수장(首長)이, 아이스킬로스의 말대로 테스와 희롱을 끝낸 것이다."

상동,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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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힘

책들 Bücher 2011. 4. 17. 15: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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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밤, 달리는 짐마차의 범포 속에서 테스가 사랑하는 연인 에인절의 계속되는 청혼을 어렵게 승낙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에게 작용하는 사회적 압박이 지금 시점에서는 진부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을 압박하는 사회적 규약은 지금 시대에도 다른 형태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그 결혼에 승낙을 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기쁨에 대한 욕구'는 모든 피조물에 널리 퍼진다. 조수가 가날픈 해초를 흔들듯 그 목적을 향해 인간을 흔드는 거대한 힘은 막연한 사회적 규약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테스』1, 340면.

결혼 첫날 밤, 테스의 고백을 듣고 에인절은 폭풍같은 심적 고통 속에서 강직하면서도 신중한 결단을 내린다.

"그녀가 흐느끼면서 등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에인절 클레어를 제외하고는 어떤 남자의 마음도 돌려놓을 만큼 애처로웠다. 품성이 한없이 부드러운 옥토 속에 들어 있는 철광처럼 논리라는 단단한 매장물이 숨어 있어 그것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모조리 그 끝이 뒤집어지게 마련이었다. 바로 그것이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았고 또 이번에는 테스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애정 자체가 불이기보다는 빛이어서 이성이 관계된 일에서는 믿지 않으면 따르는 일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지성으로는 경멸하면서 감각적으로는 매혹되는 감수성 강한 사람들과 대조를 이ㅣ 루었다. 그는 그녀의 흐느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일단 꿈이 외형에 의하여 조롱된 것을 알고났을 때 직선적인 마음을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반감의 파도가 아직도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감의 파도 아래에는 동정심이라는 역류가 흐르고 있어 세상일에 능숙한 여자라면 그것으로 그를 정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테스는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테스』2(민음사, 2009, 1판1쇄),34-35면.

그리고 인습이 불러 일으키는 비난은 단지 이들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클레어의 심려가 본능에 따를 수 있는 테스의 은밀한 희망을 짓밟는다.
   
"자연은 여우처럼 교활하여 지금까지 테스는 클레어를 향한 사랑에 눈이 현혹되어 있었으며, 그 사랑이 활력을 받아 아기를 갖는 결과를 낳고 자신에게만 주어진 불행이라고 슬 ㅣ 퍼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상동, 39-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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