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흔들림은 이 정권의 흔들림이면서 우리 내면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촛불에는 소망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타오르는 불꽃은 결국 자신의 소모로 꺼지고 만다. 그러나 타오를 때의 촛불은 얼마나 맹렬한가? 이 촛불 속에서 우리는 지나쳐도 좋을 만큼 상상을 할 수 있다.
촛불을 조명을 받으며 연단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4집까지 낸 시민가수는 조용필의 '그대는 왜 촛불을 드셨나요'를 멋지게 부르고 자신이 집회에서 즉흥으로 지은 노래도 발표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64세의 우렁한 노인은 방송국을 침탈하려는 고엽제 전우들에게 촛불을 든 시민을 지지해야 할 때라고 외친다. 맹인견의 마직만 훈련단계는 불복종이라며, 촛불집회에 관련해 학생들을 단속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수행하는 교육자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양심적인 한 현직 교감은 외친다. 홍제동에서 온 정정한 노인은 MB에 대한 탁핵보다는 소환에 시민들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행진을 나갈 때, 선두차에 오른 진행요원이 시청광장에서 나오는 끝없이 나오는 행렬을 보며 '국민은 위대하다'고 말할 때, 내 옆에 있던 50대의 시민은 핀잔을 준다. '이 정도 나온 걸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노무현 때부터 잘못됐다'고 한다. 수능을 150일 앞둔 일산의 고3 수험생은 단체급식을 받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군인 오빠들도 걱정된다고 호소한다. 인천에서 온 시민은 MB가 광우병이 발병하면 수입을 중당한다고 했는데, 변형 프리온의 잠복기가 10~15년인데, 잠복기가 지난 후 발생하는 병을 MB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냐고 말한다.
불꿏들은 거대하가 피어 오르지만 그 사연들은 동일하지는 않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은 자신들이 소고기를 먹을 처지는 안되지만, 언젠가 자신들도 안전한 소고기를 먹을 날을 만들기 위해 이 대열에 동참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끝, 종말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바탕한 서구의 주요한 이념으로서 유한성의 허구라고 말한다. 하나의 촛불은 꺼질지라도 촛불은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된 모든 것이 다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나 목적이 없다면 소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가 활동이라면 목적은 지향점이다. 지향점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활동이 아니라 여가다.
촛불의 흔들림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질서에 대항하는 하나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좋다.
촛불의 흔들림은 태고적부터 있었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공포는 이제 사회의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흔들림은 이런 폭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활동이며, 어둠을 드러내는 불밝힘이다. 촛불을 든 손이 멈추지 않는 한 불은 훨훨 타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