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풍경(14~15일)

단상 Vorstelltung 2008. 6. 17. 10: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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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흔들림은 이 정권의 흔들림이면서 우리 내면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촛불에는 소망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타오르는 불꽃은 결국 자신의 소모로 꺼지고 만다. 그러나 타오를 때의 촛불은 얼마나 맹렬한가? 이 촛불 속에서 우리는 지나쳐도 좋을 만큼 상상을 할 수 있다.

촛불을 조명을 받으며 연단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4집까지 낸 시민가수는 조용필의 '그대는 왜 촛불을 드셨나요'를 멋지게 부르고 자신이 집회에서 즉흥으로 지은 노래도 발표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64세의 우렁한 노인은 방송국을 침탈하려는 고엽제 전우들에게 촛불을 든 시민을 지지해야 할 때라고 외친다. 맹인견의 마직만 훈련단계는 불복종이라며, 촛불집회에 관련해 학생들을 단속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수행하는 교육자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양심적인 한 현직 교감은 외친다. 홍제동에서 온 정정한 노인은 MB에 대한 탁핵보다는 소환에 시민들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행진을 나갈 때, 선두차에 오른 진행요원이 시청광장에서 나오는 끝없이 나오는 행렬을 보며 '국민은 위대하다'고 말할 때, 내 옆에 있던 50대의 시민은 핀잔을 준다. '이 정도 나온 걸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노무현 때부터 잘못됐다'고 한다. 수능을 150일 앞둔 일산의 고3 수험생은 단체급식을 받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군인 오빠들도 걱정된다고 호소한다. 인천에서 온 시민은 MB가 광우병이 발병하면 수입을 중당한다고 했는데, 변형 프리온의 잠복기가 10~15년인데, 잠복기가 지난 후 발생하는 병을  MB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냐고 말한다.

불꿏들은 거대하가 피어 오르지만 그 사연들은 동일하지는 않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은 자신들이 소고기를 먹을 처지는 안되지만, 언젠가 자신들도 안전한 소고기를 먹을 날을 만들기 위해 이 대열에 동참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끝, 종말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바탕한 서구의 주요한 이념으로서 유한성의 허구라고 말한다. 하나의 촛불은 꺼질지라도 촛불은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된 모든 것이 다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나 목적이 없다면 소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가 활동이라면 목적은 지향점이다. 지향점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활동이 아니라 여가다.

촛불의 흔들림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질서에 대항하는 하나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좋다.

촛불의 흔들림은 태고적부터 있었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공포는 이제 사회의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흔들림은 이런 폭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활동이며, 어둠을 드러내는 불밝힘이다. 촛불을 든 손이 멈추지 않는 한 불은 훨훨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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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 자위권의 발동

주장 Behauptung 2008. 5. 7. 08: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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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데이비드에 가기 전, 부시와의 부드러운 첫만남을 위해 서둘러 쇠고기 협상을 종결짓도록 쇼를 하는 저 프랜들리한 대통령. 내수용과 수출용에 큰 차이가 있다며 수정안이 필요하다는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 말 속에서도, 협상 자체가 얼마나 졸속으로 치뤄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광우병에 대한 인지 자체도 무뇌아적이지만, 협상 과정 자체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이명박이 부시에게 프랜들리한건 그의 개인 일이라 뭐라 할 수 없겠지만, 이때문에 국민들이 기만당하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자연인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기관인 이명박의 프랜들리한 개인적 성품 덕에 대다수 국민이 광우병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이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중차대한 범죄행위다. 그렇다. 이 촛불집회는 인민의 자위권에서 나온 것이다. 대운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환경을 파괴한다면, 쇠고기협상의 졸속 타결은 국민의 건강을 사지로 몰아 넣는다. 여기에 보험민영화, 상수도와 같은 공공사업의 민영화, 사교육 열풍고조를 망라한 자연파괴와 인간파괴의 선봉에 선 이 정권을 인민이 거부하는 것은 인민의 기본적인 자위권에서 발동한 것이다. 예기치 않게 쇠고기 문제가 정국의 최대이슈로 급부상한 현상황이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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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밀서 : 순진한 바램

서술 Beschreibung 2008. 2. 20. 11:3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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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고종의 밀서가 발견됐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무력한 괴뢰 군주가 신에게 갈구하는 듯한 호소는 결국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조선을 점령해 달라는 애원으로 들린다. 참으로 부끄럽고 참혹한 문서다.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는 외교적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싶겠지만, 어설프게 굴다가 무장해제를 당해 포로가 된 병사가 비밀리에 보냈다가 아무런 응답없이 후일 남겨진 지원요청서와 무엇이 다른가. 누가 다른 나라의 지배를 즐거워하며 받아들이는가.  파탄난 왕조를 끌어안고 싶어하는 한 개인의 궁핍하고 순진한 내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을사녹약(1905) 원천무효 주장 전문 참고 :“ 짐(본인)은 대덕국(독일)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빌헬름 2세)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소>
 
고종의 이런 바램은 결국 40년 후 미소 양대 강국의 전략적 절충의 일환으로서 실현될 수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의 또다른 불운의 계기가 될 줄은 이 뒤떨어진 왕조 일가는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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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면서, 멋모르고 노동현장을 기웃거렸던 20대가 떠오른다. 회사 사무원의 감액전표할인이나 웃개에 대한 십장과 감독조의 착복처럼, 순진하게 노가다 일당의 2할을 소개인에게 입회비로 내준적도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착복의 위계를 바다를 메우는 한 현장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체험문학이다.
 
이윤이 생길리 없는 서해 남도의  매립공사를, 다른 큰 관급 공사를 수주하는 조건으로 시행하는 건설사는 비용을 최소화시키면서 공사를 진행한다. 일용노무자의 노무관리를 주먹패에게 맡기면서 회사는 감독조와 십장을 통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데, 이들의 비용은 결과적으로 이 일용 노동자들이 지불한다. 이 감독조는 함바에 속한 노무자에게 각각 부여되는 일련번호와 마찬가지로 일인당 몇개의 유령 일련 번호를 부여받아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해 맘보를 받는가 하면, 웃개에서 실제로 웃개조가 한 작업량을 깍아내려 그 차이만큼을 착복한다. 이런 작은 도둑질은 공사의 수주에도 걸쳐 있다. 형편없는 낙찰가로 매립건을 입찰받는 대신, 큰 건의 공사를 수주하고, 검은 돈이 계약 당사자간에 오고간다. 결국 이 잘못된 구조의 온갖 비리로 그 피해의 하중을 가장 극심하게 받는 이들은 객지에 몰려온 일당 노동자들이다.
 
황석영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경험한 객지 노동의 현장은 지금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일용노동자한테 노임을 보름 후에 지급하면서(간죠), 그 사이에 노동자들이 함바 숙식비나 식대, 주류 및 기호품의 소비를 위해 맘보(하루 노동이 끝나고 받는)를 전표로 감액할인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악질적인 교환방식은 이제 음지에서나 휭행할 일로 보이나, 현금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는 이런 식의 변칙적 결제 방식이 잔재해 있다. 영세한 출판계에서 이루어지는 어음결제가 이와 근사할 것이다. 이런식의 악질적 착취구조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첫장에 나오는 임금가치설에 비춰 본다. 헨리 조지는 이른바 진보된 사회라는 선진 문명국에서 빈곤이 증대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지대의 국가 국세화라는 처방을 제시한다. 이런 결론을 위해 우선 그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그가 애덤 스미스로부터 당대의 모든 정치 경제학들이 왜곡했다고 본 임금과 자본의 관계를 재규명한다. 임금에 대한 통례적 정치 경제학의 정의는 임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인데, 이를 헨리 조지는 임금은 노동으로 부터 나오는 것으로 규정하며, 자본은 산업의 형태를 제약할 수는 있지만 산업을 제약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은 생산도구나 원료 제공, 교통수단의 확보, 분업 등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부를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지 산업을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산업은 사회마다 그 발전의 경과가 다른데, 자본은 산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적합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자본의 효용은 떨어진다. 이에 대한 예로 헨리 조지는 영국에서 초대받은 호주의 식인족 추장이 영국민들에게서 우호적 선물들을 받지만, 귀국해 시드니에서 이 선물들을 무기와 교환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를 든다. 부정이 횡행하고 무질서한 사회에 투입된 자본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모범적 자본주의의 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헨리 조지의 논의에 따른다면, 이 소설에서 바다의 간척이라는 사회 간접 자본 시설의 구축을 위해 투입된 자본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도 부패한 자본이 판치는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실천 정신이 돋보인다.       
 
*용어 설명
 
감액전표할인 : 일용 노무자의 일당을 현금으로 당일 현금지급하지 않고, 보름 후 지급하기 위해 내어준 전표를 회사의 사무원이 노무자의 융통을 위해 당일 일정액을 제하고(이 사무원의 몫으로)  현금으로 교환해 주는 것.
 
웃개 : 공사 일정이 촉박한 상황에서 시공사가 정한 할당량을 인부들이 목표달성하면 일당보다 센 노임을 지급하는 작업    
 
맘보 : 하루 일이 끝나면 받게되는 전표교환증
 
함바 : 객지에서 온 일용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임시로 머무는 숙박소로 시설이 형편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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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큰삼촌에 대한 작가 어머니의 구술에 바탕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게 이런 기억들은 한반도의 보편적 가족사라 할 정도로,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짙게 퍼져 있다. 혼란의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주변강국에 의한 짧은 해방기,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으로 그어진 삼팔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를 겪은 세대와 이 세대의 품에서 자란 세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가족사에 각인해야 했다. 나의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소설상 이런 가족사를 형상화시킨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떠오른다. 최인훈은 김일성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전쟁전 북한의 생활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었으며, 이문열은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회한에 묻힌 필적을 남겼다. 특히 '광장'의 '이명준'은 '한씨연대기'의  '한영덕'을 연상시킨다. 그어진 삼팔선 양편에 성립한 광기어린 체제는 평범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살려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북은 강력한 수령 지도체제가 마을단위까지 확장된 집단 정치의 장으로 장악되었고, 남은 북에 대한 반공과 일제의 잔재로 뭉친 지배층과 인민의 갈등이 속출하는 사회적 혼란과 부패의 장이었다. 2차대전 후 약소국들이 겪는 혼란의 전형을 한반도가 보여준 것이고, 이런 혼란은 지금도 이라크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에서 진행중이다.
 
미국과 소련(이제는 중국) 사이의 힘의 완충을 위해 한반도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삼팔선으로 인해 갈등은 고조되었고 전쟁으로까지 치달었다. 강대국의 몇몇 정책 브레인에게서 나온 생각들이 '한민족'이라 불리는 인민의 가족사를 갈갈히 찢어 놓았다. 이러한 상실과 이산의 아픔을 눌러앉은 채 한쪽에서는 형식상 민주적 지배체제가 형성되었고, 다른 한쪽엔 기형적 지배체제가 지속하고 있다. 한쪽은 아예 공화국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왕정이라고 이해하는게 합당하다. 이 왕정이 일당지배체제를 버리는 정치실험을 하는 날이 온다면, 입헌 민주정이 될 것이다. 변화가 어떻게 되든, 통일에 대한 생각은 잊혀져 가는 가족사를 들출 때마다 되새겨지는 주제다.    
 
*MB정권에서 아무래도 한반도 대운하를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움직임이다. 팔당상수원을 없애고(땅값 오르겠다), 낙동강의 지하수로 서울의 상수원을 삼겠단다(대운하의 물은 물류선박의 운행으로 상수원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초등생도 웃을 대학교수의 계획이다). 그런 몰상식적인 토목공사를 그렇게도 하고 싶다면, 차라리 통일한국의 미래를 위해 북한에 인프라를 닦는 사업을 하는게 타당하다.
 
*소설에 대한 간략한 요약
 
한영덕은 일제시기 평양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주변머리가 없어 기술이 없이는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의전과 교토의대를 나와 대학병원의 의사가 된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선동집회에 불참하는 등, 체제 선전에 비타협적 자세로 일관하자 당으로부터 불온분자로 몰려 전쟁중 군의관으로 전선에 나가는 명단에서 제외되 평양의 인민병원에서 전란의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돌본다. 전쟁초기부터 시작된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평양에서 어렵게 환자를 돌보던 한영덕은, 미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평양을 벗어나자는 친구의 권유를 물리치고 꿋꿋히 환자를 보았지만, 후퇴를 결정한 당이 부적격 사상범으로 한영덕을 비롯한 불순분자들을 집단 처형시킨다. 기적적으로 처형장에서 살아남은 한영덕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북에게 유리해 지자,  대동강변에서 모친과 아내, 딸아이를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월남한다. 남에서 동생을 만난 한영덕은 시간의사를 전전하며 어렵게 지내다 평양출신 치과의사의 소개로 무면허 의료사업을 하는 두 사업자를 만나 병원을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이들과의 만남으로 한영덕은 부당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절한 고문까지 받는 불운한 시절을 보낸다. 소설은  남한에서 체제가 안겨준 고초를 겪고 난 후, 남한에서 새롭게 이룬 가정을 등지고 배회하다 말년의 안식을 위해 적산 가옥의 다락방에서 한 노인이 살림을 풀어 헤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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