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풍경

주장 Behauptung 2007. 12. 27. 14: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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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지 않게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날씨라도 좀 추워야 연말 분위기가 나는데, 대선이라는 국가이벤트가 지나가자 기후도 싱겁게 돌아가는듯 하다. 이 국가 이벤트가 연말 분위기를 다 잡아 먹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예정된 참패를 겪은 후, 뉴스레터를 보내주는 한 신문은 여전히 하이에나의 근성을 못버리고 당선자의 흠집을 찾는데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기사도 상품과 마찬가지로 팔려야 한다는 '간절함'에서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민주주의를 상품화시키는데 이 신문이 기여한 바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도대체 민주의의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실현되어, 그 효력이 상실된,  폐장화폐에 불과한가?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던 김대중 정권은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명분에 어울리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 상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말이 수평적 정권교체지, 넓게 보면 김대중 정권은, 자신이 비판했던 김영삼 정권과 마찬가지로 타협적 정권교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정권을 수여한 이 타협의 대상은 사실 전혀 자신의 힘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켰다. 즉, 역시 타협적 정권교체를 모색하다 드라마적으로 정권을 연장시킨 노무현 정권 뒤에서 이 정권을 조정한 것이다. 이제 미국중심의 불안정한 세계자본주의의 궤도에 개발독재로 이룩한 전시산업이라는 폭주기관차를 고속으로 운행시키는 시발역이 이명박 정권인 셈이다. 즉 양김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을 준비시킨 것이고, 다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흙먼지와 소음만 심해질 뿐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준비된 패배고 10년 정권의 몰락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본래 그렇게 흘러 가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에서 빗겨 가고 있다. 이 물음은 빗겨가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남한의 생활세계와 체제에 대한 모든 규정을 근거짓는 기초법의 제 1 원리, 제 1조항이기 때문이다. 저조한 득표율과 이에 따른 계파갈등을 겪는 민노당을 비롯, 허본좌라 불리는 대권과대망상증에 걸린 광대에게도 뒤지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한 한국사회당에서는 이런 근본적 물음을 들고 이번 대선을 치뤘다. 이런 물음을 내면화시키는 풍토가 선거기간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진다면, 적어도 10년~20년 후에는 지금과는 판이한 정치풍토가 형성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는 비단 한국사회당 만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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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외투다

단상 Vorstelltung 2007. 12. 27. 11: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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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외투다

겨울에 외투가 없으면 춥다

그래도 집에 오면 이 외투를 벗는다

이 외투를 위해서 살 필요는 없으나, 이 외투를 벗으려면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다.

벗어봤자 다른 외투를 입어야 한다면, 벗지 않는만 못하다.

물론, 좀더 비싸고 편안한 외투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자신한테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추위를 피할 동안은 이 외투를 꼭 껴입고,

봄날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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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 관람기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7. 13:5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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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수사결과, 이명박이 김경준의 사기에 놀아난 것으로 실증되었다 해도, 이명박 자신이 설립했다고 자랑하고 다닌 투자회사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것은 뭐라고 할 것인가? 과연 금융기관이 김경준을 보고 투자했겠는가? 설령 얼굴마담 노릇만 한 것이라고 해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이 책임을 검찰은 아직도 도덕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만, 금융사기의 피의자로 몰릴 수 있는 후보에게 도덕이라는 말은 쟁점을 흐트러뜨리는 연막이다)  지금으로서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후보를 사퇴하고 차기를 노리는 것이다. 대선을 며칠 안남긴 시점에서 특감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로 치닫던 이 야만적 대선구도에서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는 것은 앞으로 고단스러운 일정을 예고한다. 거대 야당에게 압도적 지지가 몰린다고 해서, 강한 의혹의 중심에 놓인 후보로 정권을 탈환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수인지 알겠지만, 그들이 이런 수를 고수하는 근거는 그 여론조사 지지율 외에는 없다. 이명박 지지율에 이상이 생기면 손을 내밀 쪽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불확실한 지지율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17대 대선은 정치 후진국의 면모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로또행사, 대박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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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환승구역

카테고리 없음 2007. 12. 11. 10:2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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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 전에 나는 출퇴근으로 이용하는 환승 지하철역에서 벽에 칼라 타일을 바르고, 의자도 디자인감각이 발휘된 것으로 바꾸는 내부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봤다. 이 환승역을 이용한지가 6년은 되가나 환승구간의 계단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켈레이터가 없다는 것이 내게 별 불편이 없었지만, 노약자에겐 큰 불편이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미관을 꾸미는 내부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났다. 이런 돈이 있으면 엘리베이터 공사를 할 것이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내부미관공사에 쓰냐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나는 서울시와 도시철도공사, 그리고 한겨례에 메일로 제보했다. 그러자 서울시에서 답신 메일 왔다. 서울시에서는 이 일의 담당부서를 찾아 제보를 맡기는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그러고 나자 철도공사에서 메일이 왔다. 그런 내부미관공사는 서울시와 서울 메트로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며, 환승구간의 승강기 공사는 철도공사에서 해야 하지만 비용의 문제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답변이 궁색해 답장메일을 보냈지만, 수신처는 불명이었다. 다른 채널로 다시 답변을 요구해 보려 했으나, 다른 일들에 밀려 나의 소극적인 이메일 투쟁은 종식됐다.

그러면서도 나는 매일 이 환승역을 이용한다. 그런데 아침마다 목발을 잡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는 남성을 보면서 웬지 책임질 수 없는 미안함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목발이라도 쥘 수 있는데 바쁜 아침에 공익을 불러 장애인용 리프트를 이용하기도 구차한 일이다.

대규모 개발과 관련된  공공사업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경우가 많다. 오래전부터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서울 전역의 재개발사업을 보면, 어느 정도 자산의 여력이 있는 40~50대 중장년들은 신중한 자세로 이 사업의 타당성을 가계와 직결시켜 계산한다. 그러나 월세나 낮은 보증금의 전세로 살아가는 노년층에게 이 사업은 퇴거명령과 마찬가지다. 재개발사업이 확장될 수록, 사회적 약자들은 재개발의 사각지대로 집중해 간다.

전투기 사업에 쓰일 수조원의 돈이면 이런 문제들은 해결된다. 누구를 위한 국방인가?    

*환승역은 옥수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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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헤겔 Hegel 2007. 10. 23. 09: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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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누군가에게 책 추천을 부탁받고 이리 저리 뒤적이다 함석헌의 책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어떻게 해서 함석헌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구내서점에서 '들사람 얼'을 사서 도서관에서 즐겨 읽었었다.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정신이 번뜩이는 말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이는 함석헌이 한국에 전무했던 계몽주의를 발흥시킨  인물로 보았지만, 계몽주의가 한국에 전무했다는 말은 지나치다. 분명 함석헌은 재조명이 필요한 한국의 계몽가이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후 혼란, 독재정권의 창궐이 진보를 향한 흐름을 막은 것이지 이런 흐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칸트가 말한 공적인 이성의 사용을, 죽음을 무릎쓰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유생에게서 볼 수 없겠는가? 현재로선 유교는 폐기처분할 유산이지만,  왜란과 호란을 겪기 전까지 조선에서 유교는 샤머니즘과 불교의 초현실적 세계관에 대척하면서 이상적 정치 질서를 만들기 위한 현실의 이념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남명과 퇴계의 학문이 실학, 나아가 동학과 만나지 못한 것이 조선의 불운이자 자생적 한계다. 이런 한계는 어떤 것에서 유래된 것일까?

예나시기 정신철학에서 청년 헤겔은 개별성을 극복한 단계로서 민족(Volk)을 말한다. 공동생활의 단계로서 민족, 국가는 개별성으로 축소될 수 없는 상태다. 개별자로 끊임없이 분리되는 곳에서 어떻게 공동의 이익이 나올 수 있는가?  따라서 국가 이전의 상태는 야만이다. 그런데,  국가가 성립해 있지만, 그 국가의 운영자들이 개별자로서의 자기 이해에 파묻혀 간다면 그런 국가도 야만적이다. 한국이 세계 10위의 군사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미래의 성장동력을 무기사업에서 찾는다는 비전으로, 새로 개발한  전차를 터키에 수출하기 위한 상담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의 무기상은, 터키가 이라크내 쿠르드족과 싸우면서 유가가 급등하는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유가 급등은 근본적으로 석유라는 한정된 자원과 이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대립,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근본적 원인이 있지만, 이런 야만적 세계질서 속에서 국가라는 체제가 개별성의 이해로부터 얼마나 침탈되는지 정도가  그 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버마의 정치 체제는 야만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겉으로 드러내 놓는 처지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내부에선 이런 야만이 꿈틀대고 있는게 현실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정권의 변동기에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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