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과 촛불

단상 Vorstelltung 2011. 6. 5. 23:3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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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등록금과 촛불의 연결이 웬지 어색한데, 쇠고기 수입 반대와 촛불의 연결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전자들은 예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까집어 내는 실마리로 그 까대기를 기다라는 계기라고도 볼 수 있다. 한나라가 더이상 별볼 일 없는 세력으로 나가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서도, 일종의 확인사살 요법으로 엄중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신중한 처사로서,  반액등록금 투쟁은 흥미진진한 면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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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 극복가능한 질병의 하나

문학 Literatur 2011. 6. 1. 14:5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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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연찮게 들은 음악(브람스의 '알토 랩소디')으로 살기 위한 결단을 내린 후, 입원치료를 받고 결국 우울증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온 스타이런은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썼으며(처음 발표는 1989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정서장애 심포지엄 강연, 그리고 Vanity Fair라는 잡지에 이 강연문을 기재), 희미하게나마 그 극복에 대한 소망을 피력한다. 세찬 비를 맞고 길바닥에 떨어진 목련처럼, 근래 벌어지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자살 러쉬는 잔혹한 상처에 따라 급습한 우울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스타이런의 유년 시절 경험으로는 불충한 애도 Incomplete Mourning) 우울증이 몰고간 극단의 처방에 자신을 던진 결과일 수도 있다. 의약학 지식에 관해 전문가 수준에 육박하는 독서를 한 저자는 우울증 대처를 위해 상담치료 보다는 약물치료를 더 중시하고(수면제로 사촌지간인 할시온 보다는 달먼으로), 필요하면 입원하는 것도 권장한다. 결국 우울증도 암과 마찬가지로 사투를 벌여야 할 치명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우울증이 재발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고통에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이 다시 발병해도 제법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는데, 이미 우울증이라는 도깨비를 겪어본 경험으로 심리적인 조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초로 우울증의 발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병이 ㅣ 지나가야 할 모든 과정을 전부 다 거쳐야만 낫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깝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현실적인 절망 상태에서 과장된 병마와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해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가족,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에게 생명의 가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런 헌신은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보이는 어둠』,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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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관한 고백

문학 Literatur 2011. 5. 30. 23:0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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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읽은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이후, 이 작가의 작품이 끌렸다. 일단 잡힌 것이 『보이는 어둠』. 갓 노년에 이른 작가가 우울증에 걸려 정신이 녹아내리는 경험의 과정을, 아마도 정상적인 정신의 상태일 때 기술한 에세이로 보인다. 잘 모르던 작가였는데, 그러한 걸작을 남긴 작가가 이런 병에, 그리고 그 자신이 겪어서 보기에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 중병에 빠져든 것이 『소피의 선택』에 흐르던 유쾌하면서도 슬픈, 격정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장면들과 뒤섞이면서 서글퍼진다. 

"나를 휩쓸고 지나가 결국 12월에 입원하게 만들었던 폭풍우는, 6월쯤에는 포도주 잔 정도의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구름-표면적인 위기-은 내가 사십 년 동안이나 남용해왔던 술과 관계가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져나온 논문과 책에서 볼 수 있듯, 전설적일 만큼 치명적으로 술에 의존했던 수많은 미국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환상과 몽롱한 행복감으로 안내하고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마술적인 유도물로 술을 애용했다. 진정제나 승화의 도구로 술을 사용한 것을 후회하거나 ㅣ 변명할 마음은 없다. 술은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는 단 한 줄의 글도 쓴 적이 없었지만 나는 글을 쓰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과 더불어 종종 술을 이용했다. 술은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는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술은 나의 오랜 지적 동반자였다. 게다가 날마다 봉사를 요구했던 절친한 친구로서 내 영혼 깊은 토굴 속 어딘가에 오랜 세월 동안 감춰두었던 불안과 싹트는 공포를 진정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내 시련은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출현했다. 나는 배신당했다. 그 시련은 어느 날 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다가왔다. 더이상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마치 내몸이 마음과 더불어 궐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날마다 술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졌던 내 몸이 갑자기 술을 거부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더더욱 술이 필요한 그 순간에 술이 내게서 등을 돌릴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많은 술꾼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거부현상을 경험한다고 했다...하여튼 술을 마ㅣ시기만 하면 , 심지어 한 모금의 포도주조차, 구토를 일으켰으며 절망적이고도 불쾌한 멍한 기분과 가라앉는 느낌과 끝내는 눈에 보일 정도의 혐오감이 나를 휘감었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친구가 서서히, 마지못해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늘 그렇듯이 한순간에 내 곁에서 떠나버렸다."

윌리엄 스타이런 William Styron, 『보이는 어둠』Darkness Visible (1992) 임희옥 역(문학동네, 2008, 1판 7쇄), 49-51면.

그래도 술은 약에 비하면 건강한 정신에겐 강장제이지만,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태는 퇴락이다. 스타이런은 너무 마셨던게 아닐까. 

"이제서야 확신하는 바이지만, 술은 우리가 서로 작별을 고할 때 나에게 심술궂은 속임수를 썼다. 알려진 것처럼 술은 심각한 우울증 유발 물질이다. 그럼에도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은 한 번도 말 그대로의 우울증을 나에게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안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했다. 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패막이 노릇을 했던 동맹군인 술이 갑자기 증발해 버리자, 악의 사신이 무리지어 잠재의식으로 몰려오는 것을 막아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벌거벗은 몸이 되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상동,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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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1802)

문학 Literatur 2011. 5. 29. 11:5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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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공소시효가 있듯이 문학에 어떤 시효가 있을리 없지만, 사실 지루했다. 근대 낭만주의 문학의 상징작으로 뽑히는  노발리스의 이 작품에는 설화와 동화의 알레고리가 복잡하게 엮어 있어 꼼꼼하게 안보고 넘어가면 지루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미완성작인 이 책의 2부 "실현"에 가서야 뭔가 알아들을 만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스물 아홉이라는 노발리스의 단명을 상징하듯, 칼로 자르듯 이야기는 중단된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인 Heinrich von Ofterdingen은 13세기 초엽의 궁중에서 노래경연을 펼치던 전설적인 연애가수이며, 부제인 '푸른 꽃'은 바다나 하늘을 연상시키는 색조로, 현실 너머의 세계를 향한 낭만주의적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적 인식을 상징한다. 

파벨, 에로스로 상징되는 시의 세계가 서기로 상징되는 이성의 세계를 전복시키고 난 후, 페르세우스가 새 왕에게 가져온 유품에 관해

" "여기 폐하의 적들의 유해를 가져왔습니다."
  바구니 안에는 흰 칸과 검정 칸이 그려져 있는 석판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과 그와 함께 설화 석고와 대리석으로 만든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체스 게임이에요." 소피가 말했습니다. "모든 전쟁은 여기 이 석판과 이 인물들에게로 추방되었어요. 어두웠던 지난날의 기념물이지요.""

노발리스, 『푸른 꽃』김재혁 역(민음사, 2008, 1판 16쇄), 9장, 218.

하인리히가 마틸데를 잃고 순례자가 되어 방황하다가 만난 실베스타의 딸과의 대화 중

""네 어머니가 누군데?"
"하느님의 어미니."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됐니?"ㅣ
"무덤에서 나온 뒤로 줄곧 있었어."
"그렇다면 넌 이미 한 번 죽었다는 거니?"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살아 있을 수 있겠어?""

상동,  236-237.  

제 2부에서 교육과 양심에 관한 실베스타와 하인리히의 대화 중

"[실베스타]자네는 부모님의 간섭을 조금도 받지 않고 자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하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서로 다른 식성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마구 헤집어놓고 간, 잘 차려진 만찬의 찌꺼기일 뿐이거든...[하인리히]저희 아버지는, 모든 관계를 한 조각의 금속이나 수공업 작업처럼 뜯어보려고 하는 냉정하고도 견고한 사고방식을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는 모든 불가해하고 드높은 현상들에 대해서 외경심과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계신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성장을 겸손한 극기의 자세로 지켜보시는 것이지요. 어린아이에게는 무한한 샘물에서 갓 생겨난 정신이 작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모든 숭고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우월하다는 이러한 느낌, 이제 막 위험한 여행의 초두에 서 있는 이 순진무구한 존재를 제 발로 걷도록 가까이서 인도해야 한다는 불가항력적인 생각, 지상의 홍수가 여태껏 한번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든 적이 없는, ㅣ놀라운 세계에 대한 각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보다 밝고 다정하고 신비스럽게 모이고 예언의 정신이 거의 눈에 보이게 우리 곁에서 걷던 그 놀라운 시절에 대한 그 자신의 회상에서 유추해 낸 사물 간의 교감 등 이 모든 것이 저의 아버지로 하여금 저를 경건하고도 겸손하게 다룰 있게 해주었다고 하겠습니다."(상동, 241)
[하인리히]공포과 고통, 결폅과 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날은 언제인가?[실베스타]이 세상에 단 하나의 힘만 존재하게 되는 날이지. 양심의 힘 말이야. 그리고 자연이 겸손하고 도덕적이 되는 날이지. 이 세상엔 단 하나의 악의 근원이 있어. 그건 바로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나약함이야. 그리고 이 나약함이란 다름 아닌 도덕적 감수성의 빈약을 뜻하는 거야. 또한 자유의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해(상동, 246)...양심은 보편적인 격언으로 명령하지 않아. 양심은 여러 가지 개별적인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아. 단 하나의 덕목이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결정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결심을 하고 선택을 하는, 순수하고 진지한 의지 말이야. 양심은 생기 있고 독특한 불가분성 속에 살면서 인간의 육체라는 연약한 상징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모든 정신의 사지가 진정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지...[하인리히]그러니까 동화의 진정한 정신은 덕의 정신을 다정하게 변장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이보다 하위에 있는 시 문학의 진정한 목표는 가장 드높고 가장 참된 ㅣ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데 있어요. 진정한 노래와 고상한 행동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해요. 매끄럽고 거스르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 편히 지내던 양심은 매력적인 대화로, 모든 것을 말하는 동화로 바뀌는 거예요.이 태고의 세계의 들판과 커다란 홀에 시인이 살고 있어요."(상동, 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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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

단상 Vorstelltung 2011. 5. 27. 18:2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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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과 차량 정비소를 다녀왔다.
시스템화된 장치에 관리되기는 인간의 신체기관이나 자동차 부속이 다를바 없다.
신체에 암세포가 생기면 발생 부위를 절개하고 평생 약을 먹인다. 부품에 이상이 생기면 갈아 치운다.
관리되는 신체. 푸코가 말했던 생체통제권력이 야릇하게 목을 조이는 현실이다.
차량 정비소와 병원의 유사성 운운이 우습게 들리지만, 대상을 대하는 시스템화된 구조는 맹목적이며 친절의 가면만이 덧씌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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