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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Vorstelltung'에 해당되는 글 203건

  1. 2009.04.07 지역살림
  2. 2009.01.23 새해 풍경
  3. 2009.01.01 쥐를 보낸 날
  4. 2008.07.09 슬픈열대 중
  5. 2008.06.17 촛불의 풍경(14~15일)

지역살림

단상 Vorstelltung 2009. 4. 7. 14:0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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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Commune : 지역 살림에 대한 시론

 사람은 모자간 육아의 단계에서 벗어나면 시원적 생활세계*인 가정을 벗어나 일정한 교육시설에서 사회화의 첫발을 들여 놓는다. 이때의 교육시설은 주로 영영아, 영아, 유아를 돌보는 시설로 지역의 생활세계에 속한다. 아이가 성장해 성년이 되어갈수록 이러한 일차적 생활세계**는 지역 생활세계에서 이차적 생활세계인 광역의 생활세계로 확대되며, 성년은 더 이상 교육만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생산활동을 통해 자기 삶과 후세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인의 단계이다. 물론 이런 얘기는 순전히 모범적인 예에 불과하며, 실제로 일차 생활세계와 이차 생활세계 간에는 간극이 있어서 지역의 생활세계와 광역의 생활세계가 틀어지는 것이 청년백수 현상인데, 광역의 직업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예이다.

 여기서는 일단 광역의 생활세계를 학교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동네의 단위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보자. 유아단계부터 동네 단위의 교육시설을 벗어나 광역단위로 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중등교육기간까지 사람들은 동네 단위의 일차적 생활세계에서 있기 마련이다. 지역평준화가 흔들리면서 중고등학생들이 광역의 생활단위로 편입해 가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공교육도 점차 광역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사교육은 체인점처럼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광역 단위로 확장을 꾀한다.

교통체계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매우 유동적인 사회에서 생활세계를 지역과 광역으로 나누는 것이 억지로 보인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한창 주창되는 로컬푸드 운동을 볼 때, 먹을거리의 안전성과 에너지 부하 절감에서 지역이 주목된다면, 여기서 삶을 피워나가는 사람들의 생활세계도 간과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지역과 광역으로 지역을 분화하는 것이 단지 행정 편의적인 구획만은 아니다. 지역의 먹을거리가 지역에서 순환하는 흐름이 가능하다면, 지역에서 자란 아이들이 지역에서 성년을 맞고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모델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이 둘이 관련되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자립적인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아미쉬처럼 종교에 기반한 폐쇄적인 자립형 공동체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지역의 생활세계는 이렇게 강한 공동체성을 염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농촌사회를 기반으로한 공동체 모델은 분명 패기할 과거의 잔재는 아니지만,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과제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한 종교나 이념을 구심점으로 삼는 공동체와 상관없는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까? 물적, 인적 흐름이 지역과 광역의 구분을 의미없게 만드는 체제에서 지역의 자립적 경제란 수치상의 구분에 불과할 뿐이다. 먹을거리의 지역화도 어느 선상에서 한계가 있다. 도심에서 벼가 자라는 토지를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먹을거리를 통해 지역의 살림에서 되먹임 작용이 일어난다면, 살림의 차원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서도 지역에 기반을 둔 모델이 가능하지 않을까?

주)

*‘생활세계’라는 표현은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영역은 밀접히 맞물려 돌아가는데, 정치와 행정, 경제 영역을 포괄하는 체계는 생활세계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지만 반대로 생활세계가 체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론이라는 수동적 반사 외에는 극히 미미하다.

**가족 중심의 시원적 생활세계와 마을, 지역 중심의 생활세계를 통틀어 일차적 생활세계라고 규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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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풍경

단상 Vorstelltung 2009. 1. 23. 09: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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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구속, 신동아 논란, 용산사태..한 해의 시작이 참으로 가파르다. 신동아는 아무래도 고도의 상술같고, 미네르바로 들끊던 여론에 용산사태는 시너를 부었다. 합법적 정권을 시기하고 질타하는 트랜드는 민주화 이후 하나의 틀처럼 굳어졌지만, 아무래도 이번 조짐은 심상치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MB 정권이 한나라당과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노통이 몸소 외쳤던 권력분점의 분수령이 MB정권에서 정착될 가능성..웹2.0시대에 라디오 방송에서 설교를 하며 벙커에 들어가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은 잊혀진 과거를 향수하는 한편의 무성영화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제 이런 영화를 못봐 준다는 거다.

 

                      사진 : 푸른내, 고공농성 중에 있는 울산 미포조선소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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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보낸 날

단상 Vorstelltung 2009. 1. 1. 23: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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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에 갑자기 L형의 문자가 왔다. 내용은 "쥐잡으러 가자". 한창 사무실에서 닥치는 이 일 저 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전화 버튼을 눌렀다. MB때문에 열받아 미치겠다며 31일 촛불집회에 나가자는 것이었다. 사안의 핵심은 방송법인데, 사실 뉴스에서 그렇게 열을 내어 보도를 하는 만큼, 시급한 민생사안은 아니라고 보지만, 안그래도 볼게 별로 없는 방송 중에서 그래도 나은 편인 공중파 방송이 더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정신없는 일과를 마치고 멍한 정신으로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자리를 잡고 앉자 졸음에 떨어졌다. 자다가 눈을 뜨니 승객이 많이 빠져 나간 전철은 시원한 벌판을 달리고 있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집에 들어가면서 K에게 별일 없으면 31일 촛불집회에 가보지 않겠냐고 전화했다. 그리고 어제, K는 그의 선배와 함께 종로에 왔고, 오기로 했던 L형은 끝내 오지 않았다. 종로에 있는 교회에 송구영신예배를 보기 전에 가족과 함께 들르겠다고 했는데, 어린애를 데리고 칼바람 부는 거리에 오기가 쉽지는 않다. 5,6월이라면 모를까. 셋이 만나서 일단 배를 채우기 위해 샤브샤브집에 들어갔다. 간단히 소주를 겸해서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가 봤는데 촛불 행렬은 보이지 않았다. 청계광장을 거쳐 세종로 사거리에서 보신각 건너편에 가서야 풍선을 든 우군을 만날 수 있었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뻗치기를 하고 있던 전경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자다. 그래도 전의경 중에서 짬이 있는 편인 수경들과 경찰 간부들은 포장마차에서 꼬치를 먹을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들이다. 국세청 앞에서 계속 서 있다가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다시 술집에 들어갔다. 일본식의 자연주의적 인테리어를 그대로 뜯어다 붙이듯한 술집에서 오뎅탕을 시켰는데, 가격에 비해 먹을만 했다. 마치 밖은 물류창고의 냉동고 같아서, 갑자기 따뜻한 데 들어오니 머리가 먹먹하고 입은 무거워 졌다. 소주 몇잔을 걸쳐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방송과 영화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쓴 작품에 관한 얘기도 나왔다. 단편소설은 비교적 최근에, 그리고 오래 전에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는데,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었다. 시니리오는 부동산업을 하던 선배가 보고 재밌었다는 소감과 한 시나리오 작가에게 보냈다가 편집의 실수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정도의 에피소드가 전부이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보고 흥을 받아 쓴 단편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걸 같고 업으로 한다면 공개도 해서 주변의 평가를 받는 게 필요한 일이지만, 한때 바람일 뿐이라면 그냥 바람으로 놔둬야 한다. 술집을 나서자 종이 피켓을 든 시위대가 줄을 지어 보도를 지나간다. 10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K의 선배는 집으로 가고, K도 그냥 집으로 가려다가 사회당 사람들 얼굴도 보고 갈겸 다시 국세청 쪽으로 갔고, 나는 낙원상가 앞 사거리에서 파고다 공원 쪽으로 길을 건넜다. 종각역은 10시 이후에 전철이 무정차통과한다고 해서 종로 3가 역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건넜는데 전경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파고다 공원쪽에서 모인 시위대의 진출을 막기 위해 전경이 길을 막은 것이다. 날도 춥고, 술도 한잔 했는데, 길까지 막고 있으니 순간 화가 났다. 마구 소리치며 하며 전경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하자 한 경찰이 파고다 공원 끝쪽으로 해서 돌아가라고 한다. 이 말에 더 열이 받아 괜한 호기를 부렸지만, 내가 경찰이라고 해도 그런 말 밖에는 못할 것이다.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경동시장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탔다. 쥐를 보낼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시간에 미리 신년인사를 나누는 문자를 주고 받으며 버스는 막다른 시간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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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열대 중

단상 Vorstelltung 2008. 7. 9. 12: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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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신세계의 도시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이것들은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드는 것이다...유럽의 어떤 도시들은 천천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쇠퇴하고 있으나, 신세계의 도시들은 영원한 청춘을 간직할 수 없는 하나의 고질(固疾)과도 같은 계속적인 고열을 지니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 Tristes Tropiques, 제 11장 상파울로)

빔 벰더스의 '파리텍사스'에서 그려지는 미국의 황량한 들판과 기계적 도시는 바로 구도시 '파리'와 신대륙 '텍사스'의 무미건조한 결합을 보여줍니다. 빔 벰더스는 이런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시선을 노출합니다. 이에 비해 서울은 왕조의 전통과 식민지 잔재, 미국문화라는 혼재된 시대의 퇴적층에 이제 재개발의 쇠말뚝이 곳곳에 박히는 기이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 줍니다. 명박산성은 점점 높아지고 확대되는데, 산성에 들어가기엔 지불해야할 높은 통행세를 감당못할 대중의 삶은 외곽으로 몰려가는 현장이 MB 시대 서울의 모습입니다. 청춘을 잃어버린 늙은 도시의 몸체에 성형만이 능사인 아름다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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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풍경(14~15일)

단상 Vorstelltung 2008. 6. 17. 10: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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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흔들림은 이 정권의 흔들림이면서 우리 내면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촛불에는 소망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타오르는 불꽃은 결국 자신의 소모로 꺼지고 만다. 그러나 타오를 때의 촛불은 얼마나 맹렬한가? 이 촛불 속에서 우리는 지나쳐도 좋을 만큼 상상을 할 수 있다.

촛불을 조명을 받으며 연단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4집까지 낸 시민가수는 조용필의 '그대는 왜 촛불을 드셨나요'를 멋지게 부르고 자신이 집회에서 즉흥으로 지은 노래도 발표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64세의 우렁한 노인은 방송국을 침탈하려는 고엽제 전우들에게 촛불을 든 시민을 지지해야 할 때라고 외친다. 맹인견의 마직만 훈련단계는 불복종이라며, 촛불집회에 관련해 학생들을 단속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수행하는 교육자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양심적인 한 현직 교감은 외친다. 홍제동에서 온 정정한 노인은 MB에 대한 탁핵보다는 소환에 시민들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행진을 나갈 때, 선두차에 오른 진행요원이 시청광장에서 나오는 끝없이 나오는 행렬을 보며 '국민은 위대하다'고 말할 때, 내 옆에 있던 50대의 시민은 핀잔을 준다. '이 정도 나온 걸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노무현 때부터 잘못됐다'고 한다. 수능을 150일 앞둔 일산의 고3 수험생은 단체급식을 받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군인 오빠들도 걱정된다고 호소한다. 인천에서 온 시민은 MB가 광우병이 발병하면 수입을 중당한다고 했는데, 변형 프리온의 잠복기가 10~15년인데, 잠복기가 지난 후 발생하는 병을  MB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냐고 말한다.

불꿏들은 거대하가 피어 오르지만 그 사연들은 동일하지는 않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은 자신들이 소고기를 먹을 처지는 안되지만, 언젠가 자신들도 안전한 소고기를 먹을 날을 만들기 위해 이 대열에 동참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끝, 종말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바탕한 서구의 주요한 이념으로서 유한성의 허구라고 말한다. 하나의 촛불은 꺼질지라도 촛불은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된 모든 것이 다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나 목적이 없다면 소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가 활동이라면 목적은 지향점이다. 지향점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활동이 아니라 여가다.

촛불의 흔들림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질서에 대항하는 하나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좋다.

촛불의 흔들림은 태고적부터 있었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공포는 이제 사회의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흔들림은 이런 폭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활동이며, 어둠을 드러내는 불밝힘이다. 촛불을 든 손이 멈추지 않는 한 불은 훨훨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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