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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reines Fürsichseins)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인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타인은 추호도 자기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지 않고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애매한 구절이다], 밖으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는 다양한 일상사에 매여 있는 그런 의식이지만,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타자로서 맞서려고 하는 것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절대적 부정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한 이러한 확증은 필경 이로부터 발현되어야 할 진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확신마저도 전적으로 무산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의식을 떠받쳐주는 자연적인 기점이며 절대적 부정성까지는 갖추지 않은 자립적인 힘으로서, 그의 자연적인 부정상태로서의 죽음은 아무런 자립성도 없는 부정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은 인정의 의의를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을 통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 ㅣ 을 업신여기는 것은 확증되지만, 이러한 확증은 싸움을 견뎌낸 당사자에게 안겨지지는 않는다...그리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관계 속에 양극으로 대립해 있다는 본질적인 계기는 상실한 채 다만 죽은 통일체라고나 할 중간 지점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니, 이렇게 죽음의 궁지로 내몰린 상태에서는 이 중간지점도 역시 대립없는 양극에 묻혀버리게 된다. 양극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체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채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생사를 건 투쟁은 무의미한 부정으로서, 이는 상대를 타파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aufheben) 파국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의식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정신현상학』,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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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이 있는 데 지나지 않는 온갖 생명체는 생명(Leben)의 전개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자립성을 상실하고 형태상의 구별이 스러져버리는 것과 함께 생물로서의 존재성을 잃게 되지만 이와는 달리 자기의식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면서도 여전히 자립성을 지키는 그러한 존재이다. 이로써 자기의식은 스스로가 유임을 자각하여 자기의 고유한 특성을 확보하는 가운데 생명계 전체의 유동성을 몸소 떠안게 되는바, 이것이 살아있는 자기의식이다..."

『정신현상학』, 219.

"자기의식은 우선 단일한 독자존재로서,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다. 이때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자아'로서, 자기의식은 직접 이 '자아'와 어우러진 가운데 '자아'라는 독자적인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는 타자와 맞서 있는데, 이때 타자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성격지어진 비본질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타자 역시 자기의식인 까닭에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형성한다.
   그러나 갓 출현했을 때의 이들 개인은 서로가 흔히 마주치는 대상일 뿐이어서, 비록 독립된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식은 생명이라는 존재-여기서는 생명이 대상과 같은 존재이다-속에 매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의식은 서로가 직접적인 자기존재를 송두리째 말소해 자기동일적 의식을 지닌 수순한 부정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절대적인 추상화운동을 수행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서로가 독자존재 또는 자기의식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 자기존재를 확신하고는 있으면서도 타자의 존재 ㅣ 를 확신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진리가 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진리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독자존재가 자신에게 자립적인 대상으로서, 다시 말하면 대상이 순수한 자기확신으로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인정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타자에 대해서 있고, 또 각기 서로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행위를 통해서도 저마다 독자존재일 수 있는 순수한 추상화운동(diese reine Abstraktion des Fürsichseins)을 펼쳐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순수한 추상운동으로서 상호간의 행위가 나타날 때, 이들은 각기 자기의 대상적인 양식을 순수하게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일반적인 개별 사안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이중의 행위로서, 타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은 각자가 서로 타자의 죽음을 겨냥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째로 또한 자기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ㅣ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상동, 22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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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의 동요

헤겔 Hegel 2010. 5. 18. 10:3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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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버스로 퇴근하면서 『정신현상학』1권을  읽는데, 역시 토마스 만의 지루한 소설보다 더 재미없다. 이런 책이 재미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것이다. 한글의 술술 읽힘과 쉽지 않은 글의 문맥은 서로 갈등한다. 이래서 가급적 『정신현상학』은 쉽게 보려 하지 않았는데, 일단 대출한 이상 2주 내로는 어떻게든 읽어나가야 겠다.  

의식 장에서 헤겔은 대상과 지각의 문제를 다루면서,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독립성과 대립성을 놓고 집요하고 반복적인 논의를 전개하다가 갑자기 힘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문맥을 잘 짚지 못해 '갑자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힘은 자기에게로 귀속하는 밀려 들어가는 힘과 대립된 상대방을 유발시키는  발현하는 힘으로 나눠지는데, 이 힘은 한 물질의 두가지 양상이다. 실체의 속성과 양태가 사유와 연장이라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을 헤겔은 매개된 일원론으로 변경시킨다. 대립된 두 힘들은 상호침투하면서도 상호 독립적이다. 상반된 요소의 부정을 통해서 한 요소는 정립되지만, 이러한 정립은 본래적으로 있던 요소와는 또 다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신현상학』은 제시된 명제 자체가 엎치락 뒤치락하지만 그 서술방식도 그렇다. 그래서 최종의 이해는 결국 그 끝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책 안에서가 아니라 책 밖으로 나가려면 책의 안을 관통해야 한다. 이렇게 관통해서 나온 이해는 그냥 밖에서 보던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 아니 동요를 흥미롭게 읽어나갈 마음의 준비는 안되있지만, 부담감없이 소설책 읽듯 보려고 노력한다. 희안한 노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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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적 원인으로서의 자유

칸트 Kant 2010. 5. 17. 13: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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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게서 이념은 현상에 적용되지 않음으로 인해, 사유의 형식인 범주보다도 비실재적이지만, 어떠한 경험적 인식도 도달할 수 없는 완벽성을 함유하고 있다(B595). 이러한 이념의 심원한 궤적을 인도하는 것이 이성의 규제적 사용이다(주1).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 중 “제 4 이율배반의 해명”을 다루면서 칸트는 이성의 규제적 원리가 고려할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하는데, 첫번째는 세계 내의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제약된 실재(empirischbedingte Existenz)를 가질 뿐, 무제약적 필연성은 없으며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계열의 근거로서 가상적 존재(intelligibelen Wesen)가 상정된다고 말한다(B590). 여기서 ‘가상적’이라는 용어의 선택과 관련해 칸트는 바로 앞서의 ‘제 3 이율배반의 해명’을 다루면서 자유 행위를, 이것의 인과성과 관련해서 가상적 원인(intelligibele Ursache)이라고 말한다(B586). 그렇다면 이 가상적 원인은 자연세계의 인과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성의 규제적 원리가 고려할 두번째 과제, 즉 전 계열의 근거로서 가상적 존재가 상정되는 바처럼, 인과의 계기로 물려있는 자연세계에 자유의 계기가 시원적 원인으로 상정될 수 있는가? 이 두 번째 물음은 제 3 이율배반의 정립 측 명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자유와 자연필연성의 제약은 각기 독립적이면서 상호 불간섭적이다(B586). 자유라는 가상적 원인과 경험의 계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가상적 존재를 허용했다 하더라도 이성의 경험적 사용은 영향을 받지 않고...이와 마찬가지로 규제적 원칙도 이성의 순수한 사용이 문제일 경우에, 계열 중에는 없는 가상적 원인의 상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로 가상적 원인은 이 경우에 감성적 계열 일반을 가능케 하기 위한, 우리에게 선험적인, 알려지지 않은 근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근거의 실재는 감성적 계열의 모든 제약에서 독립해 있다”(B592)(주2)  

칸트는 이런식으로 현상으로서의 자연과 가상으로서의 자유의 사이를 명확히 구분지으면서도 관련시키는 복잡한 논의를 <선험적 변증론> 편 곳곳에서 반복적이고 변형된 형태로 진행한다. 그러나 점차로 그가 자유에 무게중심을 두어가는 논의는 『순수이성비판』의 후반부인 <선험적 방법론> 편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칸트는 이념으로서의 가상적인 도덕세계는 감성계에 영향을 미치며(B836), 자연의 최후의도는 이성이 도덕을 지향하도록 하는데 있다(B829)고 말한다(주3). 『실천이성비판』을 직접적으로 예고하는 이런 논의는 인과성에 대한 명확한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는 이성이 자연전체에서 체계적인 자연통일을 위한 원인성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자유일반에 관한 원인성은 가질 수 있다(B835)는 것이다. 즉 이론이성의 대상인 자연에 대해서 우리는 인과계열로 설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 계열을 완결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도덕적 행위의 제 1원인은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실천적 자유는 의지를 규정함에 있어 이성의 원인이며(B831) 이때의 순수이성은 이론이성에서와는 달리 객관적 실재성도 지닌다(B836). 자연에서는 결코 상정될 수 없는 제 1의 원인이 도덕의 세계에서는 자유로 정립되는 것이다.


각주

주1)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원칙은 오성의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탐구의 전제이지 실체적 원인이 아니다. 즉 이 원칙은 자연법칙에 따라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무한히 확장하기 위한 것이면서도(B708) 자연에 관한 실체로서의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전제이다(B721). 또한 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원칙은 보편법칙에 따른 자연의 기계적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지 미리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B719-720). 한편 태만한 이성이란, 인과계열상 절대적 전체성은 미정이기에 인과계열의 추구를 중단하고 초자연적 이념에서 안식하려는 것이다(B801).

주2)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박영사, 1997), p425.

주3) 자연의 이러한 개입은 칸트의 역사철학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주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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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된 단일성

헤겔 Hegel 2010. 5. 16. 17:3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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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제 1장, 감각적 확신을 다루면서 두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 단어는 '지금'과 '여기'이다. 헤겔은 이 두 단어가 매개된 단일성(vermittelte Einfachheit), 달리 말해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 보편성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특수한 부정을 거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정신의 역사와 비슷한 설명의 양상을 띤다.

"'지금'을 명시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쳐가는 하나의 운동임을 알 수 있다.
1.나는 '지금'을 가리키며 이것이 '참다운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되는 것은 이미 '지금'이었던 것이 되고 더 이상 '지금'은 아닌 것이므로 여기서 첫번째 진리는 파기된다.
2.두번째 진리로서 나는 '지금'이라는 것은 '지금'이었던 것이고 더이상 '지금'은 아닌 것이라고 주장한다.
3.그러나 '지금'이었던 것이면 지금은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금'이었던 것, 더 이상 '지금'은 아닌 것이라고 했던 두번째 진리가 파기됨으로써 부정됐던 '지금'이 다시 한 번 부정되어 결국은 '지금'은 있다고 하는 첫번째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지금'과 '지금'을 명시하는 것은 그 어느 쪽도 모두가 직접 거기에 있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안고 있는 하나의 ㅣ 운동(Bewegung)이 된다. 즉 '이것'이 정립되고 나면 이렇게 정립된 것은 곧바로 '다른 것'이 되어 '이것'은 파기된다. 그러나 '이것'이 파기되고 난 뒤에 나타나는 '다른 것'이 다시금 파기되면서 운동은 최초의 시점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자체 내로 복귀한 최초의 '지금'은 애초에 직접 거기에 있던 '지금'과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자체 내로 복귀한 이상 자기의 밖으로 나가면서도 자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단일한 '지금'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한 시점상의 지금이면서 절대다수의 '지금'이라고 할 그런 '지금'인 것이다."

『정신현상, 제1장 감감적 확신, '이것'과 '사념' 중, p.144-145.

언어는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전환시킨다

"비록 현실로 있는 사물, 외적인 감각적 대상 또는 절대적인 개별체라는 등의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로 표시되는 것은 보편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das Unaussprechliche)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참이 아닌 것, 비이성적인 것 또는 단지 사념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뭔가에 관하여 그것은 실제로 있는 사물이고 외적인 대상이라는 것 이상의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이는 보편성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ㅣ 서, 즉 이렇게 얘기되고 있는 것은 다른 것과의 차이보다는 다른 모든 것과의 동일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내가 "개별체로 있는 사물"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되는데, 즉 이때 모든 것은 개별적인 사물이다. 마찬가지로 '이것, 이 물건'이라는 말도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이 종잇조각'이라고 할 경우에도 이는 예외없이 모든 종이에 해당되는 말로서 결국 말로 표현되는 것은 언제나 보편적인 관념일 뿐이다."

상동, 146-147.

단일한 사물의 상이한 성질은 의식에 귀속

"의식이 자기편에서 떠맡은 갖가지 성질이라는 측면을 놓고 공통의 매체 속에 저마다 독주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보면 그 모두가 특정한 성질이다. 이를테면 흰색은 검은색과 대립되는 한에서 흰색이 되고 매운 것은 단 것과 대립되는 한에서 매운 것이 된다는 식으로 오직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만 사물은 하나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것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내적인 자기응집성을 지닌 것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것은 예외 없이 하나인 까닭에, 사물은 하나가 됨으로 해서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특정한 성질을 지님으로써 타자를 배제한다고 해야만 하겠다. 그렇다면 사물은 저마다 예외 없이 특정한 성질의 완벽한 존재가 되는 까닭에, 오직 성질을 지님으로써만 타자로부터도 구별된다. 그런데 또 이렇듯 성질이 사물 그 자체의 성질 또는 사물에 안겨져 있는 성질이라고 한다면 사물은 복수의 성질을 지니는 것이 된다." 

『정신현상』, 2장 지각 ; 사물과 착각,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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