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적 원인으로서의 자유

칸트 Kant 2010. 5. 17. 13: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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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게서 이념은 현상에 적용되지 않음으로 인해, 사유의 형식인 범주보다도 비실재적이지만, 어떠한 경험적 인식도 도달할 수 없는 완벽성을 함유하고 있다(B595). 이러한 이념의 심원한 궤적을 인도하는 것이 이성의 규제적 사용이다(주1).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 중 “제 4 이율배반의 해명”을 다루면서 칸트는 이성의 규제적 원리가 고려할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하는데, 첫번째는 세계 내의 모든 것이 경험적으로 제약된 실재(empirischbedingte Existenz)를 가질 뿐, 무제약적 필연성은 없으며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계열의 근거로서 가상적 존재(intelligibelen Wesen)가 상정된다고 말한다(B590). 여기서 ‘가상적’이라는 용어의 선택과 관련해 칸트는 바로 앞서의 ‘제 3 이율배반의 해명’을 다루면서 자유 행위를, 이것의 인과성과 관련해서 가상적 원인(intelligibele Ursache)이라고 말한다(B586). 그렇다면 이 가상적 원인은 자연세계의 인과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성의 규제적 원리가 고려할 두번째 과제, 즉 전 계열의 근거로서 가상적 존재가 상정되는 바처럼, 인과의 계기로 물려있는 자연세계에 자유의 계기가 시원적 원인으로 상정될 수 있는가? 이 두 번째 물음은 제 3 이율배반의 정립 측 명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자유와 자연필연성의 제약은 각기 독립적이면서 상호 불간섭적이다(B586). 자유라는 가상적 원인과 경험의 계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가상적 존재를 허용했다 하더라도 이성의 경험적 사용은 영향을 받지 않고...이와 마찬가지로 규제적 원칙도 이성의 순수한 사용이 문제일 경우에, 계열 중에는 없는 가상적 원인의 상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로 가상적 원인은 이 경우에 감성적 계열 일반을 가능케 하기 위한, 우리에게 선험적인, 알려지지 않은 근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근거의 실재는 감성적 계열의 모든 제약에서 독립해 있다”(B592)(주2)  

칸트는 이런식으로 현상으로서의 자연과 가상으로서의 자유의 사이를 명확히 구분지으면서도 관련시키는 복잡한 논의를 <선험적 변증론> 편 곳곳에서 반복적이고 변형된 형태로 진행한다. 그러나 점차로 그가 자유에 무게중심을 두어가는 논의는 『순수이성비판』의 후반부인 <선험적 방법론> 편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칸트는 이념으로서의 가상적인 도덕세계는 감성계에 영향을 미치며(B836), 자연의 최후의도는 이성이 도덕을 지향하도록 하는데 있다(B829)고 말한다(주3). 『실천이성비판』을 직접적으로 예고하는 이런 논의는 인과성에 대한 명확한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는 이성이 자연전체에서 체계적인 자연통일을 위한 원인성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자유일반에 관한 원인성은 가질 수 있다(B835)는 것이다. 즉 이론이성의 대상인 자연에 대해서 우리는 인과계열로 설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 계열을 완결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세계에서는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도덕적 행위의 제 1원인은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실천적 자유는 의지를 규정함에 있어 이성의 원인이며(B831) 이때의 순수이성은 이론이성에서와는 달리 객관적 실재성도 지닌다(B836). 자연에서는 결코 상정될 수 없는 제 1의 원인이 도덕의 세계에서는 자유로 정립되는 것이다.


각주

주1)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원칙은 오성의 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탐구의 전제이지 실체적 원인이 아니다. 즉 이 원칙은 자연법칙에 따라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무한히 확장하기 위한 것이면서도(B708) 자연에 관한 실체로서의 구성적 원리가 아니라 전제이다(B721). 또한 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원칙은 보편법칙에 따른 자연의 기계적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지 미리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B719-720). 한편 태만한 이성이란, 인과계열상 절대적 전체성은 미정이기에 인과계열의 추구를 중단하고 초자연적 이념에서 안식하려는 것이다(B801).

주2)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박영사, 1997), p425.

주3) 자연의 이러한 개입은 칸트의 역사철학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주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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