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단오에 다녀오다

여행 Reise 2010. 6. 15. 14:15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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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단오행사로 충북 보은의 백록 공동체에 다녀왔다. 올해는 단오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행사 준비 인력이 충분했지만, 이제는 이런 스탭의 역할로는 마지막으로 단오에 간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오전에 12인승 스타렉스를 타고 젊은 사람 5명이 오붓하게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로 청원분기점까지 내려갔다가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바꿔 탄 후 속리산 IC에서 빠졌다. 보은 산지에 들어가기 전에 일행은 관기에 있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는데 40분 넘게 걸렸다. 시간이 멎은 듯한 조용한 시골동네에서 오랜 시간 음식을 기다리는게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짬뽕은 마치 어린시절 먹던 그 맛 같았다. 식사를 하고 산지로 들어갔다. 산 속으로 들어간다는 정도는 들었는데, 이런 정도로 깊을 줄은 생각못했다. 옛날 같으면 화전민들이나 들어가 농사지을 농토로 보일 정도로 고지대에 자리를 잡은 생산 공동체다. 작년에 난 수해복구가 아직 끝나지 않아 공사중인 덤프 트럭 한대가 길을 막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길이 좋아져, 대형 버스가 공동체 마을 입구까지 들어가서  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인프라가 생겼다. 덕분에 마을 버스도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오후에 행사 준비를 마무리 짓고 노령의 생산자분들의 대화를 듣는다. 수자원공사의 농지를 사라고 문자가 와서 전화를 했더니 벌써 팔렸다고 한다. 살 사람이 내정된 거래에 모양새만 갖춘 형태다. 산의 고지대에 가재가 많이 나왔는데 항공 농약 살포 때문인지, 유기농으로 짓는 이 산골의 개울에 가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을 들기 전, 서울에서 온 젊은 사람들은 가재를 잡으로 다른 산의 개울로 갔다. 주로 두 사람이 가재를 찾아냈는데, 1시간 동안 열댓 마리 정도가 잡혔다. 정작 산속 깊은 개울 보다는 아래의 농토 옆 개울에 큰 가재가 잡혔다. 이날 저녁 기름에 튀긴 가재 2마리를 통째로 먹어봤는데, 바싹 구운 새우맛 비슷하다. 저녁을 먹고 다음날을 위해 술은 별로 마시지 않고 잠깐 월드컵 축구 개막전을 보다가 잠자리로 갔다.
 
다음날 오전에 막바지 행사준비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어 산 위로 올라가 봤다. 경운기 한 대가 어렵게 올라갈 수 있는 산길에는 어렵게 개간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농지가 이따금 나타난다. 여기에 깃발이 꽂혀 있는데, 백록 공동체를 이끌었던 전 회장 이철희란 이름이 비를 머금은 바람에 휘날린다. 암투병중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여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오늘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이 분이 지난 일요일 돌아가셨다 한다. 단오는 마치고 가신 것이다. 빈 산중의 농지에 조용히 펄럭이는 이 깃발은 이제 누가 이어갈까.  이 마을에는 주로 70대 이상의 노년 생산자들만 있고, 얼마 전에 젊은 귀농자가 한 명 내려와 있다.

오후 단오 행사 동안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이분 저분과 대화를 하다가, 단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신축 마을회관의 뒤켠에 자리를 잡은 고령의 생산자분들과 막걸리를 마셨다(위의 사진). 이 분들은 이제 술은 잘 못하시고 나같은 젊은 사람이 많이 마셔야 한다고 연신 술을 주셨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공동체에는 한국 전쟁 후 북에서 내려와 정착한 분들이 꽤 있다고 한다. 대대로 물려 받은 땅이 있다면 이런 산골에 들어와 어렵게 농사지을리 만무하다. 이날 단오에는 인근에 있는 초정과 청주, 영동의 생산자들도 왔는데, 40~50대의 연령인 이들은 보은의 생산자들에 비하면 새파란 청년이다. 

여기 저기서 마신 술로 흥건히 취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서울로 출발했다. 이 깊은 산속의 골과 언덕배기에 여러 삶의 터를 일군 한 분이 떠나버린 이 마을에 젊고 활기친 기운들이 몰려올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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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아버지 격인 '플라톤'과 발음이 비슷한 이 영화는 세 번 정도는 봤을 거다. 십대에 처음 봤을 거고, 군대에서도 한번 보고, 공중파에서도 한번 본듯 하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현충일날 EBS에서 본 이 영화는 또 색다른 면이 있다. 기존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을 좀더 세밀하게 봤다고 할까. 정작 네이팜이 터지는 마지막의 대공세 장면을 보면서는 졸았다. 

여전히 인상적이면서도 예전에 비해 진한 감동-반복적인 감정인지도 모르나-을 주는 장면은 소대가 숲속에서 베트콩에게 당하고 인근 마을을 수색하러 들어가 벌어진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노근리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살육하는 '신대륙 개척' 백인의 폭력과 오만이 재연된다. 침략군의 일원인 반즈 분대장이 사건을 일으키고 역시 침략군의 일원인 일리어스 분대장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백인이 베트남 촌락의 주민에게 병주고 약주는 설정으로도 보이지만, 책임자인 소대장이 묵과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태를 거칠게 중단시키는 일리어스의 행동은 테일러에게도 전염된다. 어린 소녀들을 끌고가 강간하려는 동료 병사들을 제지한 것이다. 

살아 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데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신중함과 비굴함의 사이에서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판단력보다는 행동력이 습성화되어야 한다. 뒤늦게 4대강과 세종시 수정을 외치는 한나라 초선의 행태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의 시점을  놓친 뒷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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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타고 집에 온 날

여행 Reise 2010. 6. 5. 22: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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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가족 동반 담합대회가 있어 가족과 함께 양화지구 강변 유원지에 전철을 타고 갔다가 올 때는 원효대교까지 걸어가 유람선을 탔다. 생각보다 운치가 있었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 1시간이나 걸리는 뱃길이지만 길다는 느낌이 안들었다. 잠실대교의 수중보만 없었다면 남양주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오세훈의 한강 르네상스는 쌍스럽지만 이 정도의 뱃길은 과히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강 양안으로 밀리는 차량 정체를 무색케 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유람선은 대체 교통 수단처럼도 보인다. 테오 앙겔플로스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레닌의 거대한 석상을 실은 배가 강을 질주해 가고 강 저편의 사람들이 배웅을 하는 장면. 그러고 보면 전통적으로 강은 참으로 여러모로 인간에게 편의를 안겨주는 자연물이다. 흐르는 강물은 잠시 이용할 수는 있되 강줄기를 비틀고 찢고 파헤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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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로 어제는 마치 가을같이 청명한 날씨였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현재의 긴박한 남북관계에 대해 “북한은 무력충돌로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총 한 방만 쏴도 신용등급 하락과 (외국인) 투자 철수 등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구조"(한겨레)라고 했는데, 이런 신중한 경고를 보수언론과 집권세력은 어떻게 뛰어 넘을까. 아마도 조갑제처럼 더 강한 애국을 부르짖지 않을까.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날부터 매일 저녁 서울 명동과 청계광장 일대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촛불집회를 열기로 했으며, 29일 오후 3시에는 청계광장에서 ‘천안함 사건 진상 규명과 한반도 평화 실현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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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비판

헤겔 Hegel 2010. 5. 24. 13: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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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규정하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유하는' 의식 일반이며, 그의 대상이 내면적인 본체와 외형을 띠고 있는 주체와의 직접적인 통일체라는 데 있다. 동일한 의식이 스스로 자기에게 반발한다는 것이 본원적으로 사유 그 자체의 요소를 이루고 있지만, 이 요소는 우선 애초에는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을 뿐 아직 다양한 존재가 운동을 전개하는 대상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복잡다단한 삶의 한복판에서는 개별 행동에 따르는 온갖 분규도 발생한다는 것이 욕망이나 노동으로 인해 빚어지는 대상적인 국면이다. 그런데 이렇게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마침내 사유의 순수한 운동 속에 드러나는 단순한 구별로 집약된다. 이제는 더 이상 특정한 사물, 특정한 생활에 매여 있는 의식,감정,욕망 등으로 나타나는 온갖 구별 ㅣ 이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구별, 또는 목적을 자기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 아니면 타자의 의식이 정립하였는가라는 식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내 의식 자체에서 그때마다 솟구쳐나오는 사유 속에서의 구별만이 의미있는 것이 된다...그 어떤 자질구레한 일상적 조건에도 구속되지 않고 세상사에 휘말려서 음양으로 닥쳐오는 여하한 작용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상의 세계 속에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아집이라는 것도 이것이 제 마음에 드는 사소한 일에 매여서 예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일종의 자유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 4장 자기확신의 진리 2절 자기의식의 자유 :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중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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