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시골길과 교실의 풍경

문학 Literatur 2010. 4. 14. 16: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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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의 책을 또 골랐다. 연속해서 동일 작가의 책을 보는 건 도스트예프스키 이후 처음 같다. 이 소설은 1차 대전기인 1915년에 마흔이 넘은 모옴이 발표한 자전적 소설인데, 별 주목을 못받다가 전후 『달과 6펜스』의 성공으로 재조명된 작품이다.
 

"다섯시에는 간식을 했다. 사제는 저녁 기도 때 기운이 나도록 달걀 한 개를 먹었다. 케어리 부인은 메어리 앤이 저녁 기도에 나갈 수 있도록 집에 남았지만 혼자서 예배문과 찬송가를 다 읽었다. 케어리 씨는 저녁에는 걸어서 교회에 갔다. 필립도 절룩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 시골길을 걷노라니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불을 밝힌 교회가 먼 곳에서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정하게 느껴졌다. 차음에는 백부가 서먹서먹하게 느껴졌으나 차츰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슬쩍 백부의 손을 쥐기도 했는데 그러면 든든한 기분이 들어 걷기도 더 수월 l 했다."

서머셋 모옴, 『인간의 굴레에서Of Human Bondage 1권, 송무 옮김(민음사, 2007, 1판 21쇄) p.48-49.

"선생은 시험을 별로 신용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신통치 않았지만 시험도 잘 못 치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망스럽긴 하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고 선생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별로 배운 것이 없이 진실을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장난기만 익혀 그럭저럭 진급을 했다. 하기야 그것이 뒷날에는 라틴어를 척척 읽어내는 재주보다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상동,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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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를 읽고

책들 Bücher 2010. 4. 12. 17:1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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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허망한 기분에 빠졌다. 작가의 사기에 놀아났다는 느낌도 들고, 광적인 천재의 결말에 허무함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10월 이후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소설임에 틀림없다. 고독하고  괴팍스러운 천재의 기행을 다루는 소설에는 언제나 신비감이 감돌기 마련이다. 이것도 하나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 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옴 자신도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이 소설을 구상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폴 고갱의 삶을 타히티까지 쫓아가서 조사했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이 아니다. 고갱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허구의 인물일 뿐이며, 그의 모든 그림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남태평양의 섬 깊은 산속에서 눈이 먼채 그린 벽화는 완벽한 진리, 미를 향한 허구의 작품이며, 마치 진리의 부재를 상징하듯이, 작품 속에서 이 벽화는 불타버린다. 완성 뒤에 바로 사라짐이다. 

예술이 마치 어떤 악마가 내린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몰고 간다면,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 자신의 판단, 자율성이 마비된 채 끌려가듯, 인생을 송두리채 전환시키는 것은 경이롭지만, 너무도 위험해 보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한가지에 매진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은 광적인 신도와 흡사하다. 예술의 또다른 광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비롭고 즐거웠던 한주의 책을 오늘 반납할까 한다.

"성경의 한 구절이 입가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인들이 자기네의 영역을 침입하면 성직자들은 불경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헨리 숙부[어린 시절 부모를 여윈  모옴은 실제로 사제였던 숙부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는 윗스터블 관할 사제를 이십칠 년이나 지냈는데, 속인이 성경을 인용하면 악마도 언제나 제 좋을 대로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숙부는 일 실링에 영국산 굴을 열세 개나 살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달과 6펜스』,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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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급박한 전환

문학 Literatur 2010. 4. 11. 16:0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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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사람[스트릭랜드와 캡틴 니콜스]은 마르세유에서 넉 달 가량을 같이 어울려 살았던 모양이다. 그 생활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스릴 있는 사건이 터지는 모험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하루가 하룻밤 잠자리와 고통스러운 허기를 면할 음식을 얻는 일로 다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달과 6펜스』, p.235.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 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스트릭랜드]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남태평양 타히티의 숲속]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동, p.254.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대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정말 아브라함[화자의 촉망받던 의대 동기생]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 ㅣ 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상동,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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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동네로 이사온 선배와 만나서 『달과 6펜스』에 대해 얘기하다가 술을 진탕 마셨다. 다음 구절은 스트릭랜드가 깊은 병에 들었던 자신을 집으로 데려와 간호하도록 해준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때문에 생긴 문제와 관련해 하는 말이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ㅣ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달과 6펜스』, 202~203.

이 소설에는 중간 중간에 남성 중심적인 원시적 여성관과 아울러 철학적 훈계나 설교 분위기의 서술이 나타난다. 작품을 작가의 정신이 반영된 산물로 보는 전통적 작품론은, 『롤리타』나 『제 49호 품목의 경매』의 경우처럼 작품을 작가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전개시키는 현대소설의 조류와 비교해 볼 때, 다소 보수적인 것이다. 동일률적인 철학과 달리 차이를 시초부터 설정하는 들뢰즈에게 작품은 리좀으로 이루어진 연결망이다. 고원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서 『천 개의 고원』이 된다.  자신에서(an sich)부터 나와서(für sich)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anundfür sich)은 오디세이의 귀환, 자신 안에서의 여행, 내재성일 뿐이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며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유목이며 외재성이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 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 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욋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달과 6펜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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