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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Kant'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8.08.29 칸트와 니체
  2. 2007.06.25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아직도 유효한가? 3

칸트와 니체

칸트 Kant 2008. 8. 29. 12:5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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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와 "하고자 한다"는 동사개념이 결국 의지의 문제로 귀착된다면, 결과적으로 이 두 독신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그 귀결에 이르는 과정과 방법은 얼마나 상이한가. 한 사람은 오성의 명증성을 사용해 이성의 체계적 비판의 작업으로서 당위를 끌어낸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이성 밖에서 이성을 주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의지의 문제에 다가섰다. 방식과 과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접점과 이 접점의 해리 지점을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중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장에서 낙타의 비유를 통해 칸트를 염두해 두고 있다. 낙타에서 사자, 어린아이로 가는 정신의 단계적 변화에서 낙타는 가장 낮은 수준의 정신 단계로서 인식의 괴로운 노동을 수행하는 자이다. 인식론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나가는 칸트의 도정은 법철학에서 미완의 종결을 이룬다. 형이상학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엄밀하게는 도덕의 형이상학으로서, 인간 존재의 도덕성을 인과율로 규정된 자연이나 초월적인 신적인 존재의 요청으로부터 탈각시키려는 것이 칸트의 목적이다. 자연성은 인간을 구속시킬 수 있으나 그의 자유를 침범하지는 못한다. 신적인 존재는 인간의 도덕을 완성시키거나 근거짓지는 못하지만 도덕을 함양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도덕은 인간의 자유로부터 성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의 과제이다. 여기서 칸트가 법철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를 법실증주의자의 전형으로 몰아 붙인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자유의 인식근거로서 강력한 규범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니체에게는 칸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체계를 완성시키는 것이 엄중하고 지난한 인식의 노동, 단조로운 인식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사자는 모든 전제 조건을 부수는 부정의 의미를 상징한다. 용에게 일격을 가하는 사자의 비유는 망치를 들고 기존의 철학을 부수는 회의주의를 암시한다. 정합적인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와 이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의 대립은 고대부터 있었는데, 인과율을 부대연상이라는 심리적 작용으로 설명하려는 흄과 이를 반박하는 칸트의 논의는 이 논쟁의 근대적 재현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영원한 놀이인 어린아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이 물음을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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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설치다 꿈을 꾸었는데, 몇 개의 간판이 걸린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나머지 간판은 기억이 나지 않고, 한 가지는 뚜렷하다. "칸트와 헤겔 없는 세상 살만하다!" 뭐 이런 정도다. 아직까지 헤겔은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고,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헤메고 있다 보니 이런 꿈도 산출하나 보다.    

이 꿈을 해몽한다기 보다는, 이 꿈에 관해 생각해 본다. 칸트와 헤겔은 무엇 때문에 읽으려고 하는가? 단순히 교양으로 읽는다고 하기엔, 이들 노작의 전집 규모는 무시무시해 보인다. 분명히 교양서적류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유체계를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인가? 즉 그들의 사유체계에 동화하려는 것인가?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단지 참고서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즉 그들 텍스트의 험난한 지절들에 빠져 들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동화될려고 공부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사유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나의 뇌에 다운로드되어 실행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생각이 물질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사유체계는 현실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표가 아닐까? 그들의 사유에 격류를 쏟아 부은 현실이 여전히 오늘에도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공유되면서도 이제는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서 있는 지점들은 무엇인가? 관점에 따라 이에 대한 판단도 상이하겠지만, 나에겐 아직도 유효한 지점들이 산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기독교의 문제가 그렇다. 헤겔의 실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한국 기독교에 적용 가능하다. 명제의 명료한 해석과 비판을 위해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과 변증론은 아직도 분석철학에서 동원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는 철학을 배우기 보다는, 철학하기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하기란 비판적 언어 활동이다. 이성은 사태를 엄정히 판단하도록 사유의 법정을 주관하는 재판관이다. 헤겔은 칸트의 이성이 매우 협소하다고 보면서, 그것을 주관에 한정된 의식의 활동이라고 규정하지만, 의식을 초월해 전개해 나가는 이성의 자기 활동으로서의 정신은 그 기원과 추진동인을 칸트에게서 빌려 왔다. 즉 칸트가 이성을 존재론까지 전개시켜 나가지 못한 작업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 즉 독일 관념론의 극점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예나시절 헤겔에게 이 작업을 위한 매개는 피히테와 셸링이 마련해 주었다).  

분명 칸트와 헤겔을 모르더라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헤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그냥 있는데로(감성적 확신의 단계인 직접성Unmittelbarkeit의 단계) 가는 生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런 난해한 서구의 철학자를 들먹일 게 아니라, 우리의 것에서 사상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지구적인 환경문제, 민주주의의 원칙을 집어 삼키는 자본의 운동, 여성 및 장애인,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생태적 각성과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며 동학을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칸트는 실천적 이성의 역할에 혁명적 기대를 걸었다. 그는 이론 이성에 분명한 한계를 규정하면서도 실천 이성에 경험 너머의 가능성을 명시했다.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와 같이 이론 이성이 다룰 수 없는 선험적 명제와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의 대상도 선험적인 것이다. 즉 실천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경험적 제한도 없다. 이렇듯 선구적인 실천적 지식인의 실천은 이미 설명되 있는 것이다.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행력이다. 튀빙겐과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청년 헤겔 또한 이 실행의 문제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맑스처럼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칸트 보다는 현실 문제에 더 개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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