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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설치다 꿈을 꾸었는데, 몇 개의 간판이 걸린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나머지 간판은 기억이 나지 않고, 한 가지는 뚜렷하다. "칸트와 헤겔 없는 세상 살만하다!" 뭐 이런 정도다. 아직까지 헤겔은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고,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헤메고 있다 보니 이런 꿈도 산출하나 보다.    

이 꿈을 해몽한다기 보다는, 이 꿈에 관해 생각해 본다. 칸트와 헤겔은 무엇 때문에 읽으려고 하는가? 단순히 교양으로 읽는다고 하기엔, 이들 노작의 전집 규모는 무시무시해 보인다. 분명히 교양서적류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유체계를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인가? 즉 그들의 사유체계에 동화하려는 것인가?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단지 참고서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즉 그들 텍스트의 험난한 지절들에 빠져 들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동화될려고 공부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사유가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나의 뇌에 다운로드되어 실행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생각이 물질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사유체계는 현실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표가 아닐까? 그들의 사유에 격류를 쏟아 부은 현실이 여전히 오늘에도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공유되면서도 이제는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서 있는 지점들은 무엇인가? 관점에 따라 이에 대한 판단도 상이하겠지만, 나에겐 아직도 유효한 지점들이 산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기독교의 문제가 그렇다. 헤겔의 실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한국 기독교에 적용 가능하다. 명제의 명료한 해석과 비판을 위해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과 변증론은 아직도 분석철학에서 동원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는 철학을 배우기 보다는, 철학하기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하기란 비판적 언어 활동이다. 이성은 사태를 엄정히 판단하도록 사유의 법정을 주관하는 재판관이다. 헤겔은 칸트의 이성이 매우 협소하다고 보면서, 그것을 주관에 한정된 의식의 활동이라고 규정하지만, 의식을 초월해 전개해 나가는 이성의 자기 활동으로서의 정신은 그 기원과 추진동인을 칸트에게서 빌려 왔다. 즉 칸트가 이성을 존재론까지 전개시켜 나가지 못한 작업을 헤겔이 발전시킨 것, 즉 독일 관념론의 극점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예나시절 헤겔에게 이 작업을 위한 매개는 피히테와 셸링이 마련해 주었다).  

분명 칸트와 헤겔을 모르더라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헤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그냥 있는데로(감성적 확신의 단계인 직접성Unmittelbarkeit의 단계) 가는 生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런 난해한 서구의 철학자를 들먹일 게 아니라, 우리의 것에서 사상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지구적인 환경문제, 민주주의의 원칙을 집어 삼키는 자본의 운동, 여성 및 장애인,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생태적 각성과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며 동학을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칸트는 실천적 이성의 역할에 혁명적 기대를 걸었다. 그는 이론 이성에 분명한 한계를 규정하면서도 실천 이성에 경험 너머의 가능성을 명시했다.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와 같이 이론 이성이 다룰 수 없는 선험적 명제와 마찬가지로, 실천 이성의 대상도 선험적인 것이다. 즉 실천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경험적 제한도 없다. 이렇듯 선구적인 실천적 지식인의 실천은 이미 설명되 있는 것이다.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행력이다. 튀빙겐과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청년 헤겔 또한 이 실행의 문제에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맑스처럼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칸트 보다는 현실 문제에 더 개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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